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83화
챱챱챱! 팔락팔락!
바둑이가 잎사귀를 펄럭거리며 정신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몇 걸음 뒤에는 보스 몬스터가 바둑이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바둑이는 보스 몬스터가 촤앗, 촤앗, 하면서 뱉어 내는 산성 용액을 쏙쏙 피해 냈다. 아주 절묘한 몸놀림이었다.
이 다급한 와중에 시스템은 태연하게 산책 효과를 축하해 주었다. 얄미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치이이익!
산성 용액이 튀었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둑이의 잎사귀 일부분이 타들어 갔다.
바둑이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겅중겅중 뛸 때마다 뿌리에 달린 잔털들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안 돼! 바둑아!”
희나는 강진현에게 안긴 채 몸을 들썩거리며 바둑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위험합니다. 안 됩니다.”
강진현은 그런 희나를 위험 반경 바깥에 내려놓은 후, 어깨를 붙잡아 앉혔다.
“헉.”
희나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거운 방어구를 걸치고 있는데 강진현이 누르기까지 하니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저기 있는 작은 식물형 몬스터가 희나 씨에게 중요한 존재입니까?”
강진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희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바둑이는 희원의 소중한 애완식물이자, 오색이의 친구이자, 희나의 식구이기도 했다.
“그럼, 남은 이야기는 조금 후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진현은 휙 돌아섰다. 우선 보스 몬스터부터 처리한 후 바둑이의 처분을 결정할 셈인 듯했다.
제대로 된 방어구 하나 갖추지 않은 맨몸으로 몬스터 앞에 나서기에, 희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거, 이거 가져가셔야죠!”
“괜찮습니다. 희나 씨가 걸치고 계십시오.”
무뚝뚝한 대답이 들려왔다. 동시에 그의 뒷모습이 흐려졌다.
‘어디 갔지?’
희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사라진 강진현을 찾았다.
펑!
강진현이 사라진 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저 먼 곳에서 펑! 소리가 터졌다.
그와 함께 산성 용액을 뿜어내던 보스 몬스터의 한쪽 꽃잎이 우그러졌다.
같은 식물형 몬스터인 바둑이와 달리 보스 몬스터는 소리까지 지를 수 있었다.
[쌔애애애애액!]
보스 몬스터는 쇳소리를 내며 터져 나간 꽃잎 주위를 촉수로 둘러싸 감았다. 줄줄 흘러나오는 진액을 틀어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사라졌던 강진현이 몬스터의 몸체 위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는 거대한 꽃잎 위를 달리고 있었다.
강진현은 몬스터의 비틀거리는 몸체 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털어 냈다. 손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흘러나왔다.
새카만 그림자가 스치자마자 퍽! 하며 그가 올라탄 꽃잎이 터져 나갔다.
[쓰애애애액! 쌔애애애애애!]
보스 몬스터는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꽃잎 아래 숨겨 놓았던 촉수 덩굴을 쏘아 냈다. 수백, 아니 수천 가닥은 될 듯해 보였다.
하지만 강진현은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날카로운 덩굴의 끄트머리만을 쏘아볼 뿐,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희나는 저도 모르게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강진현이 당장이라도 촉수 덩굴에 꿰일 것 같았다.
‘아, 안 돼!’
메마른 비명을 내지르려는 순간이었다.
허공을 노려보던 강진현이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고요히 움직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새카만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희나는 그의 잔상을 따라 시선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 거대한 몬스터의 몸체를 뛰어넘었다.
강진현은 몸을 허공에 붕 띄운 채 양손을 모아 잡았다. 그러자 그의 주먹을 타고 검은 기운이 이글이글 타고 올라와 길쭉한 검 모양을 이루었다.
‘아이템인가? 아니면 고유 스킬?’
생각할 때였다.
우웅!
공기가 떨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먹을 타고 올라온 새카만 기운이 거의 3m가 넘는 길이로까지 증폭했다. 압도적이리만치 거대했다.
거대한 건 그 크기뿐만이 아니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그대로 천공을 반쪽 내 버릴 수 있을 것처럼 대단했다.
타다닥! 탓!
반쯤 입을 헤벌린 채 강진현의 무위를 지켜보고 있는 사이, 바둑이는 보스 몬스터의 공격 범위 밖으로 벗어났다.
“이리 와! 바둑아!”
희나는 은신의 로브를 슬쩍 벗고 손을 흔들었다. 바둑이는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어린아이처럼 헐레벌떡 희나의 곁으로 뛰어왔다.
“내가 집으로 가랬잖아! 어쩌다가 저런 걸 데리고 왔어?”
희나는 숨죽여 바둑이를 혼내면서도 이리저리 살폈다. 혹시나 뿌리나 잎사귀가 더 상한 곳은 없을까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다행스럽게도 바둑이는 잎사귀 하나를 태워 먹은 것을 제외하고는 무사해 보였다. 얼마나 정신없이 뛰어왔는지 온 몸체가 진흙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바둑이는 추격전의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몸을 들썩거리며 희나를 더 먼 곳으로 끌고 가고자 했다.
