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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12화 (112/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12화

    * * *

    ‘집 냉장고에 다진 마늘이 남아 있던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희나는 손을 멈칫했고, 참기름은 계량스푼에서 흘러넘쳤다.

    순식간에 넘쳐 버린 참기름은 데친 시금치 위로 뚝뚝 떨어졌다.

    ‘아차, 실수.’

    옆에서 희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던 유한이가 벌컥 소리를 지르려 했다.

    “……너!”

    하지만 그보다 희나가 선수를 쳐 말문을 여는 게 더 먼저였다.

    “네가 뭐라고 할지는 알겠는데, 사람 손이 기계도 아니고 실수 좀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미 실수한 걸 나무라는 건 네 연구에 하나도 도움 안 돼. 시간 낭비라고. 그 시간에 다음 할 일을 하는 게 훨씬 생산적일걸. 그리고 이런 실수도 나중에 어딘가 쓰일 만한 데이터가 된다면서? 네가 그랬잖아.”

    마치 입에 기름칠한 것처럼 술술 나오는 변명에 유한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잠시 입을 삐죽이다가 투덜거렸다.

    “그, 아니, 뭐, 알았다고! 누가 뭐라고 한대?”

    “어차피 참기름 투입량에 따른 결과 변화도 알아볼 거였잖아. 미리 결과 좀 알아본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라는 의미였어.”

    “……알았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한다.

    희나는 요 며칠간 유한이와 협업하며 그를 다루는 방법을 완전히 터득한 참이었다.

    그는 안하무인이었지만, 연구에만큼은 진심이었다.

    적당히 연구 이야기를 하며 말을 둘러대거나 ‘너와 같이 연구하지 않겠다’라고 협박하면 앙칼진 고양이 한 마리는 순식간에 한 마리 순한 양이 되었다.

    “야! 시금치 무치는 방법이 아까랑 좀 달라졌는데? 너처럼 항상성 유지 안 되는 사람은 처음 봐.”

    ……물론 유한이가 타고난 성깔을 완전히 버렸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온종일 그와 붙어 있다 보니 희나도 그의 싸가지에 어느 정도 적응해 처음처럼 성이 나진 않았다.

    “아, 그래. 죄송.”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요령만 늘었다.

    ‘악덕 클라이언트에 비하면 양반이지, 양반.’

    생각해 보면 희나가 옛 직장에서 겪었던 진상들을 떠올려 보면 유한이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었다.

    매너 좋은 청룡 길드 직원들에게 어느새 익숙해진 덕일까, 유한이를 만났을 때의 충격이 유독 컸던 것 같다.

    희나는 시금치나물을 조물조물 무치며 그를 흘겨보았다.

    유한이는 희나의 눈초리도 눈치채지 못한 채 실험 노트에 무엇인가를 갈겨쓰고 있었다.

    “됐어! 30번 주물렀으니까 이제 그만! 통깨 작은 스푼 하나 뿌리고!”

    그는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으로 시금치나물 무치기를 감독했다. 이에 희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성가시기는.’

    희나는 누가 자기 요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 며칠 유한이의 참견으로 몇 가지 깨달음을 얻은 바가 있었으므로, 군말 없이 움직였다.

    ‘조리 컨디션에 따라서 확실히 결과물이 달라지긴 해.’

    유한이의 가정대로, 똑같은 온도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조리한 음식은 같은 효과를 보였다.

    그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는 최적의 효능을 내는 조리법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그러면서 희나는 감이 아닌 정확한 비율로 요리하는 법을 익혔다.

    또한 자기에게 나쁜 버릇이 들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어떻게 만들어도 손맛 스킬이 들어가 맛이 있었던 덕에, 초심을 잃고 음식을 대강대강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너무 타성에 젖어 있었긴 했지.’

    희나는 과거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며 반찬 통에 완성한 시금치나물을 옮겨 담았다.

    “한 입 맛볼래?”

    그리고 시금치 한 줄을 집어 유한이에게 불쑥 내밀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모양새였다.

    유한이의 실험 노트에는 조리 과정뿐만 아니라 결과물의 모양, 색깔, 효능, 맛 모두가 기록되었다.

    그 덕에 음식을 완성한 후 그에게 음식을 내밀어 맛보게 하는 건 어느새 당연한 순서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아.”

    유한이가 입을 벌려 시금치 한 줄을 받아먹던 찰나였다.

    “희나 씨, 저 왔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주방을 울렸다.

    그랬다. 며칠 만에 듣는 강진현의 목소리였다.

    “어? 진현 씨?”

    희나는 반가움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드디어 오셨……!”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하려 하는데, 스산한 기운이 등골을 훅 스쳤다.

    희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전에 본 적 없이 서늘했다.

    ‘무슨 일이야?’

    그의 시선은 희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강진현이, 유한이를 바라보고 물었다.

    “……누구지, 너는?”

    유한이는 입안의 시금치를 우물거리다 꿀꺽 삼켰다.

    “……나?”

    그는 S급 헌터가 내뿜는 기세에 질린 듯 창백한 얼굴이 시금치처럼 새파래져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아니, 우선 희나 씨에게서 떨어져.”

    강진현은 순식간에 다가와 희나와 유한이 사이를 갈라섰다.

    “으어어! 억!”

