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90화
한 달에 한 번이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손을 움직여 누군가를 위해 먹을 걸 만드는 일은 꽤 즐거웠으니까.
심지어 길드 안에는 희나만을 위한 근사한 주방도 있었다.
거기다 과분할 정도로 넉넉하게 받는 월급을 생각하면 조금 더 일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에 와서 매일 노닥거리기만 하는 것 같아 양심도 찔리고 지겨웠다.
“그럼 강목현 팀장에게 말 좀 잘해 줄 수 있을까……?”
아무리 대단한 최상훈이라고 해도, 강목현 인사팀장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나 보다. 최상훈이 은근슬쩍 희나의 눈치를 살폈다.
“네. 제가 하겠다고 말씀드릴게요.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뭐라고 하시겠어요, 설마?”
희나는 최상훈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최상훈의 낯이 환해졌다.
“그래? 잘 생각해 줬다, 희나야. 사례는 다른 놈들이 톡톡히 할 거다.”
그는 크하하 웃으며 희나의 손을 마주 잡고 붕붕 흔들었다.
* * *
강목현 인사팀장은 희나의 요청을 놀랄 정도로 쉽게 허가해 주었다.
헌터들의 건의를 수십 번이나 냉랭하게 쳐 낸 사람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희나 팀장의 의사가 그렇다면 말릴 수 없지요. 거기다 길드 입장에서는 사기 증진에 도움이 되기도 하니,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큽니다.”
그러면서 일반 헌터 관리에 대한 추가급을 제안했다. 그 값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다랬으므로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그렇게 큰돈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하진 않을 건데요.”
그 정도로 큰돈을 받으면 부담스럽다 못해 도리어 과로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추가 예산안이라도…….”
희나는 거창하게 추가 예산안까지 제안하는 강목현 인사팀장을 간신히 말렸다.
“이미 지금 나오는 예산만으로도 차고 넘쳐요. 여기 있는 사람들 밥을 매일 해 주고도 남을 만큼 주고 계시니까, 괜찮아요.”
더 앉아 있다가는 어떤 돈벼락을 맞게 될지 무서웠으므로 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허락해 주시는 걸로 알고,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절대 무리하지 마십시오. 문제 있으면 찾아오시고요.”
“네넵, 알겠습니다! 강 팀장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나는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인사팀장 사무실을 나왔다.
쿵, 하고 문을 닫고 뒤를 돌자마자 희나는 깜짝 놀랐다. 수십 개의 시선이 갑자기 쏠렸다.
“어…… 어?”
인사팀장실 바로 밖에 헌터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예상치 못한 주목을 받게 된 희나의 귓불이 붉어졌다.
“뭐……. 강 팀장님한테 용건 있으세요?”
“아니. 용건은 희나 씨한테 있지.”
“그게 뭔데요?”
“얘기 어떻게 끝났어?”
“제가 힘들지만 않다면 일반 헌터님들 관리하는 거 얼마든지 지원해 주신다고…… 앗!”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누군가가 희나를 번쩍 들어 올려 업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선봉 삼아 헌터들이 버팔로 떼처럼 우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들 입에 지퍼라도 채운 사람들처럼 아주 침착하고 조용했다.
‘어, 어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8층 헌터 전용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희나가 휴게실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고요하던 휴게실에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
“최고다!”
“드디어 우리도 본다! 손맛!”
“김밥! 김밥!”
“땅콩! 땅콩!”
온갖 목소리가 겹쳐서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희나의 손맛을 보게 되어서 아주 기쁘다는 소리인 것 같았다.
휴게실 안의 사람들을 보니, 다들 낯이 익숙했다. 희나에게 김밥과 땅콩을 얻어먹었던 헌터들이었다.
“설마 인사팀장님한테 허락받을 거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어처구니없어서 묻자 누군가가 대답했다.
“당연하죠!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뒤이어 누군가의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
“우어어! 랭크 차별 타파하라! 타파하라! 헌터 해방!”
희나는 자기의 손맛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헌터 해방까지는 너무 나간 건 아닐까 생각하며 뺨을 긁었다.
헌터들의 흥분이 가라앉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잔치라도 벌일 듯 신나게 휴게실을 휩쓸던 헌터들은 하나둘 정신을 차리며 희나를 흘끔거렸다.
희나는 그들이 뭘 바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의 입가에 반짝이는 침방울이 속내를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알았어요. 내일 오후에 맛있는 거 해 드릴게요. 대신 메뉴는 제가 임의로 정하는 걸로. OK?”
“O-K!”
헌터들이 입을 모아 쩌렁쩌렁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진난만해 보이던지, 희나는 자기가 덩치 큰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치원 선생님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희나는 헌터들의 지극한 호위(?)를 받으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들 내일 먹을 메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벌써 침을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다. 눈은 또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헌터들의 기대에 부응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흠. 양을 많이 만들 수 있으면서 되도록 손이 덜 가는 메뉴……. 뭐가 있을까?”
