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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87화 (87/228)
  • 던전 안의 살림꾼 87화

    불쑥 희나네 집에 들어와 하숙인이 된 강진현은 자연스럽게 집안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식탁 위에 수저 세 벌을 차리는 게 당연해졌고, 외간 남자를 집 안에 들이는 게 말이 되냐며 씩씩거리던 희원은 어느새 강진현과 말을 놓고 형님 동생 하고 있었다.

    희나의 안전을 위해서 잠시 집에 들어온 거라는 설명이 아주 잘 먹혔다.

    오색이도 강진현이 마음에 드는지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주택 심미적 환경 개선에 긍정적 영향.」

    ……어쩌면 오색이는 얼굴을 무지하게 밝히는 걸지도 몰랐다.

    다만 전투하는 살벌한 모습을 목격한 바둑이는 그를 다소 무서워하는 게 문제인 듯했으나…… 결국 바둑이는 바둑이였다.

    강진현이 잡아다 주는 몬스터 몇 마리를 먹고 나더니 마음이 쏙 넘어가 이제는 보기만 해도 잎사귀를 프로펠러 돌리듯 했다.

    ‘사람이 괜찮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소탈한 사람이었어.’

    희나는 밥알을 꼭꼭 씹으며 강진현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끝이 아직 덜 마른 채로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강진현에 대한 희나의 초기 인상은 굉장히 덜렁거리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커피 하나 제대로 옮기지 못해서 반은 흘리질 않나, 이불을 털다가 북북 찢어 먹지를 않나…….’

    하지만 강진현을 하숙인으로 들이면서, 그 이미지는 조금씩 희석되어 갔다.

    희나의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아 잘 먹고 잘 자기 시작하자, 그런 사소한 실수들은 하나씩 줄어들었다.

    그전에는 장기간 누적된 피로가 겹쳐 힘 조절이 되지 않아 일상생활에서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보였던 거였다.

    물론 타고난 손끝이 여물지는 못해 여전히 서툰 면모를 보일 때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는 동거인으로서 중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무던한 성격과 재빠른 적응력이었다.

    불쑥 등장한 불청객답게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굴었다.

    강진현은 눈치 빠르게 희나네 집의 규칙을 파악했다. 그리고 착실하게 규칙에 따라 행동했다. 잔소리 하나 할 필요 없는 모범적인 하숙인이었다.

    그가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희나가 오빠의 옆구리를 쿡 찔렀을 정도였다.

    ‘오빠도 진현 씨 반만이라도 해 봐, 좀!’

    희나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는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척척 일을 도왔다.

    대체로 무언가를 찬장에서 꺼내거나, 무거운 걸 들거나, 병뚜껑을 따지 못해 끙끙거릴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이런 건 힘이 더 센 사람이 해야 하는 법입니다.’

    ‘하하, 세상에 그런 법은 없어요, 진현 씨.’

    ‘부모님께 그렇게 배웠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연스럽게 희나와 일상을 공유했다.

    거기다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집에서 살던 사람이라 그런지 짐도 적고 생활 습관도 깔끔했다. 나무랄 곳 하나 없었다.

    온갖 던전을 나다니던 사람이라 그럴까? 적응력이 대단했다. 처음부터 희나네 남매와 함께 살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희나와 희원에게는 또 얼마나 깍듯한지……. 강진현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던 희원이 혀를 차며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였다.

    자기가 본 상급 헌터들은 거의 다 재수 없었는데, 걔들은 모두 S급 강진현을 보고 배워야 한다면서 말이다.

    “오늘부터 던전 공략 들어간다고 했지?”

    밥그릇을 비우던 희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예. 짧으면 사흘, 길면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몸조심하세요.”

    희나의 집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들어가는 던전 공략이었다.

    ‘그리고 진현 씨가 우리 집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기도 하지.’

    희나는 퀘스트 창을 띄워 살폈다.

    <바둑이 산책(난이도 미정): 애완식물에게 필요한 건 충분한 영양뿐만이 아닙니다. 매번 다른 던전을 산책함으로써 바둑이가 다양한 토양을 경험하게 해 주세요! 한결 성숙해질 기회가 될 것입니다.

    ▶ 필수 퀘스트 (9/10)

    - 바둑이 던전 산책 1 (100/100%)

    ……

    - 바둑이 던전 산책 9 (100/100%)

    - 바둑이 던전 산책 10 (0/100%)

    ※ 던전 산책은 안전지대 바깥 지역에서만 유효합니다.

    ※ 시간제한: 40일 (현재 남은 시간 1일 00시간 58분 31초)>

    어느새 바둑이 던전 산책 퀘스트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 말인즉슨, 강진현과 함께하는 던전 산책도, 그가 희나의 ‘홈 스위트 홈’에 세 들어 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의미였다.

    희나가 제안했던 거주 기간은 산책 퀘스트를 완료할 때까지만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같이 산 지 보름 남짓.

    보름은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짧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스며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적어도 정 많은 희나 남매에게는 그랬다.

    ‘없으면 허전할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이 집에서 강진현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후련하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한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식사 끝내셨습니까, 희나 씨?”

    강진현은 잠시 생각에 빠져 멍 때리는 희나의 밥그릇을 힐끗 보았다.

