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92화
원덕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후 무어라 투덜거리며 주머니를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담배를 태워 쭉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뱉어 냈다. 역시 나쁜 사람답게 실내 흡연에 스스럼이 없었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희나의 코끝을 자극했다. 남이 뿜어낸 담배 연기를 맡는 건 별로 좋지 않았지만, 매캐한 향기 덕분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우선 여기서 탈출해야 해. 저 사람이 내 비밀을 더 캐내겠다고 심하게 해코지하면 어떻게 해?’
이 이상 비밀을 털리는 건 곤란했다.
희나는 다시 발끝에 힘을 주어 의자를 드륵드륵 뒤로 밀었다.
“아, 시끄러워! 아가씨 조용히 좀 해 봐!”
소리가 거슬리는지 담배를 태우던 남자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는 희나에게 이상한 스킬을 쓴 후 몹시 지친 듯 보였다. 다행이었다. 잠시나마 진이 빠진 사이 도망을 치면 좋을 것 같았다.
‘읏차!’
희나는 남자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앞뒤로 흔들어 뒤로 물러났다.
의자가 뒤로 기울며 어느새 등받이가 탁, 하고 벽에 닿았다. 등 뒤로 묶인 손끝에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아이고, 두야……. 이놈의 패널티 하고는.”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꽁초를 던져 발로 비벼 껐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향한 사이, 희나는 ‘홈 스위트 홈’ 스킬을 시전했다.
의자 뒤에 문이 생겼고, 희나는 손을 더듬거리며 문손잡이를 찾았다. 팔목이 묶여 있어서 거동이 쉽지 않았으나 그보다는 간절함이 더 컸다.
‘……여깄다!’
마침내 벽을 더듬거리던 희나는 손잡이를 잡았다. 꺾인 팔목을 뒤틀어 가며 문손잡이를 돌리려니 근육이 끊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탈출 앞에서 그깟 고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희나는 손잡이를 움켜잡고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아직 두통이 덜 멎었는지 끙끙거리며 머리를 짚고 있었다.
무기력해 보였지만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희나를 덮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거리에 있었다.
문고리를 완전히 돌리기 전에 들키기라도 할까 봐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리고…….
철컥.
고요한 창고 안에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울렸다.
‘문 여는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희나의 등 뒤로 식은땀이 조로록 흘렀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남자 또한 그 소리를 들었는지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현관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달칵, 하고 희나의 등 뒤로 문이 열렸고, 배꼼 열린 현관문 사이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 뭐, 뭐야?”
남자는 급작스러운 불빛에 놀라 당황한 듯 보였으나, 금세 중심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에서 몸을 들썩이는 희나를 낚아채려 했다.
‘아, 안 돼!’
희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앞으로 상체를 최대한 숙였다가, 반동력을 이용해 의자를 뒤로 밀었다.
“어딜 가려고!”
그 순간, 남자는 희나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희나는 간발의 차이로 그의 손가락 사이를 벗어났다.
대신 의자째 뒤로 몸이 기울었다. 무게 중심이 의자 뒷다리에 실리며 등받이가 문을 밀어 열었다.
“꺅!”
희나는 의자에 묶인 채 쿵, 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온몸에 가해지는 아픔을 느낄 겨를 따위 없었다.
“사, 살려 줘요! 저리 가! 꺼져!”
희나는 익숙한 현관 신발장 앞에 쓰러진 채로 악악 소리를 질렀다.
한편, 남자는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이게 뭐야? 이게 그 공간 관련 스킬인가?”
그는 조심스럽게 ‘홈 스위트 홈’의 열린 현관에 접근했다.
‘안 돼! 닫아야 하는데!’
희나는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몸이 묶여 있는 탓에 활짝 열려 있는 현관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좁은 집이었다면 금방 소란을 눈치채고 나와 봤을 텐데!’
희나는 처음으로 넓어진 ‘홈 스위트 홈’의 상태를 원망했다. 집이 워낙 넓어져 현관에서 일어나는 소동 따위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가씨, 이 스킬에 대해서는 천천히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남자의 눈이 희번덕 빛나는 것 같았다.
섬뜩한 위협에 희나는 애타게 식구들을 불렀다.
“도와줘! 오빠! 오색아! 바둑아! 사람 살려! 아악!”
퍽!
커다란 그림자가 남자를 덮친 건 한순간이었다.
“으악!”
남자는 희나에게 다가오다 무엇인가에 몸통 박치기를 당하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바둑이였다.
“바둑아!”
희나는 영웅처럼 나타난 바둑이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바둑이는 희나의 상태를 살피더니, 몹시 화가 난 듯 뿌리를 바닥에 탕탕 굴렀다. 그리고 성난 소처럼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타다닥!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바둑이가 넘어진 남자 위에 올라탔다.
“모, 몬스터다!”
