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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17화 (117/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17화

    ‘S급 전투계 헌터가 나랑 엮일 일이 뭐가 있다고 저런 표정을 지어?’

    유한이는 괜히 억울해졌다.

    그가 한 일이라곤 희나에게 ‘일을 하자’라고 말한 것뿐이었는데!

    물론 그 표현의 방식이 다소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슬쩍 눈감고 지나쳤다.

    어느새 다가온 희나는 유한이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얼이 잔뜩 빠졌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좀 차려. 이제 네가 좋아하는 일 얘기 해야 하니까.”

    유한이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어, 어……. 그래. 일……. 연구…… 좋지. 그, 그거 얘기하자!”

    평소보다 한결 유순해진 목소리였다.

    “언제까지 인사만 나눌 거야? 빨리 안 올래?”

    희나는 유한이와 마주 앉자마자 곧장 본론을 꺼냈다.

    “시금치를 가공해서 가루나 액체 형태로 만들 수 있을까?”

    유한이는 한동안 넋 나간 듯 멍하니 앉아 있었으나, 그도 잠시였다.

    일 이야기에 금세 정신을 차리고 팔팔해졌다.

    “……시, 시금치를 가공해서 가루나 액체로 만들 수 있냐고? 둘 다 가능해.”

    “그럼 이 시금치의 효과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가공하는 건?”

    그 말에 흐리멍덩하던 유한이의 눈이 총기로 번뜩였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가능할걸.”

    그의 긍정에 희나는 가볍게 흥분했다.

    ‘시금치나물 무치기도 굿바이할 때가 됐어!’

    스킬 증진과 시금치 연구를 위한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며칠간의 연습이 다소 소모적으로 느껴졌던 탓이다.

    여러모로 시간 낭비에 재료 낭비라는 느낌이 강했다.

    이제 조리법은 제법 일정해졌고, 희나도 계량하며 요리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이 이후부터는 개인 수련의 문제였다.

    ‘오빠 시금치로 연습하는 것도 꽤 아까웠는데, 잘됐어.’

    기초 실험이라는 명분하에 오빠가 애지중지 기른 특별한 시금치를 한없이 소모하자니 신경이 쓰였다.

    ‘시금치는 바둑이 버프 받아 다시 기르면 되니 이번 수확은 전부 연구에 할애해도 된다고는 했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거야.’

    홀로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유한이가 추가로 물었다.

    “네 아이디어는 잘 알겠어. 만약 재료의 물성이 바뀌어도 효과가 그대로라면, 꼭 원재료를 가지고 조리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소리지?”

    “응!”

    그는 희나가 운을 떼자마자 그 의미를 깨달은 듯했다. 척하면 척이었다.

    자칭 ‘천재 연금술사’라 콧대를 잔뜩 높이더니만, 이 정도면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건 인정해야겠다 싶었다.

    희나는 속으로 유한이에 대한 평가를 반 단계 높여 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런데, 시금치 가루나 원액을 넣어 간편식을 만드는 건 어떨까 해서.”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야.”

    “나쁘지 않기는. 괜찮은 생각인 거, 나도 알고 있거든!”

    희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생색을 냈다. 이건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꽤 기발한 아이디어 같았기 때문이다.

    유한이는 잠시 생각에 빠져 매끈한 턱을 살살 문질렀다.

    “……사실 그런 식의 응용은 나도 떠올려 본 부분이긴 해.”

    “뭐? 그럼 왜 진작 말 안 해 줬어?”

    희나는 억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진작 그 일부터 시작했으면, 아까운 시금치를 잔뜩 낭비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유한이의 생각은 사뭇 다른 듯했다.

    “아직 연구 기본이 안 잡혀 있잖아. 기본 재료를 가지고 초기 실험을 많이 진행해 봐야지!”

    그러면서 그는 연구 초석을 단단하게 다져 두어야 먼 훗날, 난제에 부닥쳤을 때 도움이 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하지만 실용주의적인 사고가 강한 희나에게는 이 과정이 소모적이라는 인상이 더 강했다.

    “애당초 이걸 포션처럼 개발하는 게 최종 목표였잖아.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지. 이렇게 세월아 네월아 일해서 언제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있겠어?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이건 시금치 낭비에 시간 낭비처럼 느껴져.”

    딱 잘라 말하자, 유한이가 팔짱을 끼며 입매를 굳혔다. 몹시 심각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너는…… 연구 기초 단계는 건너뛰고 응용 및 개발로 넘어가고 싶다는 거?”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애당초 개발부터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그것부터 하는 게 더 실리적이었을 것 같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유한이가 무어라 반박하려기에, 희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었다.

    “뭐라도 효율적인 걸 보여 줘야지. 투자한 길드장님 입장에서 생각해 봐. 우리가 모여서 여태껏 한 게 시금치나물 무치는 일뿐이라는 보고를 들으면 얼마나 실망하시겠어? 우리 능력에 의심을 가질 수도 있어.”

