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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01화 (101/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01화

    탁탁탁탁.

    깨끗하게 손질한 야채는 작은 큐브 모양으로 썰었다.

    치이이익!

    적당히 달군 냄비에 돼지고기와 자른 야채를 넣고 볶았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함께 재료가 익어 갔다.

    야채가 어느 정도 익었다 싶을 즈음에는 물을 넣고 카레 가루를 개었다. 이제 적당히 끓여 주기만 하면 끝이 났다.

    참고로 카레와 곁들여 먹을 흰밥은 식당에 요청해 두었다.

    커다란 냄비 뚜껑을 닫고는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았다. 대용량 요리를 해냈기 때문일까, 유독 뿌듯함이 크게 느껴졌다.

    희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홀로 중얼거렸다.

    “카레는 만들기가 간단해서 좋아.”

    거기다 노력 대비 맛도 좋았다. ‘맛있어!’를 연발하며 카레를 퍼먹을 헌터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배가 불렀다.

    * * *

    밀린 보고서를 쓰느라 바쁜 강진현에게 따끈한 카레 한 그릇을 배달한 후, 남은 카레 한 통을 들고 8층 헌터 휴게실로 향했다.

    카레가 담긴 냄비는 희나의 몸통만큼이나 커다랬다. 하지만 C랭크가 된 희나의 체력과 근력은 상당해서, 이 정도는 ‘끙!’ 하고 힘 한 번 주면 들 수 있게 되었다.

    “왔다!”

    “드디어!”

    “카레!”

    8층에 도착하자마자 카레 냄새를 맡은 헌터들이 휴게실 밖으로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희나 씨! 내가 들어 줄게요! 이리 줘요!”

    “아냐, 내가 들어 줄 거야!”

    “뭐? 이 자식이? 비켜!”

    그리고 희나가 끓인 카레 냄비를 서로 받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희나는 그런 그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쉿. 조용히. 제가 직접 들고 갈 테니까, 휴게실에서 줄 서고 있어요.”

    무거운 걸 들어 주겠다는 제안은 고마웠지만 영 못 미더웠다.

    그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다른 헌터에게 이대로 카레 냄비를 내주었다가는 홀라당 냄비째로 들고 튈 위험이 있었다.

    ‘은근 제멋대로인 사람들이니까 말이야.’

    희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헌터 휴게실은 이미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헌터 서른 명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헌터들은 전투 외의 일에는 개인주의가 만연했다. 물론 시간을 때우고 정보를 나누러 휴게실을 찾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헌터가 전투가 아닌 목표로 한자리에 모인 건 어찌 보면 청룡 길드 최초일지도 몰랐다.

    “드디어 먹는다!”

    “저게 그렇게 맛있어?”

    “어. 분명히 맛있을 거야. 맛이 없을 리가 없어.”

    모인 헌터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한편, 이미 흰밥과 밥그릇, 수저는 휴게실 한구석에 준비되어 있었다.

    “자. 각자 그릇에 밥 퍼서 오면 카레 떠다 줄게요. 사고 치면 카레 안 줄 테니까 얌전하게 있어야 해요!”

    희나는 커다란 국자로 냄비를 깡깡 치며 줄을 세웠다.

    헌터들은 비교적 온순하게 희나의 말을 따랐다.

    여기서 ‘비교적 온순하게’라는 의미는 고성만 오가지 않았다 뿐이지, 약간의 몸싸움은 동반했다는 뜻이었다. 헌터들은 서로 먼저 앞자리에 서려고 교묘히 힘 싸움을 했다.

    ‘먹는 것 앞에서는 애들이 따로 없다니까.’

    희나는 이를 악물고 서로의 어깨를 밀어 대는 헌터들을 보면서 혀를 쯧쯧 찼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중 하나인 청룡에 소속된 헌터들이 이렇게 철이 없다니…….

    실제로 보고 느끼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먹을 것의 힘은 대단했다.

    놀랍게도 헌터들은 큰 사고 없이 카레를 받아 갔다. 양을 넉넉히 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배식을 완료한 동시에 카레가 똑 떨어졌다.

    “잘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헌터들은 제각각 희나에게 잘 먹겠다며 인사를 했다.

    “맛있게 드세요.”

    희나는 헌터들과 하나하나 눈 맞춤을 했다. 헌터들의 두 눈이 설렘으로 별처럼 반짝거렸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눈빛이었다.

    헌터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둘러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카레 배식으로 시끌벅적했던 휴게실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다들 입안에 넣은 카레를 우물거리며 음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적절한 크기로 썰어 입안에서 뭉그러지는 채소와 쫀득쫀득하고 고소한 돼지고기의 합이 엄청났다. 카레는 살짝 매콤해서 먹을수록 입맛을 돋웠다.

    헌터들은 카레를 씹으며 같은 생각을 했다.

    ‘기가 막히게 맛있다!’

