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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04화 (104/228)

던전 안의 살림꾼 104화

“괜찮습니다, 희나 씨. 보기에 잔혹한 장면이었다면 제가 먼저 눈을 가려 드렸을 겁니다.”

단단한 목소리는 신뢰가 갔다.

‘……그런가?’

하긴, 강진현은 희나에게 험한 꼴을 함부로 보여 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발치를 힐끔거렸다. 살벌한 소리가 울린 것치고는 현장은 핏자국 하나 없이 깔끔했다.

대신 뭉개진 진흙 덩어리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보송보송한 솜털은 온데간데없었다.

희나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게 그 토끼예요?”

“그렇습니다. 작고 귀여운 형태로 경계를 낮춘 후, 상대를 불시에 공격하는 하급 몬스터입니다.”

“그러면 진작에 말씀 좀 해 주시지.”

“토끼 떼에 정신이 팔려서 제 말을 듣지 않은 건 희나 씨입니다.”

“…….”

부루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려 보았으나, 곧바로 날아오는 반박에 할 말이 없어져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그랬다.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넋을 놓느라 강진현의 설명을 놓친 건 희나였다.

하지만 희나 딴에는 이유가 있었다.

‘던전이 아니라 천국 같았단 말이야!’

마치 동화 나라 같은 광경이었다.

그 누가 눈앞에 펼쳐지는 토끼풀 언덕과 아기자기한 토끼 무리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겠냔 말이다.

적어도 작고 복슬복슬한 것들을 귀여워하는 희나에겐 그랬다!

‘그런데 대뜸 토끼 한 마리를 잡아 패대기치고는 몬스터니까 때리라고 하면! 내가 얼마나 놀라겠냐고!’

희나는 자기 옆에 선 남자를 슬쩍 째려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토끼풀 언덕 위를 뛰노는 바둑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둑이는 오래간만의 산책이 반가운 듯 신이 나서 풀밭 위를 구르고 있었다.

그오오오오!

……그러다 불쑥 갈라진 토끼 머리통에서 튀어나온 진흙 괴물에게 싸대기를 맞기도 했다.

“헉.”

그 경악스러운 장면에 희나는 깜짝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진짜 겉껍데기만 토끼고, 알맹이는 괴물이었잖아?’

한편, 강진현은 희나가 바둑이를 걱정했다고 생각했는지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등급이 낮아 바둑이에게 별 해를 끼치지 못할 겁니다.”

“그, 그런가요?”

“예. 국내에서 가장 급수가 낮고 안전한 던전 중 하나입니다. 이 정도면 희나 씨의 퀘스트도 충분히 깰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 마저 말을 이었다.

“경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희나 씨가 좋아하실 듯해 이곳을 골랐습니다.”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예. 먼젓번에 갔던 탁 트인 평원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시기에.”

그는 바둑이의 마지막 산책 퀘스트 때 갔던 던전을 보고 희나가 즐거워했던 일을 기억하는 듯했다.

“아, 그것까지 생각해 주셨을 줄은…….”

희나는 새삼스럽다는 듯 강진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강진현과 매일 얼굴을 맞대는 희나는 이제 그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머쓱한가 봐.’

어쩐지 그의 귓불이 평소보다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어쨌든 이곳처럼 희나 씨의 퀘스트를 진행하기에 적절한 곳은 없는 듯합니다. 바둑이는 저대로 내버려 두고 몬스터를 잡아 보도록 하지요.”

힐끔, 바둑이를 보니 토끼 모양을 한 진흙 몬스터에게 맞은 것이 억울한지 역싸대기를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붕붕 돌아가는 잎사귀 사이로 몬스터는 요리조리 쏙쏙 잘만 피하고 있었다.

“퀘스트로 할당된 몬스터 50마리를 채우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겁니다. 희나 씨의 체력과 근력 문제도 있으니까요.”

강진현은 지나가는 토끼를 마치 독수리처럼 낚아챘다.

귀를 붙잡힌 토끼가 발을 버둥거렸다. 그러다 이내 그의 손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본신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뱃가죽이 갈라지면서 진흙 괴물이 튀어나왔……

딱!

……으나, 강진현의 딱콩 한 방에 다시 토끼 모양으로 돌아가 발라당 기절했다.

그는 기절한 토끼를 대수롭지 않게 덜렁덜렁 흔들었다.

“우선 타격감부터 단련한 후에 직접 움직여 공격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나름의 커리큘럼도 짜여 있는 듯했다.

“보이는 데에 현혹되지 마시고,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어느새 강진현은 엄격한 교관이 되어서 조언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희나는 빠릿하게 SSS급 쓸모 있는 신문지를 쥐었다.

최고의 헌터가 전투법을 가르쳐 준다는데, 허투루 들을 수는 없었다.

* * *

“힘들어!”

오늘도 희나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대자로 드러누웠다.

“맨바닥에 눕는 건 몸에 좋지 않습니다, 희나 씨.”

강진현은 그런 희나를 폐지 조각처럼 주워 소파 위에 올려 주었다.

어느새 이렇게 강진현의 손길을 받는 것도 익숙해졌다.