마치 ‘여기는 위험하니 빨리 도망가요.’ 하고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바둑아, 진정 좀 해. 괜찮아. 이제 안전해. 쉬, 쉬. 진정해.”
희나는 전투 중인 강진현을 가리키며 바둑이를 진정시켰다.
“위험하지 않아.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어. 저 사람은 강해. 우리를 구해 줄 거야.”
강진현은 자신에게 쇄도해 오는 보스 몬스터의 촉수 넝쿨을 잘라 내고 있었다.
희나는 전투라고는 문외한이었지만, 적어도 그가 수세에 몰린 게 아닌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집채만 한 몬스터에 비하면 턱없이 자그마하게 느껴지는 인간, 강진현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몸짓이 저렇게 여유로울 리가 없어.’
그는 거침이 없었다. 모든 움직임은 의도가 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그와 동시에 손속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치 광폭했다.
쿠궁, 궁!
어느새 보스 몬스터는 몸을 지탱하던 촉수 넝쿨을 거의 잃은 채 몸체를 비틀거렸다.
거대한 꽃봉오리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렸다. 속수무책으로 수많은 팔다리를 잃어 갔다.
강진현은 그런 보스 몬스터를 향해 뛰어들었다. 쏜살같은 움직임이었다.
보스 몬스터의 주변을 맴돌며 넝쿨을 잘라내고 중심축을 비틀던 강진현은 벌어진 꽃봉오리 틈으로 거대한 칼날을 박아 넣었다.
이미 3m에 육박했던 검신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었다.
마침내, 뻗어 나간 검 끝이 보스 몬스터의 목구멍 가장 깊은 곳을 찔러 들어갔다.
[쐐애애애애애액! 커억!]
몬스터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허공에 산성 용액을 뿜어냈다.
‘앗……!’
희나는 산성 용액이 튈까 봐, 로브를 깊숙이 덮어썼다.
[케에에에엣!]
하지만 강진현이 무게 중심을 절묘하게 비틀어 놓은 덕에, 보스 몬스터는 희나가 앉아 있는 쪽의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파아아앗!
강진현은 쓰러지는 몬스터를 칼로 한 번 더 그었다.
푸쉬식, 소리와 함께 산성 증기가 강진현의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진현 씨!”
희나는 비명을 질렀으나, 강진현은 익숙한 듯 얼굴을 옷소매로 가렸다. 그리고 산성 증기로 가득 찬 공간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쿵!
동시에 육중한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완전히 쓰러졌다.
보스 몬스터의 사체는 저 멀리 빽빽한 정글 숲을 깔아뭉갰다. 나무들은 몬스터의 거대한 몸체에 깔려 부서졌고, 이끼 낀 축축한 토양은 흘러나온 산성 용액에 녹아 마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죽었나?”
몬스터가 완전히 쓰러지자마자 희나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물론 희나의 이성은 그 대단하다는 S급 헌터가 쉽게 다쳤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멀리서 보이는 강진현의 모습은 아주 침착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동시에 몬스터가 뿜어낸 산성 용액에 노출되는 장면 또한 목격한 터였다. 그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다쳤으면 어쩌지? 나한테 방어구를 전부 주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희나는 몸에 걸친 방어구를 낑낑 끌며 한 발짝 두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꽃봉오리를 갸웃거리던 바둑이도 희나를 따라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그런 희나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손짓이 있었다.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익숙한 온기였다. 희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현 씨?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강진현은 수통에 있는 물을 머리에서부터 쏟아부은 듯 상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갑작스레 상의를 탈의했다.
‘엄마얏!’
뜬금없는 속살 공개에 희나는 놀라 눈을 가렸다.
물론 손가락 사이가 숭숭 벌어져 있어 시야를 거의 가리지 못하기는 했지만, 예의상 가리긴 했다.
‘우와…….’
희나는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강진현은 남녀를 떠나 누구라도 선망할 법한 강인한 육체를 가졌다. 단단한 몸체에는 매끄러운 근육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옅은 흉터의 흔적들이 그의 지난 삶이 퍽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키가 크다고는 생각했지만, 옷 아래에 감추어진 근육들이 이렇게까지 발달해 있을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희나는 눈알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다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 그런데 진현 씨, 갑자기 왜 오, 옷을?”
“상체에 산성 증기를 뒤집어썼습니다. 물로 대강 씻어 내긴 했지만, 희나 씨의 피부에 닿으면 상처를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희나의 물음에 대답하며 탈의한 옷을 한곳에 뭉쳐 던졌다.
옷가지는 수풀 위로 떨어지며 ‘치이이’ 하는 소리를 냈다. 수풀의 나뭇잎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소리였다.
‘세상에나…….’
살벌한 광경이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