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11화
유한이가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을 소요했다.
그는 연구의 기본 수칙과 윤리에 대해 읊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물론 희나는 그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기며, 상냥하게도 그런 그에게 손수 냉수를 떠다 주었다.
“찬물 먹고 정신이나 차려.”
애석하게도 전혀 와닿지 않는 투철한 사명을 멈추지 않고 지껄이는 입을 다물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너는 우리 같은 연금술사가 아니지. 스스로의 재능을 정확히 검증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가진 않지만, 맞아. 보통 사람의 지능으로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으니까.”
“보통…… 사람의…… 지능?”
“그래. 나처럼 뛰어난 지능을 가지지 않은 너 같은 사람 말이야.”
콧대 높은 잘난 척에 저도 모르게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요즈음 강진현에게 공격 스킬을 배우는 중이라 그런 걸까, 유한이 곁에 있으면 유독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얄미운 머리통! 한 대 쥐어박고 싶네!’
주먹을 꽉 쥐며 음산한 시선을 보내자, 유한이가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너랑 내가 협력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연구적인 측면에서 스킬을 한 번도 분석을 안 해 봤잖아.”
똑똑하다더니, 희나의 손맛(물리적)을 생생히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유한이는 뒤늦게 변명하며 조리대를 가리켰다.
“아무튼, 분석할 데이터가 없으면 지금부터 쌓아 가면 되겠지. 그러니까 너 요리하는 거 좀 보자.”
“좋아.”
듣던 와중에 반가운 소리였다. 희나가 얼굴을 활짝 폈다.
괜히 가설이니, 뭐니 하는 재미없는 얘기를 운운하는 것보다야 몸을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았다.
‘요리라면 자신 있지. 재미있고.’
자신의 요리 스킬에 입을 떡 벌릴 유한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좀 기대되기도 했다.
“뭐부터 만들어 볼까?”
옆에서 유한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시금치 무침부터 만들어 보는 건 어때? 그게 제일 기본적인 요리처럼 보이는데.”
“시금치 무침? 그래,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하긴, 시금치 하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 가득한 시금치 무침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할 테니까 잘 보고 있으렴.”
희나는 냄비에 물을 담고 끓일 준비를 했다.
그러자 잠깐! 하는 외침이 들렸다.
“왜?”
“냄비 용량이 어떻게 돼? 바닥 사이즈는? 브랜드는? 물은 몇 밀리리터 담을 거지? ……설마 계량 없이 사용하려는 건 아니겠지?”
노트와 볼펜을 손에 쥔 유한이가 따발따발 질문을 해 댔다. 희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시금치 데치는 데 무슨 물 계량을 해? 그냥 적당히 잠길 만큼 넣어 끓이면 되는 거지.”
그러자 유한이의 눈이 충격 받은 듯 왕방울만 해졌다.
“내 인생에 ‘적당히’란 건 없어! 조건 하나만 틀어져도 물질의 특성이 완전히 달라질 수가 있다고!”
“그건 시약 만들 때나 그렇겠지. 이건 넓은 냄비에 넣고 데치나, 좁은 냄비에 넣고 데치나 전부 같은 시금치 무침이 만들어지는걸.”
그렇게 말하며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올리려는 걸, 유한이가 막아섰다.
“요리도 일종의 과학이라고! 과학에 쓰는 방법론을 따라야 해!”
“너 요리는 할 줄 알면서 그런 얘길 하는 거야?”
“아니.”
그럴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밥 하나 제대로 못 차려 먹을 인상으로 보였다.
희나는 흥, 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조금 귀 기울여 들어 줬을 법도 했는데, 상대가 첫인상 최악의 유한이라서 그런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할 줄 모르면 가만히 있어.”
“야, 야! 그래도 합동 연구하기로 했으면 내 말도 좀 들어 봐야 하는 것 아니야?”
유한이는 창백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주방을 맴돌았다.
그러다 그는 조리대 한구석에 밀려 있는 그릇 하나를 발견했다.
“이건 뭐야?”
B등급이 나와서 숨겨 둔 시금치 프리타타였다. 유한이는 그릇을 잡고 음식을 이리저리 살폈다.
“앗, 그건……! 망친 음식이야!”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색깔이랑 모양이 멀쩡하잖아.”
“하지만……! 야, 보지 마!”
희나는 접시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그가 상태 창을 살피고 이상함을 눈치채는 게 먼저였다.
“어라? 이건 왜 B등급이지? 저기 식탁 위에 있던 거는 S등급이었잖아. 스킬 실패 떴나?”
“아니. 스킬 실패 아니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유한이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등급 차이가 커?”
정곡을 찌른 질문에 희나는 마침내 입을 삐죽이며 사실을 실토했다.
