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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97화 (97/228)
  • 던전 안의 살림꾼 97화

    남매의 날카로운 반응에 원덕삼은 잔뜩 풀이 죽었다.

    그 와중에 희나가 시킨 대로 국그릇과 밥그릇을 얌전히 날라 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밥과 국, 그리고 생선구이와 반찬 두어 종류. 평범한 저녁상이 금세 차려졌다. 남매와 납치범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내내 냉랭한 기운을 풍기던 희나는 그제야 표정을 좀 풀고 음식을 권했다.

    “맛있게 드세요.”

    ‘불편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할 수는 없는 법이지.’

    희나네 집 밥상머리 철학이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가씨.”

    원덕삼이 슬쩍 남매의 눈치를 살피며 수저를 집어 들었다.

    잘그락, 잘그락.

    조용히 식사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분위기가 평소보다 싸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희나의 손맛은 여전히 탁월했다.

    ‘아까 샌드위치도 맛있었는데, 이 맛은 대체……?’

    희나와 희원의 눈치를 잔뜩 보던 원덕삼 또한 희나의 밥 솜씨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수저를 놀렸다.

    입안이 부어 밥알과 반찬을 씹기가 어려웠지만, 음식 맛이 대단해서 밥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그 모습에 차가운 희나의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밥은 복스럽게 먹네.’

    부은 뺨과 입이 아파 ‘아야, 아야.’ 하면서도 불평불만 하나 없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거기다 예의 바른 칭찬까지……. 희나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음식 솜씨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니까.’

    “뭐, 허튼짓만 하지 않는다면 한동안 큰일은 없을 거예요.”

    희나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희나의 마음이 다소 풀린 걸 알아챈 원덕삼이 눈치 좋게 알랑거렸다.

    “그럼요. 허튼짓이라뇨. 전혀 그럴 생각 없습니다. 자자, 그럼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건 좀…….”

    희나는 탐탁찮게 고개를 저었다.

    강진현 정도로 가깝지 않은 이상, 생판 남에게 자기 주방을 맡기는 건 꺼려졌다.

    ‘내가 직접 해야 숙련도도 오르는데.’

    하지만 희원이 말을 먼저 말을 가로챘다.

    “바둑아, 오색아. 이 사람 설거지 제대로 하는지 감시해 주라. 제대로 안 하면 한 대씩 쥐어박아도 돼.”

    “하지만!”

    “넌 좀 쉬어야 해. 어제도 걱정 때문에 거의 못 잤을 거 아냐?”

    「옳소! 옳소! 집주인 혈육 발언 동의!」

    바둑이도 탱탱한 머리통으로 희나의 등을 통통 밀었다. 방에 들어가서 쉬라는 뜻인 것 같았다. 희나는 성화에 못 이겨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대신 오빠가 저 사람 잘 보고 있어야 해?”

    “알았어. 네가 좋아하는 그릇 깨는지 안 깨는지 잘 감시하고 있을게.”

    이 와중에 희원이 농담을 던졌다.

    “그 말이 아닌 거 알잖아!”

    희나는 오빠의 옆구리를 푹 찌르고는 방 안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등 뒤로 ‘야, 이희나!’ 하는 고함이 들린 것 같았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 * *

    납치범, 그러니까 원덕삼은 창고 겸으로 쓰고 있는 남은 방에 구금되었다.

    혹시나 하는 우려가 있었으므로 그가 지내는 방문 앞에는 바둑이가 자리를 지켰다.

    원덕삼은 바둑이에게 호되게 당한 전적으로 문고리에 손댈 생각조차 못 한 채 방 안에 꼬박 갇혀 있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바둑이가 문 앞을 떠나지 않았으니, 거의 감옥에 갇혀 있는 꼴이었다.

    완전한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덕삼은 이 집에서의 생활을 생각보다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몹시 즐겼다!

    “이건 정말 혁신입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원덕삼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여전히 얼굴에 얼룩덜룩한 멍이 남아 있었지만, 표정만은 마치 천국에 도달한 듯 행복해 보였다.

    “아저씨, 아저씨 화장실 사정 아무도 안 물어봤습니다.”

    희원이 눈썹 끝머리를 까딱거렸다.

    그러나 원덕삼의 낯가죽은 생각보다 두꺼웠다.

    “다시 한번 제안드리지만, 저 A급 비데 말입니다. 제게 파시면 안 되겠습니까? 돈은 얼마든지 낼 수 있습니다. 10억? 20억? 말만 하십시오. 현찰로도 드릴 수 있고, 현물도 가능합니다.”

    원덕삼은 희나네 집 화장실에 있는 ‘앉으면 변비가 해결되는 만능 비데(A)’를 굉장히 탐냈다.

    앉으면 변비가 해결되는 만능 비데는 ‘홈 스위트 홈’ 초반 레벨 업 때 희나가 뽑은 특수 아이템이었다.

