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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16화 (116/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16화

    ‘진현 씨, 의외로 혼자서 관심 차지하고 싶어 하는 어린애 같은 면이 있네.’

    손맛이 너무나 좋아서인 걸까? 강진현은 유독 희나를 특별히 여겼다.

    물론 단순히 그렇게 보기엔 그의 태도가 아리송한 부분도 있긴 했다.

    그러나 희나는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이렇게까지 독차지하고 싶어 할 줄은 몰랐지만……. 하긴, 그동안은 제대로 먹고 쉬는 기쁨을 전혀 누리지 못했으니까. 내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질 만도 하지.’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간지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녹슬어 있던 희나의 연애 세포가 삐걱거리며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장본인인 희나조차도 모르는 은밀한 비밀이었다.

    * * *

    강진현은 복귀한 그다음 날부터 자기 사무실이 아닌 희나의 사무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주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그를 보자마자 유한이가 노트에 써 갈긴 문장은 이랬다.

    - 야. 강진현 싫어하는 것 좀 말해 주라.

    “그건 왜?”

    - 구체적으로 요구해 보자면, 강진현이 나를 죽지 않을 정도로 살살 때리고 싶을 수준의 행동을 추천해 주면 좋겠어.

    “너 변태니?”

    - 쉿! 말 좀 낮춰서 말해! 강진현 들을라!

    그래서 희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너 변태구나?”

    - 그보다는 만다라의 안정초를 얻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주지 않으련? 아무튼, 적당히 합의 볼 수 있게 도움 좀 줘 봐.

    유한이는 보험 사기꾼 같은 소리를 했다.

    만다라의 안정초를 뜯어내고 싶어 강진현에게 얻어맞고 싶다는 거였다.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보지 마.”

    희나는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졌는지 유한이가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야! 강진현 전속 관리 팀장이라면서 그런 것도 몰라?”

    “안 알려 주는 것뿐이거든!”

    “알 권리를 보장하라!”

    “똑똑하단 애가 헛소리는 왜 이렇게 많이 해?”

    톡 쏘아붙이니, 유한이가 작게 씨근덕거리며 희나의 눈치를 보았다.

    한 번 겪어 보았던 손맛이 무서워 함부로 덤비지 못하는 게 우스웠다.

    “이익……!”

    유한이는 분한 얼굴로 눈알을 굴렸다. 그러면서 그는 비장하게 ‘복수할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기죽은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것처럼 보일 뿐, 희나에게는 기약 없는 다짐으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희나와 유한이는 한동안 계속 아웅다웅했고, 그 모양은 임무 보고서를 작성하던 강진현의 심기를 거슬렀다.

    “희나 씨, 괜찮으십니까?”

    강진현은 조금 예민해진 어투로 희나의 안부를 물었다.

    유한이 따위는 자신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며 희나가 확답해 준 바 있었기 때문에 이제 둘의 친분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희나의 말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유한이가 희나에게 치근덕대는 것이 굉장히 눈에 거슬린다는 것 정도.

    강진현은 마뜩찮은 기색을 애써 삼켜 냈다.

    ‘그래. 청룡 길드원 중 희나 씨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희나만 나타나면 헤벌쭉 웃음을 지으며 단내 맡은 개미처럼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헌터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저 연금술사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을 게 틀림없었다.

    우드득.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볼펜 한 자루가 갈대처럼 부러져 나갔다.

    “……아, 이런.”

    강진현은 까만 잉크로 얼룩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희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컨디션이 좋아진 덕에 한동안 저지른 일 없던 실수였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던가?’

    지난밤, 희나의 손길이 닿은 침상에서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는 희나가 정성껏 차려 준 아침을 먹었고, 덕분에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그런데도 힘 조절을 하지 못해 볼펜을 부러뜨리다니……. 어째서?’

    강진현은 다소간의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당혹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 진현 씨! 손 괜찮으세요?”

    까맣게 물든 강진현의 손을 발견한 희나가 물수건을 들고 후다닥 달려왔기 때문이다.

    “펜이 부러졌네요. 손은 안 다친 것 같고……. 손바닥 이리 내세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제가 닦는 편이 더 나을 거예요.”

    희나는 자기는 청소 스킬이 있으니 이런 얼룩 정도는 금방 지울 수 있다며 조잘거렸다.

    그러면서 강진현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아…….”

    미지근한 온도로 데운 물수건이 닿자 검은 잉크의 흔적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이것 봐요. 금방 지워졌죠?”

    희나는 산뜻하게 손을 떼며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강진현은 희나의 손이 멀어지는 게 아쉽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 기분은 언제나 그렇듯 특별했다.

    이 관심은 그가 S급 헌터여서 받는 관리가 아니라, 강진현이라는 인간이기에 받는 사소한 호의들이었다.

    그 호의는 언제나 강진현이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평범한 소년이었을 적, 피 튀기는 전투 없이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해 나갔을 적의 일상들…….

    그리운 기억이었다.

