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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99화 (99/228)
  • 던전 안의 살림꾼 99화

    “저랑 오빠도 그런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최악의 경우를 상정했을 때의 선택지였다.

    원덕삼은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희나와 희원의 정보가 새는 걸 막아 줄 능력이 있었다.

    “진현 씨가 보기에 좀 바보 같은 선택일지는 몰라도, 저는 저 사람 살려 두고 싶어요. 그편이 훨씬 마음도 편안할 것 같고…… 무엇보다 저 아저씨 능력이 제법 요긴하거든요.”

    희나는 원덕삼, 그러니까 정보상 ‘미스터 원’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원덕삼은 헌터들 사이에서 도는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희나와 희원 남매를 위해 추가적인 작업을 해 주었다.

    땅콩뿐만 아니라 희나와 희원과 관련한 위험한 소식이 돌면 즉시 그에게 연락이 닿을 수 있게 말이다.

    물론 이건 단순한 호의는 아니었다.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아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계산속이 섞여 있기도 했다.

    그 속셈은 꽤 잘 먹혀들었다. 희나 또한 이런 상황에서 만약 그가 죽어 사라진다면 곤란했다.

    희나도 원덕삼의 계산속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한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이로운 방향인 거잖아.’

    희원도 희나의 생각에 동의했다.

    “굳이 애먼 사람 잡을 필요는 없지 않아?”

    “물론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야 따를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여태까지 원덕삼 씨를 풀어 주지 않고 진현 씨 올 때까지 기다린 거니까요.”

    “그건…….”

    남매의 설득에 강진현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

    침묵은 한동안 지속됐다. 강진현은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그의 입이 열린 건 약 1분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사이 원덕삼의 얼굴은 초조함에 붉으락푸르락, 거의 무지갯빛으로 변했다.

    “……희나 씨, 희원 형님,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어떻게요?”

    “두 분의 말이 맞습니다. 괜한 피를 볼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이용 가치가 충분한 자입니다. 살려 두도록 하겠습니다.”

    “……!”

    바둑이에게 잡혀 있던 원덕삼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기쁨과 안도의 손짓이었다.

    남매도 그의 선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잘 생각했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진현아.”

    하지만 강진현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물론 지금 이대로는 안 됩니다. 좀 더 강력한 계약으로 묶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딱 잘라 말하며 인벤토리에서 마석을 꺼내 들었다. 메추리알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다.

    불순물 없는 투명도를 보아하니 상당히 높은 등급의 마석인 듯 보였다.

    “아니, 이건……!”

    원덕삼은 마석의 가치를 알아보고 입을 쩍 벌렸다.

    “국가나 초대형 길드 간의 계약도 아닌데, 이런 등급의 마석을 개인을 위해 사용하는 건 좀 낭비 아닙……! 헙!”

    그는 강진현의 살기 어린 시선을 받고서야 나불거리던 입을 꾹 닫았다.

    “그러게요. 이건 좀 과한 거 아니에요?”

    원덕삼의 말에 희나는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진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이 정도는 평범한 수준입니다. 무엇보다 약속은 확실히 하는 편이 나으니까요.”

    “……그런가요?”

    “예.”

    대답이 너무나 평온했기에 희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하고 상황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S급 헌터인 강진현이 그렇다는데, 누가 거기에 대고 의문을 품을까?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의견에 납득하는 사이 강진현은 몇 가지 조건을 나열했다.

    희나와 희원의 정보를 남에게 유출하지 말 것,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안정을 보장할 것, 앞으로 남매에게 접근하지 말 것, 등등…….

    몇 가지 사항을 꼼꼼하게 추가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희나가 제안했던 내용과 별다를 바 없었다.

    ‘마석 값이랑은 별개로, 겹치는 계약을 또 하는 건 조금 아깝긴 한데.’

    희나는 굳이 비슷한 내용의 계약을 또 하나 더 맺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서 진현 씨 마음이 편해진다면야.’

    강진현은 희나의 안전에 관한 부분에서는 몹시 강경했다.

    마석이 아깝다는 이유만으로 이 계약을 만류한다면 그는 차라리 원덕삼을 제거해 버리는 편을 택할지도 몰랐다.

    “이대로 맹세하십시오.”

    강진현이 원덕삼의 앞에 마석을 툭 내려놓았다.

