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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13화 (11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13화

    희나는 그런 그를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유한이는 평화를 좋아하는 희나를 폭력적으로 만드는 흔치 않은 인재였다.

    아마 강진현만 없었다면 실내화를 벗어서 등짝을 한 대 내리쳤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사람을 쳐 놓고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으면 어떡해?”

    유한이가 어깨를 쫙 펼치며 강짜를 부렸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현 씨가 쟤를 다짜고짜 밀쳐 내긴 했지.’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밉상인 유한이보다 강진현에게 마음이 더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렇죠, 진현 씨?”

    “음.”

    희나의 질문에 강진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잠시간 침묵하고는 입을 열었다.

    “……임무 수행 때문에 조금 예민해져 있었던 듯합니다. 일면식 없는 상대를 급작스레 마주치면서 무의식중에 희나 씨가 위험에 처했다고 인식한 것 같습니다.”

    이에 유한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유한이 씨라고 했습니까?”

    강진현은 펄펄 뛰기 시작한 유한이의 말을 들을 가치조차 없다는 듯 뚝 잘랐다.

    “아까 있었던 일은 유감입니다. 오피스 안에 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터라…… 예상치 못한 광경에 깜짝 놀라 밀쳐 내 버렸군요.”

    “아악! S급 헌터면 내 기척을 느끼고도 남았을 텐……!”

    쾅!

    그와 동시에 갑자기 테이블이 쾅 하고 울렸다. 강진현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유한이는 몸을 움찔했다.

    “뭐, 뭐야? 책상은 주먹으로 왜 내려쳐?”

    “날파리가 보여서, 잠시.”

    강진현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고, 유한이는 눈꼬리를 뾰쪽하게 세워 올렸다.

    “흥! 내, 내가 이런다고 쫄 줄 아, 알고?”

    그렇다기엔 시선이 파르르 떨리고 있긴 했지만…… 강진현은 그 점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올린 주먹을 쫙 펼쳤다.

    “아까의 조치에 대해 정신적 보상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십시오. 배상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핏빛을 띤 풀잎 한 줌이 놓여 있었다.

    복잡한 도안처럼 보이는 황금빛 잎맥을 보니 척 보기에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희나는 관심 어린 눈길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인벤토리 안에서 꺼낸 걸 보니…… 던전 부산물 같은 건가?’

    호기심은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잎을 보자마자 유한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기 때문이다.

    “뭐야, 이건 만다라의 안정초잖아? 상태는…… 특급이네! 등급도 S급!”

    그는 붉은 풀잎을 낚아채어 자세히 살피는 동시에 강진현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진짜, 나 이거 주는 거지? 어?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안 그러면 내가 강진현은 사기꾼에 폭력범이라고 소문 다 내고 다닐 거야!”

    그러면서 물건을 허겁지겁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이에 희나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강진현과 유한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현 씨가 호구로 뜯어먹히고 있는 거 아냐?’

    아무리 각성자들의 금전 감각이 일반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지만, 유한이의 격렬한 반응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유한이도 나름 청룡 길드에 소속된 상급의 연금술사였다.

    어지간해선 부족한 것 없을 그가 이렇게 화색을 띨 정도로 반가워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강진현이 내준 건 상상 이상으로 값나가는 물건인 듯했다.

    “저거, 줘도 괜찮은 거예요?”

    강진현에게 슬쩍 물어보았으나, 반응한 건 유한이였다.

    “당연하지! 서로 합의해서 주고받은 거니까 줘도 괜찮고말고! 저기, 했던 말 무르기 없는 거 알지? 어?”

    그는 온몸 털을 빳빳이 세운 고양이처럼 반응했다. 이 ‘만다라의 안정초’라는 것을 절대로 되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흥! 천하의 강진현에게 사람 치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또 사례한다면 날 한 번 더 쳐도 좋아. ……두 번도 좋고. 연금술사의 몸은 소중하지만, 이 정도 폭력이라면 기꺼이 허락해 줄 수 있어. 물론 소문도 안 낼 거고.”

    선심 쓴다는 듯, 유한이가 양팔을 쫙 벌렸다. 손바닥 뒤집듯 완전히 뒤집힌 태도였다.

    그 모습에 희나는 질린 표정을 했다.

    “어떻게 풀잎 몇 장에 몸을 홀라당 넘길 생각을 해? 너, 아무한테나 맞고 다니는 거 아니야. ……아니, 그 전에 진현 씨는 사람 때리는 취미도 없거든!”

    옆에서 상식적인 조언을 날려 봤지만, 만다라의 안정초에 눈이 먼 유한이는 귓등으로도 듣는 척하지 않았다.

    도리어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정말로 또 때릴 생각 없나? 안정초 좀 더 필요한데…….”

    실험 이야기가 나오면 뻣뻣한 허리를 굽신거리기에 연구에 자존심을 팔아넘긴 건 알고 있었지만, 자기 인권까지 손쉽게 팔아넘길 줄은 몰랐다.

    ‘뭔가 중요한 걸 얼렁뚱땅 지나쳐 버린 것 같은데.’

