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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94화 (94/228)
  • 던전 안의 살림꾼 94화

    ‘사람이 호구 같은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서운하진 않았다.

    그저 사람 좋은 오빠가 늦게나마 헌터 일을 그만두고 농사나 짓게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먹으면서 하자. 벌써 한낮이야.”

    희나는 들고 온 달걀 샌드위치를 불쑥 내밀었다.

    “와. 맛있겠다!”

    희원이 흙 묻은 손으로 샌드위치를 덥석 집어 들려고 하기에 손등을 찰싹 때리며 물티슈를 내밀었다.

    “손부터 닦고 먹어.”

    오빠가 손을 닦는 동안 희나는 가져온 피크닉 매트를 모래사장 위에 깔았다.

    해변의 뙤약볕은 꽤 따가웠다. 하지만 선선한 바닷바람이 스치니 그 또한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뭐…… 뭐야?’

    한편, 원덕삼은 눈앞의 남녀가 벌이는 태평한 피크닉 쇼에 할 말을 잊었다.

    머리 위에서는 꽥꽥 몬스터가 울부짖고 있었다. 자기는 엉망으로 얻어맞은 채 의자에 꽁꽁 묶여 있고 말이다.

    이 상황에서 한가롭게 피크닉 매트를 깔고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는 담대함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건드렸구나!’

    원덕삼은 상대가 민간인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상황을 좀 더 깊이 알아보지 않고 섣불리 행동한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런 신묘한 땅콩과 관련한 사람이 평범할 리가 없지!’

    하긴, 상대가 아무리 평범해 보인다고 해도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원덕삼은 정보상 일을 하며 그런 경우를 무수히 많이 보았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다니……. 납치하더라도 좀 더 파악하고 납치했어야 했어.’

    유독 무해해 보이는 여자의 인상 때문일까? 되짚어 보자니 퀘스트에 눈이 멀어 생각 이상으로 성급하게 행동한 것 같았다. 경솔했다.

    ‘아악! 대체 내가 왜 그랬지?’

    원덕삼이 스스로의 멍청한 행각에 대해 반성, 반성, 또 반성하고 있는 사이 희나와 희원 남매는 샌드위치 하나를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진짜 맛있다.”

    희원이 두 번째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희나는 샌드위치에 더 손을 대는 대신 씻어 온 방울토마토를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그러게. 맛있다.”

    배가 좀 차니까 뻐근하던 근육이 좀 풀리는 것 같았고 마음도 느긋해졌다.

    누군가를 심문하기에 딱 좋은 상태였다.

    “저기요, 납치범님.”

    희나는 원덕삼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는 의자에 꽁꽁 묶인 채 그들 남매를 관찰하고 있었다. 희나도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두운 창고 속에서 볼 때는 엄청나게 무서운 인상인 듯했는데, 이렇게 밝은 낮에 마주한 남자는 그저 평범한 중년 남성에 불과했다.

    바둑이에게 맞아 퉁퉁 부어 있는 얼굴 탓일까, 언뜻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얼룩덜룩한 멍이 얼굴 이곳저곳에 올라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봐요. 대답 좀 해 봐요. 바둑이한테 맞다가 혀 깨문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원덕삼은 맞아서 퉁퉁 부은 입술을 겨우겨우 움직였다.

    “아가씨, 미안합니다.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봐요. 살려만 주신다면 뭐라도 하겠습니다.”

    사과는 선빵으로 갈기는 게 최고였다.

    원덕삼은 있는 힘껏 굽신거렸다. 그는 목숨 앞에서는 체면 따윈 벗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순순히 협조해 주신다면 다행이고……. 땅콩 얘기는 어디에서 들었어요?”

    희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이 중년인이 희나에게 접근해 납치한 이유가 땅콩 때문인 듯했다. 그러려면 희원의 땅콩에 대한 정보가 청룡 길드에서 새어 나갔다는 소린데, 희나는 그 구멍을 찾아내 완전히 막아 버리고 싶었다.

    “청룡 길드에서는 정보가 유출되지 않게 조치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외부인이 어떻게 오빠의 땅콩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그건……. 헌터넷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우연히 보아서 알았습니다.”

    “헌터넷 익명 게시판이요? 뭐라고 쓰여 있었기에? 청룡 길드원인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희나에게 땅콩을 구매한 헌터들 모두 관련 정보를 함구하기로 마석에 맹세했다고 했다.

    ‘그런데 익명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고?’

    불가능한 일이다.

    “제가 아는 경로는 이렇습니다. 누군가가 땅콩을 헌터넷 거래 게시판에 올려 소량 유통했고, 구입한 헌터가 땅콩의 효과를 간증하는 글을 익명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익명 게시판에 글을 올린 사람은 청룡 길드 소속이 아니었군요.”

