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88화
‘한 번도 가지 않은 던전’이라고 생각을 하며 문을 여니 눈앞에 처음 보는 광경이 드러났다.
이번에는 푸른 풀밭이 너르게 펼쳐진 초원이었다. 폭신한 잎사귀는 새벽이슬에 젖어 촉촉했고, 아침 햇살은 오색빛을 발하며 찬란히 부서졌다.
“와, 여긴 정말이지…… 천국의 동산 같네요.”
희나는 작게 감탄했다.
던전이란 위험하기 그지없는 장소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이 완벽히 보존된 공간이기도 했다.
희나는 가끔 던전이 주는 경이로움에 완전히 압도되곤 했다. 오늘처럼 말이다.
“이렇게 평화로워 보이는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니. 믿기지 않아요.”
희나는 바둑이를 가까이 풀어 둔 채, 강진현과 함께 초원을 거닐었다.
강진현의 기세 때문인지, 아니면 희나가 입은 은신의 로브 덕분인지 일행은 산책하는 동안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마주하지 않았다.
바둑이는 챱챱챱 뛰어다니면서 아침의 풀숲을 누볐다. 킁킁대면서 바닥을 훑기도 했다.
희나와 강진현은 나란히 걸으며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바둑이는 언제나 부산스러워서 보고 있으면 적어도 심심하진 않았다.
휙!
한참 동안 혼자 뛰어놀던 바둑이가 꽃봉오리를 갑자기 쳐들었다.
“왜, 바둑아? 거기 뭐 있어?”
희나는 88%만큼 진행된 퀘스트 상태 창을 확인하며 바둑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앞으로 20분 정도만 더 놀게 하면 퀘스트가 종료될 것 같았다.
“바둑아?”
바둑이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그리고 희나와 희나의 뒤에 서 있는 강진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뜬금없는 행동에 의아해하며 묻자, 바둑이가 손…… 아니, 잎사귀를 내밀었다. 마치 악수를 권할 때 취하는 행동 같았다.
“잡아 달라고?”
끄덕끄덕. 바둑이의 반응에 별 거부감 없이 잎사귀 위에 손을 내밀어 꼭 잡았다. 그러자 기분이 좋은 듯 꼬랑지에 달린 잎사귀가 프로펠러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바둑이는 잔뜩 기분이 좋아서 나머지 반대쪽 잎사귀를 강진현에게 스윽 내밀었다.
강진현은 눈썹을 까딱이더니 팔짱을 풀고 바둑이의 잎사귀를 잡아 주었다.
양 잎사귀에 희나와 강진현을 붙잡은 바둑이는 갑자기 둘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어? 어디 가?”
희나는 바둑이에게 반쯤 질질 끌려가며 바둑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둑이는 걸음 속도를 희나의 발걸음에 맞추어 늦춰 주었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바둑이는 입이 없었다.
강진현은 의외로 바둑이에게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무언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나 봅니다.”
“윽. 제발 보스 몬스터 같은 건 아니었으면 싶네요.”
재빨리 ‘내 집은 어디에’ 스킬을 켜서 던전 맵을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바둑이는 보스 몬스터를 향해 나아가는 건 아니었다.
바둑이는 둘의 손을 잡고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스탯이 예전보다 좋아진 터라 숨이 차거나 힘이 들지는 않았다.
‘체력이 좋아지기는 했구나.’
한결 튼튼해진 팔다리를 자랑스러워할 때였다.
시야가 급작스레 탁 트였다.
“와!”
어느새 언덕에 다 오른 것이다. 그저 야트막한 언덕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올라와 보니 주변보다 지대가 높아서 마치 세상 꼭대기에 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때맞추어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 하고 푸른 풀들이 한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일으켰다.
날아가지 못한 이슬방울이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명화 속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았다.
“우리한테 이걸 보여 주고 싶었어, 바둑아?”
고개를 들어 올려 바둑이를 바라보자, 바둑이가 봉오리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그 움직임 속에 뿌듯함이나 자랑스러움 따위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속이 시원해지는 광경이야. 고마워.”
꼭 잡은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칭찬했다. 바둑이의 뿌리가 마치 탭 댄스를 추듯 흥에 겨워 들썩거렸다.
그 분주한 모습에 희나는 풋, 하고 웃음 지었다.
“여기서 풍경 구경하고 있을 테니까, 바둑이 너도 나가서 놀고 있어. 조금 있으면 나 출근해야 해.”
바둑이는 알았다는 듯이 봉오리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 희나와 강진현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왜? 우리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안 가니까 걱정하지 마.”
