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91화
상대는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였다. 등 뒤에 소름이 돋았다.
“꺅!”
희나는 급히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늦은 뒤였다.
남자는 작은 구슬을 던졌고, 펑!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주변의 풍광이 막이라도 낀 듯 흐릿해졌다.
“도와주세요!”
소리를 질러도 방음 부스 안에 들어온 것처럼 목소리가 허공에 힘없이 먹혔다.
몇 걸음 밖, 행인들은 골목을 지나면서도 희나와 남자의 대치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모두 무심하게 거리를 지나갈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 안 돼!’
심상찮은 기운에 희나는 재빨리 달음박질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억센 손아귀가 희나의 입을 턱 하고 막았다.
“……읍! 으읍! 으으읍!”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쳤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 내지 못했다.
‘싫어! 이게 뭐야!’
희나는 이를 내어 입을 막은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아드득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윽!” 하는 신음이 들렸다.
희나의 공격에 남자는 잠시 힘을 잃은 듯했고, 희나는 그 틈을 타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남자가 거친 어조로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에잇, 젠장할!”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에 찔린 듯 목 뒤에 따끔한 감각이 퍼졌다.
“꺅!”
생경한 감각에 희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목 뒤에서 퍼진 따끔한 감각은 순식간에 온 신경을 짜르르 울렸다. 그리고 채 몇 초 지나지 않아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 이, 이건…….”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남자가 그런 희나를 둘러업었다.
희나는 발버둥 치려 했지만, 몸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놓……아……줘…….”
이를 마지막으로 희나는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 * *
가장 먼저 깨어난 건 후각이었다.
희나는 퀴퀴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으…….”
절로 신음이 나올 정도로 머리가 띵했다. 희나는 숙취란 걸 모르는 말술이었지만, 만약 숙취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여긴?’
희나는 어두운 창고 안에 갇혀 있었다. 이곳을 창고라고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낡아 보이는 가구와 공구들이 방 안에 빼곡히 차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 으…….”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어딘가에 단단히 묶여 있어 거동이 어려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팔은 등 뒤로, 다리는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으악! 이게 뭐야!’
희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탈출해 보려 몸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팔다리가 어찌나 단단히 묶여 있는지 꿈쩍도 안 했다. 그저 의자만 불안하게 좌우로 덜컹거릴 뿐이었다.
한편, 의자와 분투하고 있는 희나의 머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떨어졌다.
“드디어 일어났군.”
희나는 벌떡 고개를 들어 올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희미한 어둠 속에 가려져 인상착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중키의 남성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볼 수 있었다.
“누, 누, 누구세요?”
상대의 정체를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섬뜩했다.
“내 정체를 함부로 알려 줄 수는 없어. 그러면 아가씨는 죽어야 하니까.”
‘주…… 죽어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지, 왜 납치당했는지, 또 앞으로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눈앞이 핑핑 돌았다.
‘……꿈도 아니지?’
꽉 조인 팔다리가 저린 걸 보면 이건 꿈이 아닌 게 확실했다.
“대답만 잘해 주면 큰일 없이 무사히 풀려날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남자는 희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만약 아가씨가 반항을 한다면…… 그때부턴 일이 복잡해질 테지.”
목소리에 서려 있는 살기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희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쪼, 쫄지 말자.’
희나는 대왕 버섯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말 통하는 사람이 마구잡이로 난장 피우는 B급 보스 몬스터보다 훨씬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뭐, 뭘 묻고 싶은데요?”
희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에 남자의 목소리에 흥미가 섞였다.
“오. 담력이 제법인걸.”
“제대로 대답만 하면 살려서 보, 보내 주신다면서요? 빨리 나가고 싶어요.”
극한의 상황에 처하자 놀랄 정도로 머리가 쌩쌩 돌아갔다.
희나는 남자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하며 만약 상대가 자기를 살려 보내 주지 않을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괜찮아. 나는 ‘홈 스위트 홈’ 능력이 있잖아. 벽에 손만 닿으면 현관문을 열 수 있어.’
어떻게든 벽에 붙기만 하면 문을 열 수 있었다.
희나는 남자의 눈치를 보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끼익, 끼이익.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조금씩 의자가 뒤로 밀렸다.
그런 희나의 행동에 남자가 몸을 일으켜 팔짱을 꼈다.
“내가 무서운가? ……글쎄. 아까 말했듯이 대답만 잘해 주면 전혀 무섭게 굴지 않겠다니까.”