    A급이었지만, 고작 변비를 해결해 주는 평범한 기능이 다라 별생각 없이 두고 있었다.

    희원과 강진현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원덕삼은 달랐다. 그는 이 만능 비데의 성능에 굉장히 놀랐다.

    아니, 놀라는 정도가 아니었다. 기적이라고 여겼을 정도다.

    “변비는 불치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고급 유산균도 따라오지 못하는 이 A급 만능 비데의 위대함에 대해 설파했다. 밥상머리에 오를 주제로 썩 적절하지 못했다.

    흰 밥에 따끈한 스팸을 올려 먹고 있던 희나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식탁에서 화장실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돼요?”

    “하지만 두 분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이 시간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어필을 제대로 해 둬야 저 비데를 제게 파는 걸 고려해 주실 것 아닙니까?”

    음침했던 첫인상과 달리 원덕삼은 꽤나 유들유들한 달변가였다.

    당연히 낯짝도 두꺼웠다. 남매와 몇 번 식사를 하고 나서는 재주 좋게 말을 붙여 오기 시작했다.

    밥이 맛있다, 집이 참 안락하다, 나 같은 나쁜 놈을 제대로 된 곳에서 재워 주고 먹여 줘서 고맙다, 등등…….

    칭찬 일색으로 말을 걸어오니 영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화장실을 한번 써 본 이후로는 희나의 A급 비데에 푹 빠져 변비 타령만 해대니, 그야말로 수다스런 옆집 아저씨로밖에 안 보였다.

    “40년 인생, 평생을 통틀어 변비에서 제대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해방감이라니, 천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원덕삼이 힘차게 수저질을 하며 비데를 극찬했다.

    그는 하루 대부분을 앉아서 일했고, 식사도 부실하게 하는 편이었다. 덕분에 단순 변비가 악성 변비로까지 심화해서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다.

    “변비란 흘러넘치는 돈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여 왔는지에 대해 다시 설파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마침내 희나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백기를 흔들었다.

    “알았어요. 원덕삼 씨 여기 나가는 날 비데 팔아 줄 테니까 이 얘기는 그만하죠.”

    어차피 희나네 식구에겐 썩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으니,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팔아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원덕삼은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입니까? 정말로 감사합니다. 두 분 정보는 절대 남에게 파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말씀만 하십쇼. 평생의 병을 해결해 주셨는데, 못 해 드릴 게 없고말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먼 마석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협박을 하는 게 아니라 비데를 파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희나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데 떼러 갑니다!”

    원덕삼은 희원을 따르는 바둑이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비 탈출에 대한 간절함이 더 컸기에 낼 수 있었던 대단한 용기였다.

    ‘첫 만남만 이상하지 않았더라면 넉살 좋은 아저씨라고 생각했을 텐데.’

    희나는 뽀득뽀득 설거지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깐……. 아니, 나도 이상한 건가?’

    납치범과 그 피해자로 만난 것치고는 관계가 이상하게 화기애애한 듯한 느낌이었다.

    원래는 좀 더 차갑고 무섭게 대하려고 했는데, 한솥밥을 먹다 보니 이상한 정이 쌓였나 싶었다.

    ‘시스템 퀘스트가 떠서 납치한 거지, 원래는 나쁜 마음을 먹었던 적은 없댔으니까…….’

    희나는 원덕삼의 처지를 은근슬쩍 대신 변명해 보려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건 뭐,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잖아? 강진현 씨도 그러더니…… 급 높은 각성자들은 다 이런 건가?”

    고등급 각성자들은 높은 랭크를 얻는 대신 염치라는 것을 잃어버리는 걸까?

    진지한 고찰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안 돼!” 하는 비명이 들렸다.

    원덕삼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궁금증에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물기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원덕삼 씨, 무슨 일 있어요?”

    희나는 A급 비데가 설치된 화장실에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화장실 바닥에 원덕삼이 허탈한 표정을 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희원이 드라이버를 쥐고 턱을 긁고 있었다. 희원이 원덕삼 대신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안 떨어져.”

    “뭐가? 비데가?”

    “어. 이음새가 전혀 없어. 억지로 떼려고 했더니 시스템 경고가 떴어.”

    “뭐라고 떴는데?”

    “이대로 계속 강제로 떼어 내려 하면 아이템이 파괴된다고. 이건 ‘홈 스위트 홈’에 귀속된 시설이래.”

    “아하.”

    희나는 금세 상황을 이해했다.

    ‘홈 스위트 홈’의 레벨 업 확률 뽑기로 나온 것이라 그런지 남에게 함부로 양도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공간에 귀속된 아이템…….”

    원덕삼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드디어 내 인생을 구원해 줄 물건을 만나나 했는데! 인연이 아니라니!”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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