“몰라. 이게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모르겠고?”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는 유한이의 모습에 희나는 저도 모르게 변명을 덧붙였다.
“……아무튼 기, 길드장님은 버프 특성만 좋게 뜨면 품질이 균등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했거든!”
버벅거리는 희나의 모습에 유한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야, 너는 이유도 안 궁금해?”
“그건…….”
물론 그 까닭이 궁금해서 이 공동 연구에 참여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긴 싫었다. 상대가 유한이였으므로, 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희나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유한이는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 가며 B급 프리타타가 나온 까닭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딱 봐도 제조 공정 문제야. 아까 네 말 들어 보니까 조리 도구도, 온도도, 재료 정량도 대강 처리하는 것 같던데. 그러니까 만들 때마다 당연히 결과값이 다르게 나오지!”
결국 희나의 요리가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종전에 잔뜩 흥분해서 지껄였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잔소리였다.
“S급과 B급? 이건 차이가 너무 크잖아. 이래서야 실력이 늘긴 하겠어? 상위 스킬로 랭크 업할 생각이 있다면, 사용 출력값 오차부터 줄여야 할걸.”
“출력값 오차를 줄이라니?”
익숙지 못한 용어에 희나는 당황했고, 유한이는 그 모습이 갑갑한지 가슴을 퍽퍽 쳤다.
“스킬을 사용했을 때 결과치가 일정해야 한다고! 그래야 숙련도가 제대로 오르고, 스킬 정교함이 늘지! 너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그가 정말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기에 희나는 울컥해서 바락 소리를 쳤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걸 어떻게 혼자서 알아내?”
‘살림꾼’이라는 특별한 각성 클래스가 되었다지만, 희나는 아직도 민간인에 한없이 가까웠다.
유한이가 말한 것들은 각성자들에겐 필수 상식일지는 몰라도, 희나에겐 아니었다.
그런 걸 알지 못해도 희나의 독특한 능력은 충분히 쓸모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뭘 모르는 것 같으면 알려 주기부터 해야지, 왜 무안을 줘?”
희나는 유한이를 향해 톡 쏘아붙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연구가 수틀리면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랑 청룡 길드야. 사실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순전히 호기심에 지원해 본 연구인데……. 이런 면박 들으면서 일해야 하는 거면 나 안 해.”
잔뜩 생색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효과는 금방이었다.
“아니, 무안을 준 게 아니라…….”
유한이가 쩔쩔매며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리고 그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 팩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좋은 능력을 제대로 개발도 안 하고 썩히고 있는 게 아깝지도 않느냐, 이 말이지!”
역시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달랐다. 이번에는 훨씬 듣기 좋았다.
희나의 짜증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진작에 좋게 말해 줄 것이지.”
“까다로운 사람 같으니라고…….”
“씁, 말조심하라고 했지.”
“……쳇.”
희나는 투덜거리는 유한이를 한 번 노려봐 주고는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섰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 스킬 결과가 들쭉날쭉한 건 정확한 계량 없이 눈대중, 손대중으로 요리해서 그런 거라 이 말이지?”
“아마도. 비교군이 없으니까 확답은 못 해 주겠지만.”
“그럼 확인하려면 같은 요리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 보는 수밖에 없겠네?”
“……흥. 완전히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아니구나.”
“방금 뭐라고 했어?”
“네, 네 말이 맞는다는 소리였거든!”
“어휴.”
하여간, 첫 만남 때도 그랬지만 유한이의 말본새는 얄밉기 그지없었다. 뭐 하나 단번에 좋게 얘기해 주는 법이 없었다.
‘얘는 이대로 돌려보내고 다른 연금술사가 배정될 때까지 기다릴까?’
잠깐 이런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현 씨 없을 때 궁금한 거 해결해야지.’
거기다 유한이는 싸가지가 없는 게 큰 문제일 뿐이지, 능력 면에서는 굉장히 훌륭해 보였다.
인사팀장인 강목현이 장담할 정도의 실력이니 어찌 되었건 희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재일 터였다.
희나는 금방 생각을 정리하고는 손뼉을 짝짝 쳤다.
“자, 그럼 시작할까?”
“뭘 시작해?”
“뭐겠어? 네가 말한 ‘과학적인 방식’으로 하는 요리 말이야. 네가 그렇게 잘났다니까…… 내 문제점을 어떻게 고쳐 줄지 한번 알아보자고.”
“그래!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 주지!”
희나의 도발 아닌 도발에 새초롬했던 유한이가 순식간에 표정을 폈다.
내심 희나가 자기와 같이 연구를 해 주지 않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듯했다.
희나는 싸가지 없지만 단순하기 그지없는 연금술사를 향해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진작에 좀 잘할 것이지.’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