남자는 급하게 인벤토리에서 칼을 꺼냈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나이프는 사람을 위협할 때나 쓸 수 있을 뿐, 2m 가까이 성장한 바둑이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던전 산책으로 단련한 바둑이의 잎사귀 하나 제대로 상처 내지 못했다.
바둑이는 팔, 아니 잎사귀를 높이 쳐들어 올렸다. 그리고 빠르게 남자의 얼굴을 내려쳤다.
짝!
“어억!”
차지게 뺨 맞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집 지키는 바둑이에겐 자비 따위 없었다.
짝! 짝! 짝!
바둑이는 잎사귀를 바꿔 가며 남자의 양 볼을 철썩철썩 내리쳤다.
사람 얼굴에서 저런 소리가 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강한 타격음이 났다.
「집주인?! 집주인?! 삐용삐용 ♨ ☎긴급출동112!!!! ☎긴급출동112!!!!」
그사이 달팽이가 낼 수 있는 속도 한에서 쏜살같이 달려온 오색이가 희나의 곁을 맴돌았다.
오색이는 희나의 상태에 몹시 놀랐는지 연신 112를 커다랗게 허공에 그려 댔다.
“뭐야……? 나 씻는 사이에 무슨 일……!”
희원은 씻고 있었는지 팬티 바람으로 나왔다가 눈앞에 펼쳐진 난장판에 입을 쩍 벌렸다.
“희나야? 이게 무슨 꼴이야!”
팬티만 입은 오빠의 멍청한 꼴을 보고 있자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희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오빠! 가만히 있지 말고 나 좀 풀어 봐!”
“아, 알았어!”
희원은 허둥지둥 달려와 희나의 묶인 손발을 풀었다. 몹시 당황한 듯했지만, 희나의 손발을 푸는 데는 막힘이 없었다.
희원은 나름 노예 생활까지 해 본 10년차 헌터였다. 비상사태에 재빨리 대처할 줄 알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묶여 있는 건데? 인신매매라도 당했어? 응?”
“비슷해. 납치당했어.”
“어쩌다가?”
“난들 알겠어?”
희나는 저린 팔다리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열린 문 밖에서는 여전히 짝, 짝, 찰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둑이가 남자를 치죄하는 소리였다.
“저놈이야? 널 이렇게 만든 게?”
희원이 바둑이 아래에 깔려 있는 남자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응. 저 사람이 날 납치한 것 같아.”
“저 새끼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듯 희원의 손에 날카로운 날붙이가 생겼다. 그는 사나운 눈빛을 하고 성큼성큼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이 희나에게는 굉장히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게 비록 팬티만 입은 상태여도 말이다.
희나는 오빠의 뒤를 따라 슬금슬금 남자에게 다가갔다.
짝! 짝! 짝!
남자는 몸을 대자로 하고 누운 채 바둑이에게 짝, 짝 뺨을 맞고 있었다. 살벌한 소리만큼이나 잎사귀의 스윙도 심상치 않았다.
“바둑아, 잠깐만.”
희나는 흥분한 바둑이를 말렸다.
이러다 상대가 죽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물론 살인멸구처럼 입막음에 좋은 방법은 없었지만, 그보다 알아내야 할 게 많았다.
‘어떻게 오빠의 땅콩을 알았는지, 땅콩과 나를 어떻게 연관시켰는지, 나를 왜 납치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아야겠어.’
이 사람이 희나에게 위해를 가할 마지막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대책을 찾아야만 했다.
한편 바둑이가 잎사귀를 휘두르던 것을 멈추자,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뺨을 세게 맞다 못해 기절한 것이었다.
희나는 자기를 묶었던 로프를 가져와 오빠에게 건넸다.
“왜? 목 졸라 죽여 버릴까?”
희원이 살벌한 소리를 갈기기에 희나는 눈을 흘겼다.
“아니. 이 사람 좀 묶으라고. 물어볼 게 많거든.”
그에게 추궁할 게 아주 많았다.
* * *
턱이 뻐근했고, 얼굴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고…….”
원덕삼은 끙, 하는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그러자 눈꺼풀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동시에 낯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캭캭캭! 캭캭캭캭캭!]
[끼요오오옷! 크오오오옷!]
드높다 못해 광활한 창공에 몬스터들이 둥글게 날고 있었다. 철썩, 철썩 파도치는 소리와 함께 옅은 짠 내가 났다.
“여, 여긴 어디야? 꿈인가?”
원덕삼은 눈을 비비기 위해 손을 움직였지만,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팔과 다리가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뭐야? 이건 무슨 일이지?”
그는 깨어나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인벤토리 안에 들어가는 희귀한 땅콩의 출처를 추적했고, 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를 찾아냈다. 청룡 길드 소속의 직원이었다.
정확한 소속 팀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마 전까지 청소 분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비각성자이거나 비전투계 각성자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다.
원덕삼은 일을 크게 벌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었으므로 일단 여자를 미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여자를 따라다니던 도중, 퀘스트가 떴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