자기를 놔두고 갈까 봐 걱정하나 싶어 바둑이를 토닥였다. 하지만 바둑이의 고민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바둑이는 고개를 바쁘게 돌려 둘을 바라보더니, 큰마음 먹는다는 듯 꽃봉오리를 뻐끔거렸다.
예쁘장한 봉오리에 어울리지 않는 아드득, 아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이게 무슨 소리일지는 절대 궁금하지 않았다.
잠시간 포효하던(?) 바둑이는 마침내 희나와 강진현의 손을 잡고 있던 양 잎사귀를 살포시 포개었다.
자연히 잎사귀를 잡고 있던 두 손은 마주 닿게 되었다.
희나는 손등에 닿는 뜨끈한 체온에 깜짝 놀라 소스라쳤다. 하지만 바둑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희나의 손등 위에 강진현의 손바닥을 포개어 놓았다.
그리고 붙잡은 두 손을 토닥토닥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흡족한 것처럼 보였다.
“바둑아?”
바둑이는 희나의 물음을 못 들은 척하며 뒤로 스윽 빠졌다. 바둑이가 억지로 겹쳐 놓은 손은 자연히 떨어지는 듯했으나…….
“……앗!”
희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강진현이 희나의 손을 움켜쥔 건 순간이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희나의 손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지, 진현 씨?”
희나는 깜짝 놀라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저 멀리 달려가고 있는 바둑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둑이가 바라는데, 잠시 이렇게 있도록 하죠.”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마치 깜짝 놀란 희나를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희나는 오기가 생겨 고개를 팽 돌렸다.
“그래요. 바둑이가 바라는데요, 뭘.”
하지만 어쩐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건 감출 수가 없었다.
먹고사느라 바빠 친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는데, 이성 친구라고 사귀어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희나는 이런 접촉에 몹시 취약했다.
그동안 잘생긴 정물처럼 여겨 왔던 강진현이래도, 이렇게 직접 손을 맞잡으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민망함에 붙잡힌 손을 꼼지락거릴수록 희나의 손을 잡아 오는 손길은 단단해지기만 했다.
냉랭한 인상과는 달리, 강진현의 손은 몹시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잡힌 손이 녹아내리지 않을까 하는 허튼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뜨끈한 체온을 의식하고 있을 때였다.
강진현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이 퀘스트가 끝나도, 가끔 이렇게 나와 산책하는 것도 좋을 듯하군요.”
“산책을요?”
“그렇습니다. 바둑이가 산책을 많이 좋아하니 이대로 산책을 끝내면 많이 아쉬워할 것 같습니다. 물론 혼자는 안 되고, 저를 동반한다는 가정하에.”
“그야…… 나쁘지 않죠. 집에 자주 놀러 오세요.”
다만, 희나의 안전을 누구보다 따져 대던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 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의외입니까?”
그 표정을 읽었는지 강진현이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물었다.
희나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사실 좀 의외라곤 생각했어요. 진현 씨가 이런 말을 해 줄 줄은…….”
“저도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긴 한 사람입니다. 바둑이와 정도 꽤 들었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맞잡은 손에도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덩달아 희나에게까지 긴장이 전해졌다. 희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무…… 뭔데요?”
“……희나 씨의 집에서 이대로 더 머물러도 될까요?”
낯부끄럽게까지 들리는 소리였다. 안타깝게도 희나는 이런 말에는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잘 몰랐다.
“어…….”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시스템 창이 띠롱띠롱 울리며 퀘스트 완료를 알렸다. 어느새 바둑이 던전 산책의 퀘스트 진행도가 100%가 되어 있었다.
“퀘스트 완료 창이 떴습니까?”
강진현이 눈치 좋게 물어 왔다.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없이 눈앞에 뜬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레벨이 15나 올랐으니 받아 볼 레벨 업 보상도 15개나 됐다. 하나하나 확인하기는 번거로웠다.
“예스. 한꺼번에 받아 볼게.”
보상 수령을 수락하자마자 예의 ‘추첨 중’ 메시지가 떴다. 15개의 레벨 업 보상인 만큼 시간도 꽤 걸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나의 눈앞에 폭죽 터지듯 화려한 이펙트가 터졌다.
“특별한 보상?”
“……공간의 조각의 조각?”
공간의 조각이면 조각이었지, 그 조각의 조각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조각의 조각이라면, 공간의 부스러기쯤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시스템 창을 본 희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파트 확장이라고?’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