    이 절묘한 조화, 이 절묘한 감칠맛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으랴!

    김밥이나 땅콩 따위도 맛있었다. 하지만 갓 만들어 따끈따끈한 카레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따끈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모두의 눈앞에 동일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휴게실 안에 따스한 분위기가 피어났다. 아늑함에 절로 마음이 녹아들었다.

    누군가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중얼거렸다.

    “행복해…….”

    희나 또한 바뀐 분위기를 느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부드러워졌으며, 통창에 부서진 햇살은 아름답게 반짝였다.

    무엇보다, 카레를 먹는 모두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내 음식을 먹고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구나.’

    음식을 한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기쁜 광경이 존재할까?

    희나는 지금의 이 순간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7. 자기 계발과 살림꾼

    “이야아압!”

    희나는 커다란 기합 소리와 함께 강진현이 있는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는 때릴 수 있어!’

    이를 악물며 손에 쥔 창을 휘둘렀다.

    어찌나 열중했던지 창끝에 날카로운 날붙이가 붙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였다.

    하지만 강진현은 자신을 향한 공격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도리어 고개를 작게 저었을 뿐이었다.

    “으아앗! 꺅!”

    이내 희나는 민망한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들고 있던 장창의 무게 중심을 놓치며 발끝을 헛디뎠다.

    “악!”

    순식간에 땅바닥이 가까워졌다.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를 것을 각오하며 눈을 꼭 감았다.

    ‘또 자빠지겠구나!’

    반쯤 포기하고 몸에 힘을 푼 순간, 단단한 손이 희나의 허리를 낚아챘다.

    강진현이었다.

    “위험합니다.”

    그는 앞으로 넘어지는 희나를 붙잡아 세우며 잔소리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투 중에는 절대 눈을 감아선 안 됩니다.”

    “저도 알고는 있는데 저도 모르게 계속 눈을 감게 돼요…….”

    희나는 눈썹을 축 내리며 웅얼거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실패네.’

    납치 사건 이후로, 희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나와 가족을 지킬 만한 충분한 힘을 키우기로.

    그 ‘힘’의 정의에는 권력이나 인맥 따위의 것도 있었지만, 물리적인 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최소한 몸을 지킬 만한 수단은 필요했다.

    ‘납치당했을 때 너무 무력했어.’

    아무리 희나가 비전투계 각성자라 해도, 상대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홀라당 납치당해 버린 일은 제법 충격이 컸다.

    강진현 또한 희나의 의견에 극구 동의했다.

    그는 몸을 지키는 데는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 또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온갖 방어구와 무구를 희나의 앞에 가져다 바치기 시작했다.

    ‘그치만 이건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야.’

    희나는 손에 쥔 A급 전뇌의 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짬 날 때마다 강진현과 함께 수많은 무구를 테스트했다. 검, 도, 채찍, 창, 화살, 총 등등…….

    하지만 그 무엇도 희나의 적성에 맞는 무기는 없었다.

    매번 머릿속으로는 한 마리 우람한 코뿔소처럼 돌진했는데, 실제로는 성난 치와와만도 못했다.

    아니, 차라리 치와와가 기세 면에서는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내 손에 어울리는 건 식칼과 빗자루뿐인가?’

    희나는 시무룩하게 강진현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희나를 안고 있던 팔이 빳빳하게 풀렸다.

    “하, 하지만 희나 씨는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비전투계 능력자가 이 정도 가능성을 보이는 것도…….”

    강진현은 냉정하게 희나의 실력을 평가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없는 칭찬을 간신히 짜내어 말했다.

    ‘이게 바로 당근과 채찍 전법인가?’

    희나는 눈알을 굴리며 A급 전뇌의 창을 강진현에게 반납했다.

    “이것도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요. 무겁기도 하고 너무 길어서 주체를 못 하겠어요…….”

    “그건……, 예……. 그렇군요. 이런 걸 휘두르다가는 도리어 희나 씨가 다칠 것 같습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뇌의 창을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그의 걱정 어린 표정에 희나의 목이 자라처럼 쪼그라들었다.

    ‘망친 시험지를 앞에 두고 부모님한테 혼나는 것 같아.’

    강진현은 최고의 실력자들만 모인다는 청룡 길드의 헌터들과 합을 맞추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무엇 하나 평균에 미치는 게 없는 희나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할지는…….

    ‘에휴.’

    그저 한숨밖에 안 나왔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자기 손에 잘 맞는 무기를 찾기란 몹시 힘듭니다. 벌써 실망하긴 이릅니다. 정말입니다.”

    강진현이 기죽은 희나를 격려했다.

    하지만 무기 없이 맨손으로 몬스터 보스를 물리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별로 와닿지는 않았다.

    “차라리 호신술 학원을 다녀 볼까요? 계속 이렇게 실패만 하니 진현 씨 시간만 빼앗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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