냉장고와 서랍장을 여닫으며 이런저런 메뉴를 생각했다. 집에서 몇 사람 먹을 밥만 해 봤지, 이런 대량 조리는 해 본 적이 없어서 고민이 상당했다.
“그냥 반찬 몇 개만 차리기는 애매할 것 같고……. 적당히 밥 될 만하면서 영양도 충분한 메뉴…….”
곰곰이 고민하던 도중, 탁 하고 떠오른 요리가 있었다.
“아! 카레!”
그 어떤 재료를 넣어도 맛있는 카레였다.
“카레만 내가 하고 밥은 식당에서 해 달라고 하면 되겠다.”
사무실에 딸린 주방에서 대용량 조리는 힘들 것 같으니, 식당 조리실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내선 전화로 내일 한가할 때 조리실을 빌릴 수 있겠느냐고 묻자 흔쾌히 허락이 떨어졌다.
재료도 도매로 구입해 드릴까요, 하고 묻기에 괜찮다고 했다. 오늘 마침 할 일도 없겠다, 시장에서 직접 재료를 보고 고를 생각이었다.
‘장 보는 건 재미있어.’
이리저리 발품을 팔며 좋은 가격에 좋은 품질의 식자재를 사는 건 희나의 취미 중 하나였다. 거기다 시장을 구경하며 홀랑홀랑 집어먹는 간식의 맛도 아주 쏠쏠했다.
희나는 금세 외출할 채비를 끝냈다.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청룡 길드 법인 카드를 들었다.
대충 40에서 50인분어치의 장을 봐야 할 테지만 장바구니 무게는 두렵지 않았다.
이제 희나는 C급 살림꾼이었고, 어엿이 체근민 스탯 합이 30이 넘었다. 어지간한 짐은 가뿐히 들 만한 힘이 생겼다.
“역시 집안일에는 체력, 근력, 끈기가 최고야.”
희나는 집안일에 필요한 3대 덕목을 칭송하며 청룡 길드를 나섰다.
막 점심시간이 끝난 애매한 시간이어서 그런지 행인들이 썩 많지 않았다.
택시를 잡으려 대로변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뒤통수가 가려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음?’
희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청룡 길드 사람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낯선 행인들 뿐,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
의아해하며 다가오는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운 시장으로 향했다.
‘돼지고기랑, 감자랑, 양파, 당근…… 또 뭐가 있을까?’
택시 안에서는 카레에 넣을 재료와 양을 셈하기에 바빠 이상한 시선에 대한 궁금증은 금방 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희나는 기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택시에서 내렸다.
탁, 차 문을 닫자 익숙한 시장의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을 채웠다. 평일 낮이라 붐비지는 않았지만 복작복작하니 사람 냄새가 났다.
희나는 성큼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판대에 늘어놓은 상품들을 보고, 가격을 묻고 따졌다. 가격을 에누리해 달라며 답지 않은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중간에는 괜히 입이 심심해 매콤한 빨간 어묵을 사 먹었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을 곁들이자 순식간에 세 꼬치가 사라졌다.
희나는 냠냠 입맛을 다셨다.
‘걱정 없이 주전부리 잔뜩 사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생활비 걱정 때문에 열에 아홉은 꾹 참았던 시장표 간식이었다.
이제는 넉넉하다 못해 넘쳐 나는 월급 덕분에 마음껏 어묵 꼬치를 사 먹을 수 있었다.
‘아,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희나는 어묵 꼬치 세 개에 크나큰 행복을 느꼈다.
간식을 해치우고 시간을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시장 구경, 간식 구경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젠 정말로 재료 사러 다녀야겠다.”
희나는 아까 점찍어 두었던 가게들을 헤아리며 시장 길을 걸었다.
그러던 희나의 시선을 잡아채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시장 골목 한구석에 자리한 ‘호떡’이라는 글자였다.
‘호떡!’
희나의 눈이 반짝거렸다.
겨울에도 찾기 어려운 호떡집을, 이 여름에 발견하다니! 호떡순이인 희나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이었다.
‘맛있겠다…….’
벌써 입안에 뜨겁게 녹은 흑설탕의 풍미가 맴도는 것 같았다. 방금 매콤한 것을 먹어서 단게 더 당겼다. 다른 건 참아도 호떡은 못 참았다.
희나는 홀린 듯 시장 골목길 깊숙한 곳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러면서 희나는 이제 진짜 딴 길로 새지 않기로 굳게 맹세했다.
‘진짜로, 요것만 먹고 장 봐서 회사 돌아가야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주머니의 1000원짜리 지폐를 만지작거리던 순간이었다.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선 희나의 등 뒤로 수상한 그림자가 스쳤다.
스슥.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희나는 뺨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아까도 그렇더니, 또 이상한 기분이 드네…….”
그렇게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을 때였다.
희나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시커먼 그림자가 소리 소문 없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