“으아아.”

희나는 젖은 빨래처럼 소파에 널렸다.

강진현의 특훈을 받은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기절한 토끼 몬스터를 후려치는 것부터 시작했던 훈련도 어느새 제법 강도가 높아졌다.

이제는 무려 움직이는 물체를 효율적인 방향에서 때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새 퀘스트인 몬스터 잡기는 조금 뒷전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물론 훈련 막바지쯤에는 몬스터 몇 마리쯤 잡아 와 막타를 칠 수 있게 해 주니 희나의 퀘스트를 완전히 잊은 것만은 아니었다.

<될 수 있다! 던전 주먹왕!(B): 스스로의 힘으로 몬스터를 때려잡는 기쁨을 느껴 봅시다. 고렙 버스를 타도 좋습니다. 실전 경험의 짜릿함과 더불어 랭크 업까지!

▶ 필수 퀘스트: ‘해충 박멸’ 스킬을 사용해 몬스터 50회 퇴치 (31/50)>

어미 새가 물어다 준 먹이를 먹는 새끼 새처럼 몬스터를 한 마리, 두 마리 때리다 보니 어느새 50회 중 31회를 채웠다.

아마 이대로 수업을 진행한다면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는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진현 씨의 전투 수업을 끝낼 수는 있을까? 진현 씨 마음에 차려면 평생 수업해도 부족한 거 아니야?’

희나는 자기의 몸놀림을 지켜보던 강진현의 눈초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전속력을 다해 질주하는 오색이 보는 듯한 눈빛!’

그 정도로 희나의 피지컬이 처참해 보인다는 뜻일 테다.

‘S급 헌터와 비교하면 C급 살림꾼 공격력 따위는 달팽이 안테나짓보다 못해 보이는 건 당연하지.’

희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강진현의 높은 기준을 탓했다.

그래도 영 못난 결과만 나온 건 아니었다. 희나와 강진현은 ‘해충 박멸’ 스킬의 몇 가지 숨은 특성에 대해 알아냈다.

‘가내 평화랑 관련한 스킬이라서 그런가, 은근 이타적이란 말이야.’

해충 박멸 스킬은 희나 그 자신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사용할 때 더 높은 공격력을 보였다.

그러니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강력한 위력을 가진다는 의미였다.

희나는 예전, 오빠가 강제 노역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래서 오빠를 해치려는 사람을 한 방에 기절시킬 수 있었구나.’

어떻게 부족한 D급 살림꾼의 스탯으로 전문 헌터를 나가떨어지게 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당시에는 강진현이 준 좋은 단검 덕분이라고 생각했는데, 희나의 ‘해충 박멸’ 스킬도 톡톡히 한몫 했던 모양이다.

‘근데 이런 건 가족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만 낼 수 있는 괴력인 거잖아. 호신용으로는 영 쓸모가 없네.’

속으로 자기 스킬에 대해 투덜거리는 사이, 어느새 강진현이 쟁반 위에 고봉밥과 밑반찬을 차려 희나의 앞으로 대령했다.

“여기, 밥 드십시오.”

‘밥심’ 스킬로 빠져나간 희나의 체력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밥심(D): 체력은 곧 밥심에서 나온다. 고갈된 체력을 쌀이 섞인 음식으로 회복한다. 패시브 스킬.>

“물수건으로 손부터 씻으시고요.”

꼼꼼하게 청결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현 씨, 고마워요.”

희나는 손을 물수건으로 닦으며 강진현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커피잔 하나 제대로 못 나르고 이불 하나 못 털던 사람이었는데.’

그랬던 강진현이 이제는 쟁반 위에 상까지 차려 주고, 손 닦을 물수건까지 준비해 준다니.

잘 못 자고, 잘 못 먹어서 일상생활에서 허당처럼 굴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희나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은 강진현은 이제 한 사람 몫은 거뜬히 해냈다.

“잘 먹을게요.”

흰 쌀밥을 한 숟갈 크게 퍼서 입안에 넣었다. 밥을 한 숟갈 먹을 때마다 축 늘어졌던 몸에 생기가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어휴. 밥 먹으니까 살겠어요.”

희나가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며 개운하게 기지개를 켤 때였다.

삐삐, 삐삐삐!

강진현의 허리춤에서 알람이 급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깜짝이야!”

갑자기 울린 알람에 희나는 깜짝 놀라 귀를 틀어막았다.

“괜찮습니다.”

강진현은 그런 희나를 안심시키며 호출기 버튼을 눌러 조작했다. 이내 시끄럽던 집 안이 조용해졌다.

“긴급 호출입니다.”

“긴급 호출이요?”

“예. 긴급 사태가 벌어지면 근방의 헌터들에게 알림이 옵니다.”

그는 짧게 설명을 마친 후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평소 길드를 오갈 때 입던 전투복 차림이 되는 데는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만 나가 봐야겠습니다.”

희나는 성큼성큼 현관으로 나서는 강진현의 뒤로 쪼르르 따라붙었다.

“위, 위험한 일이에요? 언제쯤 돌아오시는데요?”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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