    유한이는 거의 내팽개치듯 밀려났다. 멀대 같은 몸이 나동그라져 넘어지지 않은 게 용했다.

    휘청거리는 유한이의 모습을 보니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진현 씨! 갑자기 무슨 일이예요!”

    희나는 강진현의 한쪽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게 꽤 적극적인 스킨십으로 느껴질 거라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강진현이 당장이라도 큰일을 칠 것 같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사람 다치겠어요.”

    염려하며 얼굴을 올려다보자, 강진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뒤늦게 희나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

    “아, 이건…….”

    그는 당혹스럽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매사 무표정한 그에게서 보기 힘든 동요였다.

    “임무 하면서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이래요?”

    그렇지 않아도 강진현은 남들보다 훨씬 기감이 예민했다.

    며칠 동안 임무에 파견되어 혹사당하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심기가 날카로워진 것일지도 몰랐다.

    희나는 걱정스럽게 강진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볼이 홀쭉해진 것 같기도 해.’

    잘생긴 낯에 날 선 기색이 잔뜩인 걸 보니,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일한 게 틀림없었다.

    ‘그동안 잘 먹이고 잘 재워 뒀던 게 도루묵이 되었잖아!’

    어느새 생각은 여기까지 흐르고 흘렀다.

    멀찍이 물러난 채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유한이는 잊힌 지 오래였다.

    “얼굴이 반쪽이 됐네요. 많이 피곤해 보여요. 잠부터 잘래요? 침상 펴 줄까요? 아니면 밥?”

    안쓰럽다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물어 오자 강진현은 당황한 듯한 표정을 풀고 온순한 낯을 해 보였다.

    그리고 눈썹을 축 내린 채 대답했다.

    “며칠간 제대로 쉬지 못하긴 했습니다만…….”

    “헌터는 법정 휴식 시간 같은 거 없어요?”

    “없습니다.”

    “어쩜 좋아. 그래서 이렇게 얼굴 살이 쪽 빠졌구나. 빨리 쉬어야겠어요.”

    희나의 호들갑에 강진현이 눈을 촉촉하게 떴다.

    “괜찮습니다. 희나 씨 보니…… 나아졌습니다.”

    “어머.”

    강진현은 평소 오해할 만한 언행을 자주 하긴 해서 희나는 이런 불시의 심장 어택에 익숙했다.

    아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눈을 하고 이런 대사를 치면……!’

    잘생긴 미모 공격에 갑자기 광대께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손을 파닥거리며 얼굴에 오른 열을 가라앉히려던 참이었다.

    “선량한 사람을 쳐 놓고 둘이 알콩달콩 뭘 하는 거야? 엉?”

    비비 꼬인 목소리가 까랑까랑하게 주방 안을 울렸다.

    잠시 잊혔던 인물, 유한이였다.

    “……아차.”

    그 아니꼬운 목소리를 듣자 발그레 달아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식었다. 효과 직방이었다.

    “맞다. 너 아직 거기 있었구나.”

    희나는 시큰둥한 기색으로 유한이를 바라보았다.

    “뭐? 나를 까먹고 있었다고?”

    이에 유한이는 격분하여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붉히며 꽥 소리쳤다.

    “빨리 해명해! 그리고 사과해!”

    희나는 사무실에 두 남자를 앉혀 두고 믹스 커피를 석 잔 내왔다.

    “한 잔씩 드세요.”

    “뭐야, 그동안 나 왔을 때는 이런 거 한 번도 안 줬잖아.”

    유한이가 투덜거리기에, 희나는 눈을 휙 째렸다.

    ‘뭐가 예쁘다고 널 손님 대접해 줘?’

    막말을 던지려다가, 얌전히 믹스 커피를 홀짝이는 강진현의 얼굴을 보고 성질을 꾹 눌러 참았다.

    그래, 강진현 앞에서 목소리 올리는 꼴을 보일 순 없었다.

    “……먹기 싫으면 말고.”

    “야! 누가 안 마신대? 머, 먹는다고.”

    유한이는 허겁지겁 희나의 손에서 믹스 커피 잔을 낚아채 호로록 마셨다.

    “오오…….”

    먹자마자 눈이 반짝이는 걸 보니 입맛에 제법 맞는 듯했다.

    하지만 커피를 내준 상대에게 잘 먹었다, 맛있다 한마디 안 해 주는 걸 보니 역시 싹수가 노랗기 그지없었다.

    살림꾼 각성 후 칭찬에 후한 상대들만 만나 왔던 희나로서는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솔직히 아니꼬웠다.

    희나는 입을 삐죽이며 강진현에게 유한이를 소개했다.

    “……여기는 합동 연구 건으로 길드에서 파견한 연금술사 유한이 씨예요. 오빠 시금치가 다 자랐거든요. 그거 관련해서 길드장님이 지원해 주신 인력이에요.”

    “그렇습니까?”

    강진현은 묵직한 눈길로 유한이를 살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유한이는 한기라도 느끼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기죽은 기색은 내보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리고 여기는……”

    “소개 안 해 줘도 누군지 알아. 내가 강진현 헌터 얼굴도 모르는 덜떨어진 놈으로 보여?”

    유한이는 희나의 소개를 퉁명스럽게 끊어 먹었다.

    ‘저 싸가지! 말본새 하고는……!’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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