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80화
“떠본 건 미안해요. 생땅콩만 납품받기에는 조금 아쉬운 게 있어서 그랬지. 이 팀장 손 거치면 6시간짜리 품질이 보장되는 걸 알다 보니까.”
희원은 길드장의 에두른 말뜻을 금방 알아챘다.
“그러니까 생땅콩이 아니라, 희나가 직접 볶은 땅콩을 납품받고 싶으시단 말씀이십니까? 한 알에 6시간짜리 효과를 가진 것으로?”
희나는 오빠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손까지 거쳐서?’
생각지 못했던 거래 조건이었으나, 어찌 생각하면 당연했다. 이왕 매입하는 거, 돈이 조금 더 들더라도 고품질의 물품을 원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마침내 김규희 길드장이 패를 내보였다.
“이 팀장이 후처리까지 해 준다면 100g당 2000만 원을 제안할까 해요.”
그 제안에 희원은 동생을 힐끔 바라보았다. 희나는 냉큼 대답했다.
“난 괜찮아. 아니, 좋아.”
어차피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곤 강진현에게 밥 차려 주고 침낭에 ‘안락한 침상’ 스킬을 걸어 주는 것밖에 없었다. 남는 게 시간이었다.
희나의 흔쾌한 허락에도 희원은 조금 탐탁잖은 듯 혀를 찼다.
“땅콩 껍데기 까고, 볶고…… 제 동생 품이 너무 많이 듭니다. 2500만 원으로 하고, 땅콩 껍데기는 청룡 길드 측에서 제거해 넘겨주는 것으로 하죠.”
그러면서 희나와 슬쩍 눈을 마주쳤다. ‘이러면 할 만할 것 같냐, 괜찮냐?’ 하는 물음이었다. 당연히 할 만했다.
‘땅콩 볶기로 소일거리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희원의 말대로 땅콩 껍데기를 까는 게 손이 아파서 좀 힘들었지, 볶는 건 재미있었다.
“이 팀장 손으로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아도 괜찮으려나 싶은데.”
김규희 길드장의 물음에 희나는 뺨을 긁적였다.
“요리라고 부르기는 좀 민망하지만…… 제 요리 스킬을 받아서 땅콩에 시너지 효과가 붙은 것 같거든요. 마지막 단계만 제가 담당해도 6시간 효과는 똑같이 날 것 같아요.”
추가로 설명을 덧붙이자 김규희 길드장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지.”
처음에 조금 삐거덕거리는 것처럼 보였던 걸 제외하면, 땅콩 협상은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희나와 희원 남매는 청룡 길드에 볶은 땅콩을 독점적으로 공급해 주기로 계약했다.
청룡 길드는 그 대가로 100g당 2500만 원의 가격을 지불하며, 이 모든 사항을 비밀에 부쳐 줄 것을 약속했다.
혹여나 정보가 새어 나가 남매의 신변이 위험해진다면, 후처리와 뒷감당 또한 모두 맡아 주기로 했다. 이것 또한 희원의 제안이었다.
이외의 자잘한 조건들은 마저 조율해야겠지만, 어쨌건 양측 모두 만족할 만한 협의였다.
상황을 정리한 후, 김규희 길드장이 다리를 반대로 꼬아 앉으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이희원 씨는 더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희나와 희원은 시선을 교환했다.
이제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마침 비밀을 지키기 위해 희나도 최대한 땅콩 이외의 생각은 하지 않고 있던 차였다.
희원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재배하고 있는 작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땅콩 말고요.”
“호오.”
김규희 길드장이 호기심을 보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키우는 다른 작물도 땅콩처럼 특별한 효능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 섭취 시 한시적으로 스탯이 증가하는 등의 효능이요.”
“……뭐라고?”
그 대답에 길드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희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이희원 씨의 작물이 일종의 능력치 증가 포션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희원의 등급은 D급에 불과하였지만, 깡만은 보통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희원은 김규희 길드장의 기세에 물러서지 않았다.
긴장감 팽팽한 분위기에 희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증거를 원하신다면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어린 시금치 잎을 꺼내어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손톱만 한 크기의 풀은 정말 볼품없어 보였다. 하지만 김규희 길드장은 신중한 태도로 어린잎을 들어 살폈다.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아마도 길드장은 시금치 설명 창을 읽고 있을 테다.
<덜 자란 시금치(C): 아직 성장 중인 시금치. 아직 효과가 미약하다. 섭취 시 근력이 30초 동안 +1만큼 증가한다. 특별한 손길이 닿아 조리했을 경우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시스템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건 모든 각성자들이 믿는 제1 명제였다.
헌터들은 시스템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어떤 원리로 나타나 어째서 도움을 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시스템은 단 한 번도 그들을 속인 적이 없었다.
‘사실을 전부 말해 주지 않아서 덤터기를 씌운다거나, 주택 사기를 치기는 하지만…….’