    원덕삼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강진현이 내뿜는 살기와 위압감에 절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하지만 원덕삼에게는 꼭 말해야 하는 내용이 있었다.

    “저, 계약 내용 한 가지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강진현의 손가락 사이에서 다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원덕삼은 저 기운에 스치면 자기 몸이 형체도 없이 터져 나갈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른 요구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희나 씨와 이희원 씨에게 영원히 접근하지 말라는 조, 조항은 사, 삭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째서?”

    차가운 물음에 원덕삼이 마른침을 꼴까닥 삼켰다. 덩달아 그의 귓불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붉어지는 귓불을 본 강진현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더욱 거세지는 찰나였다.

    “벼, 벼, 벼, 변비가 있어서……. 여길 나가고 나서도 가끔 A급 비데를 사용하러 오고 싶은데……. 희나 씨, 그건 안 되겠습니까?”

    그는 정말 변비와 비데에 진심이었다.

    “절대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화장실값이 필요하다면 삯도 치르겠습니다.”

    한번 쾌변의 기쁨을 맛보고 나니, 원덕삼은 도무지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아랫배가 딴딴하게 뭉친 그 찜찜함, 이대로 힘을 주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느끼던 비참한 패배감까지…….

    한번 입이 뚫리자 말이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 변비라는 게 정말 끔찍한 질환입니다. 변비는 포션으로도 못 고칩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언젠가 똥독이 올라 죽을지도 모릅니다. 제 증상은 그 정도로 심각하다 이 말입니다.”

    희나와 희원, 그리고 강진현은 두 손을 맞잡고 애원하는 중년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애절한 고백이 허탈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밝은 빛과 함께 계약이 마무리됐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절대로 귀찮게 굴지 않겠습니다.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을 테니,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아, 예……. 들어가 보세요, 아저씨. 오늘 저녁은 따로 방 안에 가져다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니 매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원덕삼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뒷걸음질로 도망치듯 창고 방으로 돌아갔다.

    변비 앞에선 그토록 청산유수였건만, 막상 계약이 끝나고 나니 민망하기는 했나 보다.

    ‘……아니면 진현 씨 때문일지도 모르고.’

    희나는 강진현을 힐끔거렸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원덕삼이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기세가 제법 살벌했다.

    ‘원덕삼 씨 편들어서 기분이 상했나?’

    저래 보여도 원덕삼은 손꼽히는 능력을 가진 정보상이었다. 그런 그가 남매의 아군이 되면 도움이 될 듯하여 슬쩍 원덕삼의 편을 들었다.

    ‘변비 때문에 애걸복걸하는 것도 좀 민망하기도 했고…….’

    집에 있는 내내 변비, 쾌변 타령을 하던 모습이 떠올라 은근슬쩍 안쓰러운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경황이 없어서 잘 다녀왔는지 제대로 묻지도 못했네요. 던전 토벌은 괜찮았어요? 힘들진 않았고요?”

    희나는 조금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강진현은 못마땅한 듯 창고 문을 노려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희나 씨는 너무 물러서 탈입니다.”

    뺨에 곧바로 내리꽂히는 강진현의 엄한 눈초리에 몸이 절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썩 나쁜 거래는 아니었잖아요. 화장실 한 번 이용하는 데 정보 이용권이나 아이템을 한 개씩 제공해 준다니 얼마나 좋아요?”

    “희나 씨가 미스터 원에게 정보를 살 일이 뭐가 있습니까? 필요하다면 청룡 길드에서 모두 처리해 줄 수 있는 일입니다.”

    희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이런 인맥은 만들어 두면 나쁠 게 없잖아요. 보통 사람도 아니고, 아시아권 최고의 정보상이라는데 말이에요.”

    그 대답에 강진현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의 인맥이나 명예, 권력에는 관심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목소리가 어쩐지 뚱한 듯 들린 건 희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제가 희나 씨를 유혹할 때는 단 한 번도 넘어오지 않으시더니…….”

    당혹스러운 표현에 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유혹이라뇨!”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원한다는 이유로 제가 제안하는 훨씬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까?”

    ……표현이 남다르긴 했지만,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사실, 안전주의자인 희나가 ‘좋은 인맥’이라는 이유로 원덕삼같이 수상한 일을 하는 사람을 곁에 두려 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희나는 입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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