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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85화 (8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85화

    “당시 희나 씨의 대처를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강진현은 희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엄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 던전 산책 건에 대해서는 굉장히 위험한 선택을 했지요. C급 비전투계가 던전 안에서 활개 칠 생각을 하다니…… 상식 밖의 행동입니다, 이건.”

    “그래도 적당한 아이템도 있었고, 제 지도 스킬을 사용하면 던전 보스도 피할 수 있으니까…….”

    “안일한 생각입니다. 스스로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제 제안을 거절하고 평범한 삶을 선택하려 했던 희나 씨가 이렇게 대범한 일을 저지를 줄이야.”

    그랬다. 이건 그의 말대로 희나답지 않았다. 소심한 극안전주의자 이희나가 이렇게 과격한 선택을 하리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하지만 이 퀘스트를 깨지 않으면 오색이와 바둑이를 모두 잃게 돼요. 둘은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집 식구고, 가족이에요.”

    아무리 안전이 중요하다 해도 무엇보다 우선순위가 되는 건 가족이었다.

    열다섯 살의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오빠와 단둘이 서로를 보듬으며 성장해 온 희나였다. 그런 희나에게 가족이란 애정과 신뢰 그 이상의 것으로 묶인 개념이었다.

    “저는 가족이라고 생각한 상대는 절대 버리지 않을 거예요.”

    결연한 대답에 강진현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렇군요. 희나 씨에게 가족은 최우선순위에 드는 존재군요.”

    그는 턱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곱씹듯 중얼거렸다.

    “절대 버리지 않을…… 그런 존재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진현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무엇인가 곰곰이 헤아리는 것처럼 보였다.

    희나는 눈알을 굴리고, 뿌리를 꿇고 앉아 있던 바둑이가 지루함에 몸을 비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저는 희나 씨의 안전을, 혹은 안전 감각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강진현이 툭 내뱉듯 말했다. 희나는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아주 단호했다.

    “그럼 뭘 더 어떻게……. 서약서라도 쓸까요? 마석 대고 맹세라도 할까요?”

    슬슬 이 상황을 어떻게 치워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강진현이 풀었던 팔짱을 다시 꼈다.

    “희나 씨의 안전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겠습니다.”

    “어떻게요?”

    그건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일주일 중에 평일 닷새 동안 매일 얼굴을 봤고, 가끔은 주말에도 마주쳐 잡담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 이상 뭘 더 할 수 있다는 거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제가 희나 씨 집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예?”

    희나는 귀를 의심했다. 귓구멍을 파고 다시 물었을 정도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강진현은 희나의 과장된 반응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희나 씨의 ‘홈 스위트 홈’에 저도 들어가 살겠습니다.”

    “우리 집에, 진현 씨가요?”

    “예. 바로 곁에 있어야 희나 씨가 허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 아니,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위험한 일이 닥쳤을 때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급발진을 한다고?’

    갑자기 집에 들어와 살겠다니, 정말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희나는 몹시 당황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 그게. 우리 집은 엄청 작아요. 20평이 될까 말까 해서 오빠랑 단둘이 살기에도 빠듯하고, 뭐가 많이 살아서 부산스러워요. 진현 씨는 그런 거 싫어하시잖아요?”

    “던전 공략 때는 맨바닥에서도 자는 몸입니다.”

    강진현은 희나가 뒤로 물러난 만큼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키 차이 때문에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저 바둑이라는 식물형 몬스터를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하지만 강진현의 협박 아닌 협박에 희나는 발끈해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너무하세요! 바둑이를 두고 협박하다니!”

    “일반인이건, 각성자건 할 것 없이 몬스터를 키우거나 배양하는 일은 국제법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

    그건 그랬다. 몬스터는 길들일 수 없는 인류의 주적으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전쟁 병기로도 이용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몬스터 연구는 몹시 엄격한 규제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강대국들은 핵 실험하듯 비밀리에 몬스터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은밀한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이건 대외적으로는 철저히 금지되고 있는 일이었다.

    누가 봐도 식물형 몬스터인 바둑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희나 남매는 아주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게 분명했다.

    “제가 저 몬스터를 처치하지 않은 건 오직 희나 씨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이유는 없습니다.”

    공격적이기까지 한 지적에 희나는 눈썹을 축 늘어뜨렸고, 눈치 빠른 바둑이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커다란 나무 뒤에 숨었다. 그 와중에 희나가 걱정되는지 아예 도망가지 않는 모습이 장했다.

