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81화
“뭐 그건…….”
10년을 돈, 돈, 하면서 살았는데 막상 큰돈이 주어지니 실감이 안 난다는 말.
그 말에 희나는 공감했다. 그래서 희나도 회사를 다니면서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네가 새 아파트 받아 온 후로부터 계속 꿈만 같아. 생계를 위해 치열하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희원이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미래 걱정 없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자 행복인가?
“부모님이 하늘에서 우리 도와주시고 있나 봐.”
희나는 평소라면 꺼낼 리 없는 감상적인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희원은 그런 동생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부모님을 여의고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던 열다섯 살짜리 동생은 어느새 어엿한 스물다섯의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희나야, 그동안 고생 많았지?”
“고생은 뭘……. 오빠가 나까지 부양하느라 힘들었겠지.”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더니, 우리도 이제 팔자 폈네. 편하게 살자. 그동안 해 보고 싶었던 것도 많이 해 보고, 넉넉하고 여유롭게 살자.”
남매는 조곤조곤 마음속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오색이와 바둑이는 그들의 곁에 붙어 앉아 그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 * *
짧은 시간 사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집들이를 했고, 바둑이가 거대해졌으며, 희원의 땅콩으로 큰돈을 단숨에 벌어들였다.
참고로 희원은 땅콩 볶는 수고비로 억 단위의 금액을 제시했지만, 가족끼리 돈 오가는 게 귀찮다는 이유로 희나에게 호의를 거절당했다.
‘오빠가 고생해서 키운 땅콩인데 마지막에 숟가락 좀 얹었다고 돈 받는 것도 이상하잖아. 가족인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그 와중에도 희나는 바둑이 산책 퀘스트를 꾸준히, 조금씩 진행하고 있었다.
위험할 줄만 알았던 산책 퀘스트는 여러모로 안전하고 평온하게 진행됐다.
가장 위험한 보스 몬스터는 ‘내 집은 어디에’ 스킬을 사용해서 피하면 됐다. ‘홈 스위트 홈’의 문, 던전 게이트, 보스 몹의 위치를 나타내 주는 스킬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강진현에게 빌린 로브가 큰일을 했다. 은신의 로브를 입고 조용히 이동하면 어지간한 조무래기 몬스터들의 시야는 죄다 피해 갈 수 있었다.
덕분에 희나는 집들이 퀘스트로 받은 방어의 팔찌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조용히 산책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산책 나갈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길까 안절부절못했던 희원마저 덤덤해졌을 무렵이었다.
희나와 바둑이는 풀숲이 무성한 정글형 던전을 산책하고 있었다.
“신나는 건 아는데, 너무 멀리까지는 떨어지지 마!”
바둑이는 주변에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친구들이 잔뜩 있는 게 흥겨운 모양이었다. 희나의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한 속도로 정글 안을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녔다.
바닥을 이곳저곳 파헤쳤고, 뿌리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도 했다. 정글 속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날름날름 잡아먹으며 간식거리 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바둑이는 꽤 힘이 셌다. 어지간한 몬스터들에게는 눌리는 법이 없었다.
커다란 몬스터들은 덩굴이나 잎사귀로 싸다구를 쳐 날려 버렸고, 작은 것들은 종종 잡아먹기도 했다.
“엄청 신났네…….”
희나는 그런 바둑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자기의 싹을 틔워 준 사람이어서일까? 바둑이는 희원을 유독 따랐다.
희원이 없으면 뿌리를 동동 구르며 불안해했고 온종일 희원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느라 바빴다.
‘그런데 요즘은 나한테도 살갑게 굴고……. 산책하는 걸 무척 좋아하는구나.’
한 번, 두 번, 세 번…… 던전 산책 퀘스트를 진행하며 바둑이는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엄마를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 같았던 모습은 사라지고, 희원 없이도 곧잘 지냈다. 몇 번의 산책으로 자신감과 자립심이 생겨난 것 같았다.
더불어 희나를 향한 호감도도 담뿍 오른 듯, 근래 들어 희나를 부쩍 따르기 시작했다.
‘오빠는 귀여운 내 새끼가 바뀌었다고 억울해하지만…… 나는 이편이 더 좋아.’
애교 피우는 바둑이는 생각보다 귀여웠다. 식물이 움직이다니, 징그럽다고 생각했던 건 옛일이었다.
물론 희나의 관심을 빼앗긴 오색이는 다소 언짢아 보였지만, 위대한 주택 관리자답게 바둑이의 행태를 눈감아 주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 「본인 = 대인배」라며 희나에게 스리슬쩍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둑아! 위험한 데는 가지 말고, 재밌게 놀고 있어!”
희나는 신이 난 바둑이를 마음껏 풀어놓은 채 이끼 낀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은신의 로브에는 방수 기능도 있는지 축축한 이끼 위에 앉았음에도 엉덩이가 보송보송했다.
‘내일 점심이랑 저녁은 뭐 먹는담? 뭐 하지?’