    “아, 거의 다 먹었어요.”

    희나는 시계를 보며 밥 한술을 크게 떠서 입안에 욱여넣었다. 흰밥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며 밥그릇과 수저를 싱크대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강진현도 희나의 뒤를 따라 자기가 먹은 밥그릇을 치웠다.

    “오빠, 마저 먹고 설거지까지 좀 부탁해.”

    희나는 아직 식사 중인 희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종종걸음으로 나섰다.

    바둑이가 있는 곳을 생각하며 현관을 여니, 익숙한 앞마당이 보였다. 요즈음 희원이 열심히 일구고 있는 밭이었다.

    바둑이는 흙 위로 금빛 가루를 흩뿌리며 정신없이 뒹굴고 있었다. 꽤 커진 잎사귀를 파닥거릴 때마다 마치 요정 가루 같은 금가루가 팔랑팔랑 날렸다.

    황금빛 가루는 땅 위로 떨어져 몇 번 빛을 발하다가, 눈처럼 스르륵 녹아 없어졌다.

    희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

    희원은 이 가루가 일종의 던전 토양용 비료 같은 거라고 설명했다.

    던전 밭에서 잘 자라지 않았던 식물들도 바둑이의 금빛 가루를 맞으면 모두 싱싱하게 자라났다.

    땅콩 농사가 풍작을 이루었던 것도, 던전의 작물들이 특별한 효능을 가지게 된 것도 다 바둑이 덕분이었다.

    바둑이가 부쩍 커다래지면서 금가루를 펑펑 날려 주지 않았더라면, 특별한 효능을 가진 작물을 재배하기는커녕 땅콩도 다른 작물처럼 비참하게 말라 죽었을 게 분명했다.

    “바둑아!”

    목소리를 높여 바둑이를 불렀다.

    혼자서 밭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바둑이는 머리, 아니 봉오리를 번쩍 들어 올려 희나를 바라보았다.

    챱챱챱챱, 챱챱!

    그리고 한달음에 희나 앞에 달려와 잎사귀를 흔들었다. 희나가 앞으로 무얼 시킬지 잘 아는 눈치였다.

    “쉿. 앉아, 바둑이. 진정해.”

    제법 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바둑이가 철푸덕, 바닥에 뿌리를 대고 주저앉았다.

    어느새 희나의 곁에 도착한 강진현이 그런 바둑이를 칭찬했다.

    “잘했어.”

    바둑이는 몸을 숙여 강진현의 손 위에 머리를 부볐다.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희원이 오냐오냐 키워 천방지축이기만 하던 바둑이를 훈련시킨 건 바로 강진현이었다.

    그는 바둑이에게 ‘앉아’, ‘기다려’, ‘엎드려’ 등을 가르쳤다. 바둑이는 최근 ‘빵야!’도 배워서 총 맞고 쓰러지는 연기도 제법 그럴싸하게 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 얌전히 산책 다녀오는 거다, 응?”

    희나는 바둑이의 줄기를 살살 만져 주며 얼렀다. 바둑이는 봉오리를 까닥거리며 얌전히 굴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희나 씨, 이것부터.”

    씩씩하게 산책을 나서려는 희나의 어깨 위를 도톰한 로브가 덮었다.

    “아, 감사해요.”

    희나는 강진현이 어깨 위에 덮어 준 은신의 로브를 걸쳐 입었다. 그리고 연이어 그가 넘겨주는 온갖 방어구를 껴입었다.

    “진현 씨랑 같이 산책하는 거잖아요. S급 헌터가 곁에 있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번거로운 준비 과정에 작게 투덜거렸으나 강진현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전투에 임할 때 가장 유의할 것은 방심입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아주 완고해서 희나가 B급 보스 몹에게 맞아도 손가락 하나 안 다칠 정도가 되어서야 물러났다.

    희나는 팔다리 몸통을 주렁주렁 감싼 고급 방어구에 혀를 쯧쯧 찼다. S급 헌터와 함께하는 던전 앞 산책일 뿐인데 이 정도 공을 들이다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어휴. 진현 씨는 걱정이 너무 많아요.”

    “이 몇 달간 희나 씨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제 걱정이 허튼 걱정이 아니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그러면서 강진현은 묵묵히 희나의 팔목에 보호대를 채워 주었다. 희나는 그 세심한 손길에 머쓱함을 느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뭐, 어쨌든……. 이제 바둑이 산책 퀘스트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때맞춰 끝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진현 씨 던전 공략 들어가기 전에 어떻게 다 끝내긴 하네요.”

    강진현을 하숙인으로 들이게 된 이후, 희나와 바둑이의 산책길은 한결 안전해졌다. 그의 엄격한 관리, 감독하에 산책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둘은 오늘처럼 출근 전이나 퇴근 후에 함께 바둑이를 산책시켰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산책은 훨씬 덜 지루했다. 강진현이 천방지축인 바둑이를 잘 컨트롤했기에 몸도 편했다.

    처음 강진현과 던전에서 마주쳤을 때는 ‘망했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다 나름의 인연이었던 듯했다.

    “이제 갈까요?”

    희나는 강진현과 바둑이를 데리고 현관문을 다시 열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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