    ‘진현 씨가 이렇게 치사하게 굴 줄이야.’

    희나는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꼈다.

    물론 바둑이를 키우고 있는 희나도 당당한 처지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우직하고 듬직한 사람인 줄만 알았던 강진현이 이렇게 약삭빠르게 희나를 압박해 올 줄은 몰랐다.

    “저를 희나 씨의 집에 들여 주신다면, 이 모든 일을 모른 척 덮어 드리겠습니다. 차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적극적으로 도울 것 또한 약속합니다.”

    그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썼다. 희나를 압박했다가, 부드럽게 어르길 반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희나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거의 하나뿐이었다.

    “알았어요! 진현 씨 고집대로 해 보세요!”

    희나는 지레 열 받아 빽 소리 질렀다.

    “우리 집엔 진현 씨가 지낼 방도 없단 말이에요! 천하의 S급 헌터 강진현이 남의 집 거실 한구석에서 쪽잠이라도 자겠다는 소리인가요?”

    희나네 집은 작은 투 룸 형태였다. 방 하나는 희나가, 나머지 방 하나는 희원이 사용하고 있었다.

    강진현이 쓸 방은 없었다. 기껏해야 좁은 공용 공간인 거실 정도 내줄 수 있을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진현은 잔뜩 열 받은 희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차분한 강진현의 목소리는 희나를 한층 더 흥분시켰다. 희나는 화난 치와와처럼 왈왈 짖었다.

    “걱정을 어떻게 안 해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낼 생각은 아니겠죠? 우리 오빠 방은 절대 못 내줘욧!”

    이 좁은 집에 가족도 아닌 사람을 냅다 들이라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은 무슨 방법이에욧? 진현 씨가 우리 집 업그레이드해 줄 것도 아니잖아욧!”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뭐를 해 줄 수 있다는……!”

    희나는 소리를 치려다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강진현의 손바닥 위에 무엇인가가 생겨났다. 반짝거리는 동전이었고, 인벤토리 창에서 꺼낸 듯했다.

    “공간의 조각으로 집을 업그레이드했다고 하셨지요?”

    “그, 그런데요.”

    “여기 공간의 조각이 있습니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희나의 손에 동전을 건네주었다. 언뜻 동전을 받으며 스친 손가락은 단단하고도 뜨끈했다.

    희나는 손에 쥔 동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설명 창이 떴다.

    <공간의 조각(Hidden): 몬스터의 배 속에 깨끗하게 보존된 채 들어 있었던 공간의 조각. 과금의 짜릿함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희나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시스템 창이 깜빡거렸다.

    귀속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동전이 작게 빛을 발했다.

    “어?”

    또 다른 던전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깜짝 놀라던 차였다. 강진현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희나의 동전을 쥔 쪽 팔목을 움켜잡았다.

    <공간의 조각(Hidden): 몬스터의 배 속에 깨끗하게 보존된 채 들어 있었던 공간의 조각. 과금의 짜릿함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소유주: 이희나)>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시스템은 공간의 조각 설명 창에 ‘소유주: 이희나’라는 몇 글자를 추가로 적어 넣었을 뿐,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않았다.

    “깨끗하게 보존된 상태라 그런지 예전에 희나 씨 손이 닿았을 때처럼 공간 이동이 일어나지는 않는군요.”

    강진현이 재빨리 상황을 판단했다. 희나도 속으로 강진현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긴. 그때도 내가 더러운 동전을 닦고 난 직후에 던전에 떨어졌지. 손상된 게 일부 복구되면서 뭔가 오류가 생겼었나 봐.’

    하지만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공간의 조각 출처를 캐물었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난 거예요?”

    “아까 잡았던 보스 몬스터의 배 속에서 나왔습니다.”

    강진현이 저 멀리 쓰러져 있는 보스 몬스터의 사체를 턱짓했다.

    “희나 씨 말을 듣고 보니 쓰임새를 알겠더군요. 희나 씨의 스킬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아이템인 듯합니다. 공간 확장에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윽…….’

    희나는 사실을 고백한답시고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은 자기 입을 때려 주고 싶었다.

    지난번에 주웠던 공간의 조각 덕분에 집 레벨이 올라 원룸이 투 룸이 됐다는 말을 했던 게 문제였다.

    그 와중에 자기가 주운 물건의 용도를 파악하고, 희나에게 거절할 수 없는 거래를 제안한 강진현도 용의주도하다 싶었다.

    ‘곰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여우과잖아?’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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