    그 와중에 희나는 무엇인가 빼먹은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희나가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유한이는 계속 ‘자기를 때려 달라’며 입을 나불거렸다.

    강진현은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 하세요?”

    “시끄럽고, 정신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혼란스럽군요.”

    강진현의 대답에 희나는 유한이를 향해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야, 너 오늘은 그만 가 봐.”

    “어? 실험은?”

    “아까 결과 봤잖아. 노트 가지고 썩 나가!”

    희나의 축객령에 유한이는 콧김을 흥흥 뿜으면서도 잽싸게 짐을 챙겼다.

    “……흥, 오늘은 내가 기분 좋아서 봐주는 줄 알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새로 얻은 만다라의 안정초를 살필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건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 간다! 내일 봐!”

    그는 몸을 휙 돌려 사무실을 벗어났다.

    쾅!

    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닫혔다.

    “하여간, 나가는 것까지 부산스러워 가지고는…….”

    희나는 닫힌 문에다 대고 꽁알꽁알 흉을 보다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소 가라앉은 눈빛으로 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독 피로해 보이는 그 모습에 희나는 격려의 차원에서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었다.

    “피곤하셨을 텐데, 시끄러웠죠? ‘홈 스위트 홈’ 문 열어 줄까요? 진현 씨 침구에 스킬도 걸어 줄게요. 거기서 쉬어요. 아니면 여기서 우선 식사부터 할래요? 밥 안쳐야 해서 좀 기다려야 하긴 하는데…….”

    유한이와의 합동 연구도 중요하긴 했지만, 제1 업무는 여전히 강진현을 보살피는 것이었다.

    그래서 희나는 그를 위해 불청객을 쫓아내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희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일적인 우선순위를 제하더라도 진현 씨가 우선이긴 하지. 우린 거의 한 식구잖아.’

    거기다 강진현은 바로 전에 사무실을 나간 누구누구와는 다르게 아주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식사부터 차려 주실 수 있을까요? 그간 희나 씨의 손맛이 그리웠습니다.”

    ‘진현 씨가 훨씬 예의 바르고…… 다정다감하지.’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동거 허락을 받고 빙그레 웃음 짓던 강진현의 모습이 기억을 스쳤다.

    희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조금 민망해져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 밥 안치고 올게요! 잠깐 앉아서 쉬고 계세요!”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가는데,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강진현이 희나의 뒤를 쫓고 있었다.

    다리가 길어서 한 발짝이면 희나의 종종걸음 두 발짝을 쑥쑥 따라잡았다.

    “밥 다 되면 부를게요. 거기서 쉬고 계시라니까요.”

    “주방에 같이 있겠습니다.”

    “사무실 의자가 훨씬 편한데…….”

    “괜찮습니다. 희나 씨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그래야 돌아왔다는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으라고 떠밀 수 없었다.

    희나는 떨떠름한 기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알았어요.”

    “좋습니다.”

    뭐가 좋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진현은 몹시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후다닥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안쳤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음. 살짝 애매하네.’

    냉장고 안에는 달걀 몇 알과 기본 채소, 어제까지 먹다 남은 반찬이 조금씩 있었다. 대식가인 강진현을 만족시키기엔 다소 애매한 양이었다.

    ‘부족하면 라면이라도 끓여 줘야 하나?’

    하지만 그건 희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된 출장을 끝내고 돌아온 식구에게 따뜻한 집밥을 먹여 주진 못할망정, 고작 인스턴트 라면을 대접하다니!

    ‘밥심의 민족’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희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아!’ 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강진현에게 물었다.

    “진현 씨, 돌솥 비빔밥 어때요? 따끈하게.”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희나가 ‘돌솥 비빔밥’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강진현의 목울대가 요동치는 게 보였다.

    꿀꺽, 군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괜찮은 거죠? 급하게 하는 거라 재료가 조금 부실할 수도 있긴 한데…… 최대한 맛있게 해 드릴게요.”

    “희나 씨가 해 주신 건 뭐든 맛있습니다!”

    “칭찬 고마워요, 진현 씨.”

    희나는 방긋 웃으며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달걀, 파, 당근, 애호박, 콩나물, 그리고 그동안 무쳐 둔 시금치 무침.

    ‘약고추장 만들 고기가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뭐……. 단백질은 달걀로 보충할 수밖에.’

    머릿속으로 정리해 둔 순서대로 차근차근 일을 시작했다.

    밥이 되는 30여 분 동안 소소하게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우선 물을 끓여 콩나물을 데칠 준비를 했다. 냄비 물이 끓는 걸 기다리면서는 재료를 재빨리 손질했다.

    당근과 애호박을 씻어 가늘게 채 치고, 기름에 달달 볶아 주었다.

    콩나물은 뚜껑을 연 채로 숨이 죽을 때까지 데쳤다. 그리고 다진 마늘과 파, 소금, 액젓, 참기름 등을 넣어 간을 했다.

    순식간에 콩나물무침이 완성되었다.

    ‘음. 딱 맛있어.’

    희나는 무치던 콩나물을 한 입 집어먹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삭아삭하고, 고소하고, 짭짤하고, 딱 맞았다.

    재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뚝배기를 꺼내려던 찰나였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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