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98화
어찌나 아쉬워하던지,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변비가 그 정도로 고통스러운 질환이었던가?’
변비의 두려움 따위 모르는 희나는 이해할 수 없는 처절한 심경이었다.
“이봐 아가씨. 아니, 희나 씨. 이 공간은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거지? 희나 씨의 스킬과 연관된 제삼의 공간인 거지요?”
원덕삼이 잔뜩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희나가 공간에 관련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요 며칠 ‘홈 스위트 홈’에 기거하며 그런 결론을 내린 듯했다.
“네. 맞아요. 여긴 현실과는 다른 공간이에요.”
희나는 여기가 던전 안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대답했다. 그건 굳이 밝힐 필요 없는 내용이었다.
“어휴. 그럼 이 집을 통째로 매입할 수도 없는 일이고!”
원덕삼은 희나의 ‘홈 스위트 홈’을, 정확히 말해서 A급 비데가 있는 홈 스위트 홈을 사지 못한다는 사실에 몹시 가슴 아파했다.
“남의 스킬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왜 없는 것인가!”
오색이는 그의 바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안테나를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주택 관리자로서의 입장 표명: 집주인 변경 싫음. 지금 집주인 최적. 변비 중년 싫음.」
그러다 안테나를 길게 뽑아 하트를 그리며 희나에게 붙어 왔다.
「우리 관계 순항 중♡」
첫 만남에서는 그토록 깐깐하던 달팽이가 어느새 사랑둥이가 되었다.
희나는 빙그레 웃으며 어깨에 앉은 오색이의 탱글탱글한 머리통을 톡톡 쓰다듬었다.
“고마워. 나도 너 좋아해, 오색아.”
그 알콩달콩한 모습을 뒤에 두고 원덕삼은 변기를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아이고, 내 비데! 내 비데! 내 변비!”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어휴,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기만 하니까 시간이 너무 안 가!”
희나는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 켜며 희원에게 하소연했다.
방금 밭을 매고 돌아와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있던 희원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오전부터 집을 다 뒤집어 가면서 했던 대청소는 일이 아니야? 우리 밥도 차려 주고, 집 안도 쓸고 닦고 아주 쉴 틈이 없이 일하던데 아무것도 안 했다니?”
“그래요, 희나 씨. 내가 여기 앉아 있는 동안 아가씨는 온종일 일만 했어요. 아침부터 청소 소리가 요란하던데.”
원덕삼도 희원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창고 방 안에 갇혀 있다가 방 청소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희나의 손에 의해 거실로 쫓겨 나온 참이었다.
그는 할 일이 없어 어슬렁거리며 희나의 눈치를 보다가, 건조기에서 나온 잘 마른 수건을 개고 있었다.
“그거야 할 일이 없으니까 한 대청소고! 이제 청소도 끝나서 할 게 완전히 없어져 버렸어…….”
희나는 반들반들하다 못해 번쩍거리는 집 안 상태를 바라보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출근해도 하는 일 없잖아?”
희원이 강진현이 없으니 할 일이 없지 않냐며 지적했다.
“그건 그런데……. 출근해서 지루한 거랑 집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해서 지루한 거랑은 달라. 차원이 다르게 심심해.”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곤 시간 죽이기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회사를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만 쉬려니 죽을 맛이었다.
원덕삼을 감시한다는 명목이 있긴 했지만…….
‘……저걸 봐. 거실에 나와서 수건이나 개고 있는 변비 걸린 아저씨를 감시해 봤자 뭘 하겠어?’
어차피 이 집 안에서 원덕삼은 남매를 공격할 수 없었고, 그럴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아주 천하태평이었다.
‘나는 정말 개미처럼 일해야 하는 사람인가 봐.’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제대로 쉬어 본 적 없이 일만 했기 때문일까? 이런 식의 텅 빈 스케줄은 심하게 낯설었다.
“이왕 시간 남는 김에 오빠 밭일이나 좀 도울까?”
마침내 희나가 오빠의 영역을 침범하려던 순간이었다.
찰칵, 철커덕, 쿵.
현관문 여닫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희나 씨? 휴가를 내셨다고 들었는데, 아픈 데라도 있습니까?”
닷새 전, 던전 공략을 떠났던 강진현이었다.
그는 하숙인으로 들어온 후, 오색이에게 임시 출입증을 발급받아 ‘홈 스위트 홈’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했다.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진현 씨? 벌써 오셨어요? 일주일 넘게 걸릴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컨디션이 좋아 던전 공략을 빠르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엄청 빨리 끝내셨네요.”
예견된 일정보다 이틀 이상 이르게 도착한 셈이었다.
강진현이 빙그레 웃으며 희나와 희원에게 꾸벅 인사했다.
“희나 씨 덕분입니다.”
“제 덕분은요. 제가 한 건 재워 드리고 먹여 드린 일밖에 없는데…….”
“그게 대단한 일인 거지요.”
