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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00화 (100/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00화

    “음……. 그게, 이번에 납치당한 후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제 삶은 원래 평범하지 않았다는 생각이요. 그러니까……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 왔다는 생각?”

    그랬다. 원래 희나의 삶도 완전히 평범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상적으로 행복하고 평범한 삶’을 누리고 있지 못했기에 그토록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살아온 셈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자세히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동안 저는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 왔어요. 예전에는 돈을 벌어서 남들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고요.”

    희나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던 예전의 생활을 떠올렸다. 살림은 빠듯했고, 내 집 마련은 멀고 멀었다.

    “……물론 이젠 상황이 바뀌었어요. 사정은 훨씬 넉넉해졌고, 저는 특별한 능력을 각성했어요. 제가 원하는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희나는 능력을 숨겼고, 강진현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번에 느낀 건 아무리 청룡 길드에서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제 능력은 탄로 날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번에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소문이 새어 나갔고, 그 때문에 희나가 위험에 처했다.

    희나는 원덕삼에게서 풀려난 후 오랫동안 생각했다.

    ‘앞으로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지?’

    결론은 한 가지였다.

    “오빠와 제게 필요한 건 힘과 권력이에요. 더는 피하고 숨기만 할 수 없어요.”

    힘이 필요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위기를 극복할 만한 충분한 힘이!

    “우리를 지킬 아이템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아요. 납치당했을 때 제가 정말 무력하다고 느꼈거든요. 그리고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도 최대한 많이 만들고 싶어요. 이번처럼 진현 씨나 민아 언니만 기다리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지는 않아요.”

    평범하게 살기 위해 예전에는 개미처럼 일했다면, 이제는 힘을 키워야 했다.

    희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서 쩔쩔매는 건 싫어요. 먼저 정보를 얻고, 힘을 얻어서 여유롭게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야 제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요.”

    짝짝짝!

    곁에서 말을 듣던 희원이 희나의 결심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누구 동생인지는 몰라도 그것 참 똑 부러지는구먼!”

    그 또한 희나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특별한 사람들과 얽히게 되면 그만큼 복잡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이미 희나와 희원은 그런 세상에 발을 들여 버렸다.

    남매는 그들과 얽혀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언제까지 파도가 출렁이는 대로 이끌려 갈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까? 희나 씨는 가족을 지킬 힘을 원하고 있는 거군요.”

    강진현은 희나의 의중을 금방 이해했다. 그리고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말입니다. 제가 희나 씨의 유일한 방패이자 칼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제 욕심일 뿐이겠지요.”

    “진현 씨가 늘 곁에 있어 줄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건…….”

    마침내 그는 한숨과 함께 희나를 바라보았다.

    “희나 씨가 스스로를 지킬 힘을 얻고자 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희나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이렇게 한번 털어놓고 나니 생각이 많이 정리되네요. 진현 씨가 물어봐 주어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또 밤새 ‘내가 섣부른 선택을 했나?’ 하고 고민했을지도 몰라요.”

    “아닙니다.”

    강진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희원은 희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 동생, 머리털 빠지게 고민했겠네. 고생했다.”

    「용감무쌍 집주인!」

    오색이도 고물고물 기어 와 큰 결심을 한 희나를 지지해 주었다.

    ‘평범한 일상을 지키려면, 나 자신을 그리고 내 가족을 지키려면 힘이 필요해.’

    희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더는 이 평화를 방해받지 않으리라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진현 씨.”

    “예, 희나 씨.”

    희나는 강진현의 손등 위를 덮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희나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크고 단단해 보였다. 강인하고 듬직한 손이었다.

    “말씀하십시오.”

    그의 시선은 한없이 기대고 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희나는 그의 호의에 힘을 얻어,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때의 제안이 아직 유효하다면…… 우리 집에 더 머물러 주실래요? 저, 적어도 우리가 충분히 힘을 키울 때까지 만이라도요.”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강진현이 먼저 요청했던 걸 허락하는 것뿐인데, 왜 이리 부끄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 제안에 강진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됩니다. 희나 씨가 허락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는 그 커다란 생일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음 지었다. 희나는 처음 보는, 진현의 함박웃음이었다.

    희나는 그런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안도와 함께 묘한 설렘이 차올랐다.

    “그럼 진현 씨.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 * *

    며칠간의 휴가를 마치고 청룡 길드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시선이 확 쏠렸다.

