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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84화 (84/228)
  • 던전 안의 살림꾼 84화

    강진현은 희나의 입이 쩍 벌어지는 걸 힐끔 바라보더니, 인벤토리를 열어 재빨리 옷을 꺼내 걸쳤다.

    얇지만 꽤 질겨 보이는 검은 티셔츠였다. 테크 웨어인지, 무슨 재질인지는 몰라도 몸에 착 붙어서 그의 몸매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보기 좋았다.

    ‘앗!’

    희나는 뒤늦게 자기가 강진현의 몸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방금까지 위험한 전투를 치르고 온 사람이었다. 그런 강진현을 향한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것 같아서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희나 씨.”

    강진현 또한 그 눈빛을 느꼈을까?

    그는 젖은 머리를 털어 말리다 희나의 이름을 불렀다. 전에 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네? 예, 예에……. 진현 씨, 말씀하세요.”

    희나는 지레 찔려 몸을 바짝 세웠다.

    매일같이 보는 얼굴이라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화난 듯 일자로 꽉 다물고 있는 입술이 유독 낯설어 보였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분명히 저 홀로 단독 입장했던 이 던전에 어떻게 희나 씨가 들어와 있는지, 어떻게 몬스터와 친밀한 교류를 나눌 수 있는지, 모두 들어야겠습니다.”

    강진현은 매섭게 희나를 추궁했다. 더는 눈감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기세였다.

    그의 엄한 시선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새카만 눈동자가 희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침을 꼴딱 삼켰다.

    “……여기까지가 전부입니까?”

    “네. 전부 말했어요. 진현 씨에게 감추고 있는 거, 이제 더 없어요.”

    “정말입니까? 더 숨기고 있는 부분은 없지요?”

    “민아 언니가 모르는 것까지 전부 털어놨는걸요…….”

    탈탈 털렸다는 듯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자 강진현이 만족한 듯 팔짱을 풀었다. ‘우민아도 모른다’라는 부분에서는 굳었던 표정을 풀고, 작은 미소를 띄우기까지 했다.

    “그렇습니까?”

    “정말이에요.”

    희나는 강진현에게 자신의 비밀을 모두 탈탈 털어놓았다.

    어떻게 각성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무슨 스킬이 있는지, 스킬의 효과가 무언지, 바둑이의 정체는 무엇인지, 왜 이 던전을 산책하고 있었던 것인지 등등…….

    반년여에 걸쳐 일어난 일이라 설명할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리해서 말하니 그렇게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강진현은 중간중간 희나에게 질문을 던져 가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경청했다.

    첫 만남에서 희나에게 ‘타인에게 자기의 클래스나 스킬에 대해 함부로 알려서는 안 된다’라며 차갑게 조언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니까 희나 씨 말에 따르면 희나 씨에게는 ‘홈 스위트 홈’이라는 공간 관련 스킬이 존재한다고요?”

    “네.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이 몬스터는…….”

    “몬스터가 아니라 바둑이예요. 조금 정신없긴 하지만 착하고 사람도 안 해쳐요. 저것 봐요. 진현 씨 앞에선 얼마나 얌전한지.”

    희나는 바둑이를 향해 손짓했다.

    바둑이는 S급 헌터의 기세에 눌렸는지 희나 옆에서 얌전히 무릎, 아니, 뿌리를 꿇고 앉아 있었다.

    강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럼 이 바둑이라는 생물은 오빠 되시는 이희원 씨의 애완식물이라고요.”

    “네. 바둑이 씨앗은 예전에 진현 씨와 함께 떨어졌던 B급 버섯 던전에서 얻은 거예요. 그걸 오빠가 심었더니 애완식물 키우기 퀘스트가 생겼고, 바둑이는 그렇게 우리 가족이 됐어요.”

    희나는 바둑이가 위험한 몬스터가 아니고 자신의 가족임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까지 와 버렸는데 바둑이를 잃을 순 없었다.

    “희나 씨는 협력 퀘스트로 애완식물 산책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고, 그러다 저와 마주치게 된 상황인 거군요. 거기다 저 식물이 우연히 보스 몬스터를 끌고 오는 바람에 상황이 복잡해진 것이고요.”

    강진현이 나머지 상황을 정리해 이야기했다. 희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의견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바둑이가 일부러 위험한 짓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절대 그런 건 아니…… 아마, 아닐 거예요……. 그렇지 바둑아?”

    슬쩍 바둑이를 바라보며 눈치를 주니, 바둑이가 꽃봉오리를 열심히 흔들었다. 그러면서 보스 몬스터의 산성 용액에 녹아들어 간 자기 잎사귀를 보여 주었다.

    동정심 유발을 위해서였다.

    희나도 쿵짝을 맞췄다.