물론 희나는 시스템에 개인적인 원한이 좀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헌터들에게 시스템은 전능하고 완벽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런 시스템이 보여 주는 설명 창이니, 길드장에게 희나와 희원이 백 번 천 번 설명하는 것보다 이 한 번의 접촉이 훨씬 설득력 있을 게 분명했다.
“이건…….”
김규희 길드장이 조금 커진 눈으로 어린 시금치 잎을 내려다보았다. 늘 여유로운 태도를 보여 주었던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아직 덜 자란 상태라 효과가 미미합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키워 내면 이보다 더 대단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포션보다 저렴한 가격에 공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땅콩처럼 희나의 손길이 닿으면 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테고요.”
“흠…….”
희원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시금치 외에도 아직 싹이 트지 않은 작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각각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을지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 청룡 길드가 한번 투자해 보기에는 아깝지 않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희원 씨 말은, 땅콩 외의 생산 품목도 우리 길드와 거래하고 싶다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희원은 차분하게 대답했고, 희나는 곁에 앉아 몸을 움츠렸다. 긴장 때문이었다.
‘청룡 길드와 전속 계약을 맺지 않으면 상황이 복잡해질지도 몰라.’
금전적으로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남매는 비밀을 지켜 줄 거래처를 구하는 게 더 중요했다.
거기다 희나는 거절당한 후의 대안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른 길드에라도 가서 중간 쿠션을 끼고 거래를 진행해야 하나?’
물론 희원은 이 건으로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며 가슴을 미리 탕탕 쳐 두었다.
그런고로, 희원은 거절당했을 경우에 대비해 다른 대안을 생각해 두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흠. 그래. 비밀과 안전을 담보로 우리 길드와의 전속 계약을 진행하겠다라…….”
김규희 길드장이 운을 뗐다.
희나는 두근두근한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녀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좋아요. 이런 좋은 아이템을 다른 길드에 빼앗겨 버릴 수는 없지.”
그러면서 김규희 길드장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희나와 희원의 손을 차례로 잡아 악수하고는 말했다.
“이희원 씨가 생산하는 품목들은 우리 길드에서 모두 매입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관련해서는 철저한 보안을 약속드리지요. 품목당 가격은 작물이 모두 성장하고 완전한 효과를 확인한 후에 결정하는 것으로 할까요?”
“좋습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겠군요.”
희원이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희나 또한 길드장의 제안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길드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우리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좋은 거래 상대를 소개해 줘서 고마워요, 이 팀장. 대단한 오빠를 두었군요. 담대하고 유능해.”
무려 청룡 길드의 길드장이 꺼낸 칭찬이었다. 심장이 찌릿할 정도로 뿌듯했다. 오늘처럼 오빠가 멋지게 느껴진 날도 없었다.
희나와 희원은 마석으로 남은 계약을 치르고 뿌듯한 마음을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이야, 돈 들어왔다.”
희원이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주었다. 통장 금액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이게 몇 자리 숫자야……?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일억…… 헉, 0이 아홉 개나?”
희나는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열 자리 숫자라니. 소시민에게는 천문학적이나 다름없는 숫자였다.
“땅콩 팔아서 이만큼을 벌었다고?”
그것도 이 어마어마한 금액을 땅콩 한 포대를 가지고 벌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 이제 현금 부자다.”
희원이 행복하게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집 안을 굴러다녔다. 그 꼴을 보던 바둑이도 커다래진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함께 굴렀다.
오색이는 한 사람과 한 식물의 작태를 이렇게 평했다.
「총체적 난국.」
희나도 오색이의 의견에 동의해 주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놀라움이 먼저였다. 희나는 굴러다니는 오빠를 발로 턱, 멈추어 세웠다.
“와……. 오빠, 이제 농사 안 짓고 놀고먹어도 되는 것 아냐?”
희원이 새삼스러운 것을 묻는다는 듯 답했다.
“아닌데. 계속 농사지을 건데. 애당초 돈 벌려고 농사지은 것도 아니고……. 농사짓는 거 되게 재밌어. 돈도 돈이지만, 한번 수확해 보니까 이거 못 끊겠더라. 내가 기른 녀석들을 수확하는 거, 쾌감이 엄청나. 키우는 과정도 즐겁고 말이야. 거기다 돈까지 생기니 금상첨화, 일석이조지.”
그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앉아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사실, 들어온 돈이 너무 커서 실감이 별로 안 나. 내 돈 같지가 않다고 해야 하나? 나는 큰일 없는 한 앞으로도 너랑 평범한 투 룸에서 늘어진 티셔츠 입고 바닥 굴러다니면서 살 텐데…….”
“오빠 무슨 도 닦는 사람처럼 말한다.”
“솔직히 너도 그렇잖아? 아직도 마트 세일 품목 구경하는 게 취미면서.”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