    로비에서 어기적거리던 헌터들이 자석에 붙는 철가루처럼 희나에게 착 달라붙었다.

    “오래간만이야! 희나 씨 출근하는 거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기환이 놈은 어제까지 희나 씨 기다리다가 울면서 던전 공략 갔어.”

    그들은 제각각 희나를 반기고, 누군가의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들어 달라는 듯 큰 목소리로 쑥덕거리기도 했다.

    “오늘이나 내일쯤에는 희나 씨 음식 먹을 수 있을까?”

    “강 헌터 돌아왔는데, 바빠서 음식 안 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에이 씨. 강진현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빨리 던전 로테이션 시키라고 해!”

    강진현이 없었으면 좋겠다니, 속내가 아주 노골적이다 못해 투명했다.

    그랬다. 모두 희나가 약속했던 음식을 먹고 싶어서 애가 잔뜩 달아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맛있는 걸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갑자기 홀랑 휴가를 써 버렸으니까 말이다. 다들 닭 쫓던 개 꼴이 된 셈이었다.

    희나는 주변에 잔뜩 몰려든 헌터들을 헤쳐 나가며 오늘 일정을 브리핑했다.

    “죄송해요. 지난주에 음식 해 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휴가를 길게 썼어요.”

    “목 빠지게 기다렸어!”

    “대신 오늘 점심으로 카레 하려고요. 시간은 한…… 2시쯤 헌터 휴게실로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야호! 땡잡았다!”

    “카레! 카레! 카레!”

    희나의 메뉴를 들은 헌터 일동이 일제히 ‘카레’를 외치기 시작했다. 넓은 로비가 헌터들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다행스럽게도 헌터들의 유난스러운 행동은 하루 이틀이 아닌 듯,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희나는 환호하는 헌터들 사이를 간신히 뚫고 지나갔다. 덕분에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반쯤 넋이 빠진 것 같았다.

    “어휴. 호들갑 하고는.”

    한숨과 함께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고 재빨리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장착했다. 착장 버프 메시지가 눈앞에 뿅 떴다가 사라졌다.

    “큰 솥을 요청해 두긴 했는데……. 제대로 도착했으려나?”

    부엌 겸 식당으로 통하는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커다란 솥과 식당용 대형 가스레인지가 보였다. 생각보다 본격적이었다.

    ‘다인분 조리가 가능한 시설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해 두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준비해 줄 줄이야.’

    희나는 새 장비들을 만지작거렸다. 튼튼하고 견고해 보였다.

    잠시 새 기구들을 살피던 희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손뼉을 짝짝 쳤다. 벌써 오전 10시가 다 되어 갔다.

    “자, 이제 카레 만들어야지!”

    재료는 부엌 한구석에 박스째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것도 회사에 요청해 받아 낸 재료였다.

    희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재료의 상태를 살폈다.

    ‘원래는 내가 직접 장 봐서 하려고 했는데…….’

    식자재 쇼핑을 즐기는 희나는 직접 장을 봐 음식을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장을 보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덕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장 보다가 원덕삼 씨에게 납치를 당했지.’

    희나는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일을 회상했다.

    ‘그사이 별일이 다 있었네.’

    고작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 많은 일이 벌어졌다.

    납치, 탈출, 협박, 거래 등등…….

    ‘어쨌든 잘 해결해서 다행이야.’

    원덕삼은 어젯밤, 희나네 집에서 풀려났다. 강진현이 오면서 일이 완전히 깔끔히 정리된 덕이었다.

    그는 희나의 ‘홈 스위트 홈’을 뜨기 전, 화장실에 들러 A급 비데의 성능을 마지막까지 마음껏 누렸다.

    원덕삼은 바둑이에게 맞은 얼굴이 아직 얼룩덜룩했지만 개운한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목숨 살려 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람답게 대해 주어서도요.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두 분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면서 가끔 희나를 찾아와 화장실 신세를 질 수 있겠냐며 알랑거렸다.

    ‘좋아요. 연락 주시고 찾아오세요. 지난번처럼 갑자기 나타나지 말고요.’

    희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원덕삼의 첫인상은 끔찍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와 계속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그 상대가 능력 있는 정보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자.”

    희나는 ‘전화위복’, ‘새옹지마’ 등의 사자성어를 중얼거리며 감자와 당근, 양파를 손질했다.

    착장 버프를 받은 덕에 속도는 무척 빨랐다.

    손맛 스킬 또한 자연스럽게 발휘되었다. 희나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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