    “그렇습니다. 어쨌든 그 땅콩을 구매한 다른 헌터들도 땅콩의 출처를 찾았지만, 거래자의 게시글과 아이디가 모두 삭제되어서 재구매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아.”

    여기까지 들으니 대충 전후 사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희나에게서 땅콩을 사 간 헌터 중 하나가 재빠르게 헌터넷을 통해 땅콩을 팔아넘긴 듯했다.

    이후 길드측에서 비밀 엄수를 시키자 증거로 남을 수 있는 게시글과 아이디를 전부 삭제해 버린 거겠지.

    “그걸 보고 땅콩의 출처를 알아내면 짭짤하게 돈을 만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거꾸로 캐내다 보니 그쪽이 나오더군요.”

    희나는 띵해진 머리를 짚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땅콩 때문에 저를 찾아올 수 있다는 뜻이겠네요?”

    속수무책으로 납치당해 간신히 탈출했건만,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니…….

    골치 아픈 표정을 짓는 희나를 보고 원덕삼이 머리를 급하게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정보를 직접 다루니까 여기까지 추적 가능했던 거였습니다.”

    “정보를 직접 다룬다니요?”

    그는 팅팅 부어터진 입술에 침을 발랐다.

    “저는 아시아권에서 능력 하나는 손꼽히는 정보상입죠.”

    “정보상이요?”

    정보상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말 그대로 정보를 다루고, 추적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이들이었다.

    ‘오빠 땅콩이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정보상까지 달려들 줄은 몰랐어…….’

    섬뜩한 깨달음에 희나는 몸을 작게 떨었다.

    그간 걱정했던 일이 진짜로 벌어지고야 말았다. 희나 남매의 능력을 탐내는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다.

    희나가 희원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빠, 우리 어쩌지? 큰일 났어.”

    “야, 야. 진정해. 뒤에 청룡 길드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어제 일은 재수가 없었지만, 앞으로 더 조심하면 되지.”

    희원이 바짝 긴장한 희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영 안 되면 길드장한테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신변 보호를 요청하자. 솔직히 말해서 나나 너 둘 다 꽤 대접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물론 지금처럼 평화로운 생활은 물 건너가겠지만 말이야.”

    태평하게 들렸지만, 은근히 이성적이었다. 덕분에 희나는 다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아무 힘없는 오빠라도 같이 있어 주니 도움이 됐다.

    “멀쩡히 살려만 주신다면 이 정보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정보가 추가로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조치할 수도 있습니다.”

    원덕삼은 남매의 대화를 듣고 재빨리 매달렸다.

    자기는 평범한 정보상이 아니라서 청룡 길드보다 훨씬 철저한 보안 작업을 약속할 수 있고, 누군가 남매의 정보를 캐려고 하는 즉시 상대를 알아내 미연에 사고도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희나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원덕삼을 바라보았다.

    ‘저 아저씨가 정말 그런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 눈빛을 알아보았는지, 원덕삼이 허둥지둥 덧붙였다.

    어쩌면 머리 위에서 깍깍 울어 젖히는 비행 몬스터가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제가 바로 미스터 원입니다!”

    “……그게 뭔데요?”

    “미스터 원을 모르십니까?”

    원덕삼은 몹시 충격 받은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나를 모른단 말이야?’

    헌터계에서 미스터 원이라고 하면 아주 유명했다. 국내외 어지간한 정보는 ‘미스터 원’을 통해 오간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는 그 정도로 아시아 헌터계를 꽉 붙잡고 있었다.

    미스터 원은 그 정체 또한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답게 그 자신에 대한 정보만큼은 교묘히 틀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알려진 사항이라고는 그의 성별이 남자라는 사실뿐이었다.

    한편, 희나의 떨떠름한 반응에 원덕삼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기의 얼굴과 정체를 모두 까발렸는데도 ‘그게 뭐야?’라는 시선이라니!

    자신의 유명세가 이뿐이었나 싶어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미스터 원은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정보상 중 하나입니다! 특히 아시아 쪽 정보는 꽉 잡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는 참다못해 자기의 이름에 금칠을 했다.

    샌드위치를 하나 더 먹어 치운 희원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맞아. 미스터 원은 엄청 유명한 정보상이야.”

    원덕삼은 몹시 반가워하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역시! 아시는군요!”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보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미스터 원이랑 그쪽이 동일 인물이란 건 무슨 근거로 믿지?”

    희원이 원덕삼의 정체를 미심쩍어했다. 희나 또한 오빠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요. 그렇게 대단한 정보상이 고작 땅콩 하나 때문에 민간인에 가까운 사람을 납치한다고요? 말도 안 돼.”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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