한편, 원덕삼은 희나와 강진현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툭, 떨어뜨렸다.
“……가, 강진현 헌터?”
아시아 최고의 정보상인 그조차 직접 마주하기 힘든 상대가 나타나다니!
‘대체 저 아가씨의 정체는 뭐지? 아니, 대체 이곳은 어떻게 되어 먹은 장소인 거야? 허공에 문이 나타나고, 던전과 이어져 있는 데다 S급 헌터까지 출몰?’
원덕삼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강진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감이 예민한 강진현이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 그는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이미 원덕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일견 차분하고 냉정해 보였으나, 검은 눈동자는 혼란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강진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 불안, 혹은 적개심을 떨쳐 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희나 씨, 저자는 누굽니까?”
직설적인 물음에 희나는 말을 더듬었다.
“어, 저 아저씨는…….”
갑자기 대답하려니 난감했다. 그동안 뭐라고 설명해 주어야지, 생각했던 말들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결국 원덕삼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제 납치범이었던 사람……요?”
희나의 설명에 강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납치범이라고요? 잘못 들었습니다?”
강진현은 그 자리에서 희나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동시에 손에서 검은 기운을 뽑아내며 원덕삼의 목을 틀어쥐었다.
“커, 컥!”
목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압박감에 원덕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희나는 깜짝 놀라 강진현의 팔에 매달렸다.
“지, 진현 씨! 그만! 제 얘기부터 들어 보세요!”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들려주셔야 할 겁니다.”
강진현은 나직이 경고하며 검은 기운을 흩어 냈다.
기세가 몹시 사납게 느껴져서, 희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상황을 이야기했다.
시장에 장을 보러 갔던 일부터 시작해 납치 퀘스트를 받은 원덕삼에게 납치되었던 일, ‘홈 스위트 홈’ 스킬을 사용해 창고를 탈출하고 납치범을 잡은 이야기까지 전부.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 집에 잡아 두고 있는 거예요.”
희나는 어째서 원덕삼을 집 안에 잡아 두고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대로 풀어 줄 수는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진현 씨가 돌아올 때까지 판단을 좀 미루기로 했어요.”
강진현은 가만히 말을 듣다가 간단히 결론을 도출했다.
“제거하면 되겠군요.”
“예?”
툭 튀어나온 살벌한 답변에 희나는 입을 헤 벌렸다.
강진현은 희나가 이해하지 못하여 되물었다고 생각하였는지, 친절하게 풀어 설명해 주었다.
“희나 씨, 제거한다는 말은 죽여 없앤다는 뜻입니다.”
“아니, 그 뜻을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사, 사, 살려 주십시오!”
가만히 앉아 눈치를 살피던 원덕삼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은 맞습니다! 암요! 벼락 맞아 죽어도 싼 일입죠!”
“본인도 동의하는 것 같으니 이대로 처리할 수 있겠습니다. 마침 현관을 통하면 던전에 곧바로 진입할 수 있으니 시체는 그곳에 던져 처리하면 되겠군요.”
강진현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다시금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새까만 그림자가 당장이라도 원덕삼을 향해 쏘아질 듯 살벌한 기색으로 일렁였다.
이에 원덕삼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흐어억!”
그는 귀싸대기의 두려움마저 잊고 곁에서 저를 지키고 있던 바둑이의 뒤에 후다닥 달려가 숨었다.
하지만 바둑이의 날씬한 줄기는 원덕삼의 몸을 완전히 가려 주지 못했다.
“강진현 헌터님! 지난 실수에 대해서는 땅을 치고 후회하고, 또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두 분 남매께 해를 끼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기로 마석에 걸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는 몸을 굽신거리며 끝없이 변명하고 빌었다.
이건 다 퀘스트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미쳤던 것 같다, 이곳에서 사흘간 지내며 두 남매에게는 해라곤 끼치지 않았다, 자기는 정보상이니 정보를 원한다면 청룡 길드에 극비 정보를 무한히 제공할 수도 있다, 등등…….
“저기, 아저씨. 원덕삼 씨. 잠깐만 가만히 좀 있어 봐요.”
희나는 강진현의 살벌한 기세에 잠시 멍해 있다가, 손을 휘저어 원덕삼의 말허리를 똑 잘라 냈다.
그러자 바둑이가 풀잎사귀를 들어 원덕삼의 나불거리는 입을 챱 하고 막았다.
“으읍!”
뺨을 스치는 익숙한 이파리의 감촉에 원덕삼이 입을 척 닫았다.
바둑이의 손맛, 아니, 잎맛이 제법 찰지긴 했나 보다.
“진현 씨, 저는 진현 씨 의견에 반대예요.”
희나는 강진현을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그의 손등에 토닥토닥 손을 얹었다.
좀 진정하라는 의미였다.
“……희나 씨.”
다행스럽게도 희나의 손길은 꽤 효과가 좋았다.
그의 손에서 일렁이던 검은 기운이 희나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자취를 쏙 감췄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