    제법 타당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유한이는 그렇지 느끼지 않은 듯했다. 그는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이! 이!”

    “뭐야, 너 왜 그래?”

    “……이, 이렇게 사람들이 이렇게 단기적인 성과만 바라니까 이 나라에 순수 학문이 꽃피지 못하는 거야!”

    급발진한 그의 태도에 희나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뭐야, 갑자기?”

    “시간과 인력과 노오오오력을 투자해야 순수 학문이 발전하는데!”

    절절하기 그지없는, 한 서린 목소리였다.

    ‘뭐야? 갑자기 미쳤나 봐.’

    희나는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유한이가 더 크게 외쳤다.

    “너는 내 마음 모른다! 순수 과학에 대한 내 애정, 모른다!”

    이를 시작으로 그의 한탄 어린 절규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희나는 의자를 빼서 유한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한이는 뭐가 그리 억울한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였다.

    “야, 이제 진정했어?”

    “……나는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이야.”

    장장 30분 동안이나 순수 과학에 대한 애정과 함께 울분을 토로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 한 번쯤은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그래. 그렇다고 치고, 일 얘기나 마저 하자. 그러니까 넌 이번 연구를 완전히 처음부터 차근차근 해 보고 싶었던 거지?”

    학문 연구에 대한 유한이의 열정은 칭찬해 줄 만했다. 그리고 맞는 말도 꽤 했다.

    과학의 미래니, 뭐니 설교를 시작했을 때는 희나조차 ‘그건 그렇지.’ 하고 설득됐을 정도니 말이다.

    심지어 저 멀리 테이블 위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강진현도 고개를 미약하게나마 끄덕였다.

    ……하지만 유한이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 그걸 실행에 옮기는 일은 달랐다.

    “네 말도 틀린 데가 없어. 그렇지만 나는 너 같은 연구자가 아니야. 내 각성 클래스는 살림꾼이야.”

    유한이의 계획을 전부 들어주다가는 본업과 부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릴 판이었다.

    희나는 그건 싫었다.

    “애당초 시금치 합동 연구도 사람들에게 더 괜찮은 대체 식품을 제공해 주고 싶은 맘에 시작했던 일인걸. 연구도 연구지만, 내가 좋아하는 길드 사람들을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거야. 거기다 이 기회를 통해 내 스킬을 발전시키고 싶었기도 했고.”

    그 말에 이때다 싶었는지, 유한이가 신나게 맞장구쳤다.

    “그래! 맞아. 너도 네 능력을 키우고 싶지? 이대로 어영부영 사용하고 지나가기에는 아깝지? 나는 시금치도, 네 스킬도 신기하거든. 말 나온 김에! 스킬에 대해 제대로 탐구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드냐?”

    그의 물음에 희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네게 많이 배웠다고 생각해. 눈대중이랑 손맛으로 해치우던 음식을 이전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하게 됐으니까.”

    “그치? 과학적 조리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알았지?”

    유한이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희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은 이곳저곳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따끈한 음식을 차려 주는 거야. 내 스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 가는 것도 좋지만, 만약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

    그 말이 끝나자마자 희나의 눈앞에 시스템창이 또롱또롱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어?”

    연이은 빅 뉴스에 희나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갑자기 허공을 보고 넋을 놓는 희나의 모습에 유한이도 덩달아 놀랐다.

    “이희나?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방금 스킬 하나 랭크 업 했어.”

    “뭐? 더 자세히 말해 봐. 스, 스킬 랭크가 올랐다고? 갑자기 왜?”

    “너랑 같이 요리했던 것도 도움이 된 것 같고…… 방금 내가 생각한 게 옳았나 봐. 좋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

    희나는 더듬더듬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다 ‘자신의 스킬에 대해 남에게 자세히 말하는 건 위험하다’고 당부했던 강진현의 말이 떠올라 입을 헙 막았다.

    “이 이상은 말 못해줘. 비밀이야.”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할게. 나한테만 얘기해주면 안 돼?”

    “안 돼.”

    단호한 대꾸에 유한이가 입을 삐쭉였다.

    “씨잉…….”

    당장이라도 떼를 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희나는 서둘러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아, 아무튼! 내 클래스는 살림꾼이야. 나를 챙기고, 주변을 정돈하는 일이 더 좋아. 네가 바라는 만큼 노력과 시간은 투자 못 해 줘.”

    여유로운 일을 하고 있다지만, 희나의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는 어려웠다.

    유한이는 욕심이 많은 연구자였다. 그가 만족할 만큼 요구를 들어주려면 한없이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만 할 게 분명했다.

    “……쳇.”

    유한이는 희나의 대답에서 진심을 읽어 냈는지 더 우기지는 못하고 작게 투덜거렸다.

    “연구가 얼마나 큰 성취감을 주는데……. 그것도 모르고.”

    시비조인 듯하지만, 목소리에 힘이 쪽 빠져 있었다. 사실상 이건 유한이가 흔드는 항복 깃발이나 다름없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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