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103화
희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현 씨, 지난번에 설명해 드렸지만, 이 스킬은 제가 시전하고 싶다고 시전되는 스킬이 아니에요. 순 시스템 맘대로 발동한다고요.”
이건 다른 전투계 각성자들처럼 자유자재로 시전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오직 ‘가내 평화’라는 상황에 대해서만 발동했다. 심지어 그게 급박한 상황이건, 슬픈 상황이건, 기쁜 상황이건 상관이 없었다.
해석할 여지도 너무 다양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랄까?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발동하는 스킬을 어떻게 써야 하는데요?”
희나는 강진현을 흘겨보았다. 처음으로 강진현이 굉장히 못 미더워 보였다.
‘낮은 등급 비전투계 각성자들이 S급 헌터랑 같은 줄 아나? 흥!’
교과서를 중심으로 예습 복습을 열심히 하면 전국 1등 정도야 가뿐히 할 수 있을 거라는 조언을 들은 기분이었다.
도움이 하나도 안 됐다.
“희나 씨, 저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 그만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법 눈길이 따가웠던 모양이다. 강진현이 시무룩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린 건 스킬이 시전되는 특정 조건을 희나 씨가 컨트롤 가능하게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소리입니다.”
“그걸 어떻게 해요?”
희나의 질문에 강진현이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시스템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스킬의 사용 범위는 스킬 설명의 이해도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협지에서 무림 고수들이 무공 비급 한 구절을 깊고 넓게 이해하여 크나큰 깨우침을 얻듯이, 각성자들도 자신의 스킬을 재해석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희나 씨의 조건도 그렇습니다. ‘이 순간, 가내 평화가 깨질 수 있다’라고 희나 씨의 본능이 판단하는 순간, 시스템이 스킬을 발동하는 것 아닙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스킬은 희나의 감정이 다소 격해졌을 때 시전되었다.
“음……. 네. 맞아요.”
“반대로 희나 씨가 스킬을 시전하고 싶은 순간, ‘가내 평화가 깨어질 수 있다’라고 본능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면요?”
“제가 스킬을 시전하고 싶은 순간을 만든다고요?”
희나는 입을 헤벌렸다.
강진현의 말이 이해되는 동시에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건 본능의 문제였다. 그걸 어떻게 제어한단 말인가?
의문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진현은 어리둥절한 상태의 희나를 이끌어 근처 나뭇등걸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희나 씨의 경우에는 어렵지 않습니다.”
“뭐가 어렵지 않은데요? 가내 평화를 해치는 방법? 오빠랑 싸우면 되나? 아니면 오빠를 위험에 빠뜨려 놓고 제가 구해 준다거나?”
희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주워섬겼다.
놀랍게도 강진현은 그 헛소리에 맞장구쳐 주었다.
“비슷합니다.”
“비슷하다고요?”
앵무새처럼 자기 말을 따라 되묻는 모습이 제법 우습게 보였는지, 강진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것 아십니까? 희나 씨가 위험해져도 가내 평화가 깨어질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
아주 상식적인 대꾸에 희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희나 씨가 없으면 희원 형님은 몹시 슬퍼하고 걱정할 것이고, 저 또한 그럴 겁니다. 바둑이와 오색이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 맞아요.”
지난번 납치 사건 같은 경우에도 그랬다.
희원과 오색이, 바둑이 모두 깜짝 놀랐고, 크게 분노했다. 가족이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반응이었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있는데, 강진현이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보십시오. 희나 씨의 안전은 가내 평화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희나 씨가 위험해지는 순간, ‘가내 평화’는 순식간에 깨어지는 겁니다.”
“오…….”
듣고 보니 엄청나게 논리적인 설명이었다. 희나는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제 안전이 곧 가내 평화와 직결되니까, 저를 위협하는 상대를 퇴치하는 일이 즉, 가내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를 퇴치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네요?”
어찌 보면 조금 개소리 같기는 했지만, 억지를 부려 맞추어 보면 또 그럴싸하게 말이 됐다.
‘‘해충 박멸’ 스킬의 내용을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이 기묘한 논리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시스템 창이 눈앞에서 띠롱띠롱 빛났다.
“될 수 있다, 던전 주먹왕……?”