    “바둑이도 이렇게 크게 다쳤고요……. 이거 보세요. 얼마나 아프겠어요?”

    아무리 강진현과 가까워졌다고 해도 팔은 안으로 굽었다. 식구인 바둑이의 편을 은근슬쩍 들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진현의 잔소리 폭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우선 제일 먼저 지적하고 싶은 건 희나 씨의 안전 문제입니다.”

    “오늘이 네 번째 산책이었는데 그동안 아무 일 없이 안전했어요. 거기다 진현 씨의 은신의 로브도 입었고, 방어의 팔찌도 찼는걸요. 오늘도 아마 진현 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조용히 돌아갈 수 있었을……”

    “그만.”

    그는 주절주절 이어 가던 변명을 툭 끊어 냈다.

    “던전은 어떤 비상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한 공간입니다. 희나 씨가 보기에 아무리 안전한 던전이라도 그 이면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희나 씨 같은 비전투계 각성자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희나 씨가 아무리 좋은 아이템으로 방비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100%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사실 ‘홈 스위트 홈’ 스킬 문제만 아니었더라면 희나도 절대 이런 모험을 하지 않았을 거다. 희나가 성급하게 행동했던 건 맞았다.

    “던전 산책을 나가고 싶었더라면 저나, 아니면 최소한 우민아 헌터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희나 씨를 보호해 줄 사람 정도는 동반하고 나가야지요.”

    “민아 언니는 지금 장기 토벌 중이라서요…….”

    우물쭈물 대답하자 강진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변명하지 마십시오. 희나 씨의 판단은 안일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이 쏙 빠지도록 질책했다.

    “던전에 쉽게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던전이 더 안전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에 희나 씨의 능력은 형편없이 부족합니다. 그동안의 전적을 보아, 만에 하나 희나 씨가 위험에라도 처할까 싶어 곁에 있기를 자처했는데, 이런 식으로 먼저 돌발 행동을 벌이신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네에…….”

    강진현은 그간 희나 앞에서 무른 모습만 보여 왔다.

    그래서일까, 지금 그가 보이는 엄한 모습의 격차가 더 크게 느껴져서 주눅이 들었다.

    ‘그동안 내게 정말 다정하게 대해 주고 있었던 거였구나.’

    새삼스레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예외적으로 행동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지금도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화를 내는 거긴 했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야.’

    희나는 풀이 죽어 고개를 폭 숙였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낮은 한숨과 함께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희나 씨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얽혀 있었던 건지, 이제 이해했습니까?”

    “네……. 앞으로는 이런 위험한 일이 생기면 진현 씨나 민아 언니에게 먼저 상의하도록 할게요.”

    100점짜리 대답에 강진현은 대단히 만족했다.

    “좋습니다.”

    “……그럼 제 스킬이랑 바둑이의 존재는 비밀로 해 주시는 것 맞지요?”

    조심스럽게 묻자 강진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능력이 외부에 알려지면 희나 씨만 위험해집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상황을 결코 원치 않고요.”

    희나는 이게 빈말이 아니라는 걸 퍽 확신할 수 있었다.

    강진현은 입이 무겁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희나를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희나가 없으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편히 못 잤다.

    심지어 그는 술에 진탕 취해서 희나를 자기 집에 소중히 보쌈해 갈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희나를 위험에 빠뜨릴 리 없었다.

    강진현은 왠지 모르게 짙어진 눈빛으로 희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어쩐지 그 시선에 솜털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사실 가능하다면 안전한 곳에 희나 씨를 따로 모셔 두고 싶습니다만, 희나 씨의 스킬을 생각하면 그 또한 불가능하겠군요. 공간을 열어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희나는 땀을 삐질 흘렸다.

    “아. 그게, 탈출이라뇨.”

    희나를 ‘모셔 두고’ 싶다는 표현이 ‘가두어 두고’로 치환되어 들리는 것 같은 건 그저 착각이겠지.

    불길한 예감이 더 이어지기 전에, 강진현이 말을 돌렸다.

    “어쨌건 희나 씨의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제게 도시락을 싸다 주신 것도 사실은 희나 씨의 스킬 때문이었다고요?”

    그는 공간의 조각이 없어진 걸 해명하느라고 희나가 미식계를 사용했던 일과 정전된 ‘홈 스위트 홈’의 전력을 복구하기 위해 도시락 계약을 맺었던 일을 언급했다.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정말로 집에 있는 달팽이가 낚아채 사용해 버리는 바람에 공간의 조각이 없어진 거였거든요……. 공간의 조각 대신 웬 씨앗이 생겨나 버려서 도로 가져다드릴 수가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희나 씨가 악의를 가지고 거짓을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니 괜히 마음이 찔렸다. 희나는 우물쭈물 변명했다.

    “……그때는 진현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숨길 수밖에 없었어요.”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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