    강진현이 잠시 추억에 잠긴 사이, 희나는 테이블 위에 튄 잉크 얼룩까지 야무지게 닦아 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강진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아직 피로가 덜 풀렸나 봐요?”

    이제 희나는 강진현의 힘 컨트롤이 곧 컨디션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제는 저녁도 든든히 먹이고, 안락한 침상 스킬로 잠도 푹 재웠는데. 뭔가 부족했나?’

    유한이와 며칠 있었다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옮았는지, 이전과 달랐던 부분을 요목조목 체크하게 됐다.

    희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 강진현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채 자각하지 못했다.

    C급 살림꾼의 둔한 신경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쟤네 분위기 왜 저래?’

    유한이만이 강진현의 짙은 시선을 의문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이어 가던 것도 잠시였다.

    연금술사 유한이의 관심사는 오묘한 인간관계보다 포션 연구에 더 가까웠다.

    즉, 남녀 간의 묘한 분위기를 잡아내는 눈치 따위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그는 툴툴거리면서 희나를 졸랐다.

    “언제까지 거기서 책상 닦고 있을 거야? 기다리다 돌 되겠어!”

    성화에 희나가 눈을 흘겼다.

    “과장하기는. 5분도 안 지났거든! 흥!”

    “희나 씨 말이 맞습니다. 시간 얼마 안 지났습니다.”

    강진현까지 희나의 편을 들어 주자 유한이가 눈꼬리를 팩 올렸다.

    “하, 하지만…… 내가 우선이야!”

    샐쭉한 자기주장에 강진현의 기세가 날카롭게 피어올랐다.

    피어오른 투기는 유한이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유한이 씨가 희나 씨에게 우선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비전투계인 연금술사가 S급 헌터의 투기를 그대로 받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윽……!”

    유한이의 낯빛이 시퍼렇게 변했다.

    강진현에게 한 대만 맞고 싶다며 배짱을 부리던 일은 어느새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쟤가, 나한테 먼저 하, 할 말 있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마지막 자존심만은 버리지 못했는지 꾸역꾸역 말대답은 했다.

    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쟤 표정이 왜 저래? 애 죽겠네.’

    소리 소문 없이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희나도 눈치가 있었다.

    주눅 든 유한이의 목소리와 창백한 얼굴에서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현 씨한테 반말 찍찍 잘만 하다가 갑자기 웬 존대? 진현 씨가 뭘 했나?’

    기세등등한 모습도 얄미운 데가 있었지만,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발발 떠는 모습은 더더욱 못 볼 꼴이었다.

    희나는 슬쩍 강진현과 유한이 사이에 끼어들어 시야를 차단했다.

    “시금치 관련해서 네게 전할 말이 있긴 해. 하지만 진현 씨 살피는 것도 내 일이야. 사실 연구보다 그게 훨씬 중요한 일이지.”

    희나의 대답에 날 선 기세가 확 가라앉았다. 강진현이 눈을 빛내며 희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제 직급 자체가 진현 씨 케어하라고 생긴 건데요. 어제도 말씀드렸잖아요.”

    상냥한 대꾸였다.

    그와 동시에 유한이를 무섭게 옥죄어 오던 압박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뭐, 뭐야! 거, 겁나 무섭네.’

    유한이는 낮은 한숨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각성 이후로 연구실을 나서 본 적 없는 그로서는 처음 경험해 보는 선득함이었다.

    ‘쟤는 무섭지도 않나?’

    유한이는 강진현과 대화를 주고받는 희나를 대단하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강진현 있을 땐 앞으로 이희나 옆에 딱 붙어 있어야겠다.’

    지난 만남에서 귀한 물건을 턱턱 내놓기에 조금 만만하게 보았는데, 전혀 그럴 상대가 아니었다.

    강진현은 그저 희나 앞에서 이중인격 수준으로 얌전해지는 것뿐이었다.

    희나를 바라볼 때면 강진현의 눈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 온순한 눈빛은 유한이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으으…….’

    적개심으로 반들거리는 강진현의 검은 눈동자를 떠올리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희나 씨. 이제 남은 일 보십시오. 제가 희나 씨의 소중한 시간을 지체했군요.”

    한편, 희나와 대화를 나누던 강진현은 몹시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격려의 말을 건넸다. 이상할 정도로 따스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희나는 조금 혈색이 나아진 듯한 유한이를 힐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이제 일해야겠어요. 참, 진현 씨 불편한 거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몸 안 좋으면 힐러 꼭 찾아가 보세요. 점심때 먹고 싶은 것도 생각해 두고요. 가능한 메뉴면 다 해 드릴게요.”

    사근사근하게 대답하자, 강진현의 무뚝뚝한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모습을 희나 어깨 너머로 훔쳐보던 유한이는 그의 미소에서 묘한 감정을 읽어 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강진현에게 겁먹은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이 굉장히 고까워지는 웃음이었다.

    ‘……저건 무슨 표정이지?’

    유한이는 그 표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마침내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아! 그래! 아들 낳은 후궁 같은 표정!’

    그랬다. 외아들을 낳고 성총을 독차지한 표독스러운 후궁이 이러할까!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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