<될 수 있다! 던전 주먹왕!(B): 스스로의 힘으로 몬스터를 때려잡는 기쁨을 느껴 봅시다. 고렙 버스를 타도 좋습니다. 실전 경험의 짜릿함과 더불어 랭크 업까지!
▶ 필수 퀘스트: ‘해충 박멸’ 스킬을 사용해 몬스터 50회 퇴치 (0/50)
※ ‘해충 박멸’ 스킬을 사용해 막타를 쳤을 경우에만 카운트됩니다.
※ 시간제한: 99일 23시간 59분 49초
※ 퀘스트 불이행시 불이익: 체력, 근력, 민첩 스테이터스 랜덤 하락.
※ 퀘스트 보상: ‘해충 박멸(C)’ 스킬 랭크 업, ???>
희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퀘스트입니까?”
강진현이 눈치 좋게 물어 왔다.
“네. ‘해충 박멸’ 스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뜨더니, 연관 퀘스트가 떴어요.”
“무슨 내용입니까?”
“‘해충 박멸’ 스킬을 이용해 직접 몬스터를 잡아 보래요.”
희나는 다시 한번 찬찬히 퀘스트 내용을 읽었다. 처음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고렙 버스를 타도 좋다……. ‘해충 박멸’로 막타만 치면 된다…….’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섞여 있었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랭크가 높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 마지막 한 대만 때리면 된다는 뜻인 듯했다.
‘B급 퀘스트라서 그런지 퀘스트 내용이 은근히 구체적이네.’
그동안 난이도 미정 퀘스트만 받았던 희나에게는 제법 꿀 같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고렙 버스 타고 막타만 쳐도 된다는데……. 이건 진현 씨를 의식한 문구일까요?”
희나가 퀘스트 내용을 종알거리며 설명하자, 찌푸렸던 강진현의 미간이 스르르 풀렸다.
“……그 정도면 감수할 만하군요. 제가 곁에서 몬스터를 잡아 드릴 테니, 마지막 숨통만 끊으십시오.”
“네에. 그러면 될 것 같아요.”
희나는 강진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바둑이 산책도 안전하게 할 수 있었고, 깨달음을 얻어 유일한 공격 스킬을 랭크 업 할 기회도 얻었다.
“진현 씨가 아니었으면 일이 정말 복잡해졌을 거예요.”
새삼스레 고마움을 표하자, 강진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희나 씨가 제게 해 주시는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제 능력이 닿는 한 어떻게든 도울 테니.”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이 희나의 앞에 놓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희나 씨도 오늘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까요.”
그는 마치 에스코트를 청하는 기사처럼 굴었다. 때때로 그가 보이는 정중함은 괜히 희나를 설레게 하는 데가 있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이제 저도 희나 씨의 식구……입니다. 그러니 스스럼없이 대해 주십시오.”
“네에.”
희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강진현의 손은 거칠고 뜨거웠지만, 그 손길은 유리를 만지듯 몹시 조심스러웠다. 심장이 작게 뛰었다.
그가 꺼낸 말 중 한 단어가 유독 입안에 뱅뱅 돌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식구’란 표현은 한층 특별하게 느껴졌다.
‘새 식구, 새 가족.’
예전엔 멀게만 느껴졌던 강진현이라는 사람과 한 층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 * *
희나는 울상을 지었다.
“……꼭 해야 하는 거예요?”
무심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럼 어떤 걸 바라시는 겁니까? 희나 씨가 A급이나 S급 몬스터를 상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강진현은 자신의 발아래에 놓인 흰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보송보송한 털이 소름 끼치도록 귀여웠다.
“빨리 치십시오. 기절한 거 깹니다.”
그의 말대로 토끼는 곧 깨어나려는지 귀를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으아아…….”
희나는 울상을 한 채 토끼를 바라보다가 눈을 꼭 감고 돌돌 만 신문지 뭉치를 내리쳤다.
눈을 감은 희나는 보지 못했지만, 상태창이 순간 반짝이며 스킬 시전을 알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신문지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아주 섬찟했다.
당연했다. 귀여운 토끼를 때려죽이는 순간이었으니까…….
‘세상에.’
차마 눈앞의 처참한 현장을 바라볼 자신이 나지 않아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웃음기를 감추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눈 뜨십시오.”
“토끼 시체는 보기 싫어요.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요.”
“토끼가 아닙니다. 토끼 형태를 한 몬스터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으으…….”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