마침 강진현이 던전 토벌에 나가 있는 시즌이었다. 덕분에 희나는 아주 널널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밥 차려 주고 챙겨 줄 상대도 없겠다, 시간 날 때 땅콩을 다글다글 볶아 내는 일 빼고는 아주 한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없을까?’
회사에서는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생산적인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벅.
흙 밟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바둑아, 다 놀았어? 그러면 이제 갈까?”
희나에게 다가올 존재라고는 바둑이밖에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있는데…….
“……희나 씨?”
예상치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고개를 드니, 앞에는 흐느적거리는 애완식물 대신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희나는 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주, 아주, 잘.
“……진현 씨?”
강진현이었다.
“희나 씨가 어떻게 여기에? 이 던전은 분명히 저 혼자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몹시 놀란 듯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희나도 아주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뭐, 뭐야! 여기 진현 씨가 들어와 있던 던전이었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던전 중에서, 하필이면 지금 강진현이 공략 중인 던전에 들어왔다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은신의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왜…… 아차, 이건 A급 로브였지. 진현 씨는 S급이라서 A급 은신의 로브로는 몸을 숨길 수 없었구나.’
하필이면 은신의 로브가 통하지 않는 세상에 몇 없는 S급 헌터, 그것도 희나와 안면이 있는 강진현과 마주칠 줄이야.
“아, 안, 안녕하세요.”
희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물론 머릿속에서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수십 가지 변명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걸 어쩌지?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우연히 떨어졌다고 얘기해야 하나? 이번에도?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세 번 연속 같은 사람과 같은 던전에 떨어지는 게 가능한 걸까?’
희나의 머리와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사이, 강진현은 한달음에 달려와 희나의 어깨를 붙잡고 질문을 쏟아부었다.
“희나 씨? 어쩌다 이곳에 떨어지게 된 겁니까? 지난번과 같은 이상한 조각 때문입니까? 아니면 또 회사에서 게이트 폭발에 휘말리셨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희나의 몸에 다친 곳이 없나 이리저리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은신의 로브를 입고 계시군요. 잘하셨습니다. 희나 씨에게 은신의 로브를 맡겨 두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요. 이건 희나 씨께 드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희나 씨는 던전 사고에 너무 자주 휘말립니다. 몸을 보호할 것이 필요합니다. 이곳에서 나가면 희나 씨가 쓰실 만한 무기도 장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줄줄 말을 이어 나갔다.
희나는 강진현이 이렇게 말을 길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인 걸 처음 알았다.
“아, 그게…….”
희나는 말을 더듬었다. 던전 사고에 휘말린 것이 아니라 자의로 던전에 들어온 것이었으므로 몹시 마음이 찔렸다.
“……여기 혼자 들어오신 거예요? 보스는 잡으셨나요?”
“예. 솔로 플레이 중입니다. 보스 몬스터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곳은 위험하니 저와 함께…… 아니, 우선 이것부터 착용하십시오.”
강진현은 자신이 입고 있던 방어 장비를 하나하나 벗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희나의 어깨에, 팔에, 다리에 하나하나 채워 주었다. 세심한 손길이었다.
“이건…….”
“물론 제가 지켜 드리겠지만, 만에 하나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방어구를 두르고 있는 편이 나을 겁니다.”
“진현 씨는요? 저한테 이거 다 벗어 줘서 맨몸 되셨잖아요.”
“괜찮습니다. 여기서 더 벗어도 됩니다. 희나 씨의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진짜로 그는 희나가 요청하면 겉옷부터 속옷까지 다 벗어 줄 기세였다. 물론 희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하지만 이건 너무 무거운데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강진현의 방어구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몇 킬로그램짜리 아령을 팔다리에 찬 것처럼 무거웠다.
스탯이 꽤 올라서 일반인보다는 근력이 좋을 텐데도 그랬다.
희나는 낑낑거리며 팔을 올렸다. 로브 안쪽에 감춰져 보이진 않겠지만 초라한 알통이 볼록 솟아오른 것도 느껴졌다. 그 정도로 무겁고 힘겨웠다는 의미다.
‘설마 이것도 로브 찢은 것처럼 부숴 버리진 않겠지?’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강진현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타박타박, 챱챱챱 하는 경망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헉! 바둑이!’
그제야 희나는 바둑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강진현을 갑자기 만난 탓에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 어, 어쩌지?’
희나가 바둑이의 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강진현은 이미 바둑이의 존재를 눈치채고도 남았을 테다.
실제로 그는 희나에게서 눈을 떼고 어느 한 지점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주먹까지 꽉 말아 쥔 채였다.
텁텁, 터벅터벅, 챱! 챱챱!
희나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둑이가 가까워져 오는 걸 바라보았다.
바둑이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르는 듯 희나를 향해 신나게 달려오고 있었다.
‘안 돼! 당장 도망가! 아는 척하지 마!’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