그는 희나의 겁먹은 모습이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웃긴 사람이었다. 누구든 납치당해서 어두운 곳에 꽁꽁 묶여 있으면 겁먹을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희나는 뒤를 힐끔거리며 의자를 밀었다. 다행스럽게도 의자는 벽과 먼 곳에 놓여 있지는 않았다. 열심히 몸을 움직인다면 손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보자……. 내가 물어볼 게 좀 많아.”
한편, 남자는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탁, 하고 뒤로 밀리고 있던 의자를 잡아챘다.
“헉!”
그는 의자 등받이에 턱 하고 양손을 올렸다. 자연히 희나와 남자의 얼굴은 꽤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도 얼굴 윤곽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자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희나가 확인 가능한 건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뿐이었다.
“자. 우리 눈인사 좀 하지.”
그와 동시에 남자의 눈에 기이한 섬광이 스쳐 갔다.
‘아…….’
희나는 그 섬광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명이 울렸고, 순간적으로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 세상과 격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됐군.”
희나의 시선이 몽롱해지자마자 남자는 초시계를 작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물었다.
“아가씨는 인벤토리에 들어가는 땅콩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지?”
얼마 전, 청룡 길드와 독점 계약을 맺었던 땅콩에 대한 질문이었다. 희나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다.
‘청룡 길드 사람인가? 아니, 길드 사람이면 나를 이렇게 납치할 이유가 없는데……. 그럼 대체 정보는 어떻게 얻은 거지? 이건 대외비인 사항인데?’
머리로 궁리하는 것과는 별개로, 희나의 입은 순순히 움직였다.
“예. 연관이 있어요.”
‘어?’
이건 희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홀린 듯 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남자는 각성자고, 정신계 능력을 지닌 듯했다.
날카로웠던 남자의 시선이 만족스럽게 누그러졌다.
“그래? 내가 제대로 찾아왔나 보군. 그럼 땅콩은 어떻게 얻게 되었지?”
“우리 오빠가 재배한 거예요.”
희나의 대답에 남자가 오, 하고 작게 감탄했다.
“오빠가? 아가씨 오빠는 어떤 능력을 가졌기에 이런 특별한 땅콩을 재배할 수 있었던 건가?”
질문에 희나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희원의 클래스와 능력은 남들에게 알려 봤자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입술은 당혹한 마음과 달리 차분히 사실을 불었다.
“오빠는 농사꾼 클래스예요. 던전 토지에서 농사를 지으면 특별한 효능을 가진 작물을 키울 수 있어요.”
“대단한 능력이군. ……가만, 던전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어떻게 던전에 함부로 출입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지?”
‘헉.’
이건 정말로 위험한 질문이었다. 희나는 속으로 ‘안 돼!’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입술은 한 치의 저항도 없이 움직였다.
“……제 ‘홈 스위트 홈’ 스킬을 사용하면 안전하게 던전을 오갈 수 있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이거였다.
‘× 됐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실을 밝혀도 불안할 판에, 수상하기 그지없는 납치범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다니!
우민아의 말대로 이제 노예처럼 부려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건 아닐까?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머리가 과열됐다. 어떻게든 여길 탈출해야 하는데, 동시에 저 사람의 입막음도 필요했다.
“‘홈 스위트 홈’ 스킬이라고? 던전을 오갈 수 있는 스킬? 자세히 말해 봐, 아가씨.”
역시 남자는 희나의 능력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정신계 스킬에 걸려든 희나는 ‘홈 스위트 홈’ 스킬에 대해 술술 설명을 했다.
“제겐 던전 안에 집이 있어요. 그 집을 ‘홈 스위트 홈’이라고 불러요.”
제멋대로 사실을 불던 입과 혀를 멈출 수 있었던 건 스톱워치가 ‘삐삐’ 하며 울린 후였다.
집으로 통하는 문을 어디에서든 열 수 있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하기 직전이었다.
“이건 공간 관련 스킬인데……. 이, 이, 이…… 이 이상은 말해 줄 수 없어요!”
퍼뜩 정신을 차린 희나가 반항기 어린 어투로 고개를 가로젓자, 남자는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러면서 스톱워치를 내려다보았는데, 3분이 지나 있었다.
‘이건 시간제한이 있는 스킬인가 봐.’
희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내 남자가 아깝다는 듯 투덜거렸다.
“벌써 시간이 다 됐군. 1분만 더 있었으면 다 캐낼 수 있었는데……. 젠장.”
그리고 그는 휘청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이고, 띵하다. 이 능력은 다 좋은데 후유증이 너무 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