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79화
“그래. 네 말대로 명색이 히든 클래스 농사꾼인데,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그 말과 동시에 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밭 가서 한번 확인해 보자.”
남매는 밭으로 이동했고, 희원은 손톱만 한 크기의 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건 뭐야?”
희나도 오빠 옆에 앉으며 이 잡풀처럼 생긴 것의 정체를 물었다.
“시금치야. 얼마 전에 씨 뿌렸어.”
희원이 흐뭇한 눈길로 푸릇하게 올라온 시금치 싹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어?’ 하고 시금치를 요리조리 살폈다.
“왜 그래, 오빠? 문제라도 있어?”
사실 희나 생각대로 이건 시금치가 아니라 잡초였던 걸까? 궁금해하는데 희원이 소리쳤다.
“이것도 설명 창이 뜬다. 얼마 전까지는 없었는데?”
희나는 깜짝 놀라 희원의 부주의함을 탓했다.
“뭐? 명색이 농사꾼인 주제에 여태 이런 설명 창이 뜨는 것도 몰랐어, 오빠는?”
그러자 희원이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얼마 전까지는 이런 내용까지는 안 떴거든. 애당초 바둑이가 비료 뿌려 주기 전에는 잘 자라지도 않았…… 아!”
중얼거리던 희원이 무엇인가 깨달은 듯 벌떡 일어섰다.
“바둑이 비료!”
희나는 바둑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가루들을 떠올렸다. 예쁜 똥 가루였다.
“바둑이 비료가 왜?”
“바둑이가 밭에 비료를 뿌리기 시작한 이후로 작물이 쑥쑥 자라기 시작했잖아.”
“맞아. 그랬지.”
작물뿐만 아니라 잡초도 쑥쑥 자라기 시작해서 희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었다.
“그 이후론 할 일이 많아져서 작물 상태 창을 한 번도 확인해 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그런데…… 이 효능은 바둑이가 비료를 주면서 생겨난 것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오빠의 농사 스킬과 바둑이의 비료 덕분에 생겨난 효능이란 거야?”
“맞아.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래. 바둑이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작물일 뿐이었어.”
이제 희원은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희나는 희원의 판단에 납득하며 작은 시금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설명 창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바라보자 정말로 눈앞에서 글자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덜 자란 시금치(C): 아직 성장 중인 시금치. 아직 효과가 미약하다. 섭취 시 근력이 30초 동안 +1만큼 증가한다. 특별한 손길이 닿아 조리했을 경우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땅콩도 그랬는데…….’
어쩌면 던전에서 키운 작물들은 모두 상태 창을 확인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희나는 눈앞에 뜬 글자를 천천히 읽었다.
“덜 자란 시금치…….”
이 시금치를 먹으면 근력 스탯이 일시적으로 1 증가한다고 쓰여 있었다. 아직 덜 자란 시금치라 효능이 완전하지 않은 듯했다.
“아무튼, 이거 장난 아닌데?”
아무리 헌터 상식에 무지한 희나라고 해도 이 시금치가 보통이 아니란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각성자의 스탯을 올리는 방법은 몇 가지 없었다.
첫째로 각성자 스스로 랭크 업을 하여 전체 스탯을 올리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각성자의 등급은 거의 타고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랭크 업은 실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둘째로는 아이템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스탯을 올려 주는 아이템을 착용하여 능력치를 올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아이템은 몹시 희소한 데다 값비쌌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포션을 마시면 됐다. 보통 헌터들은 이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포션을 마심으로써 스탯을 증폭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단점이 있다면 포션으로 인해 증가한 능력치는 한시적으로만 지속된다는 점이었다.
“이거, 거의 포션급인 거잖아!”
희나는 작게 감탄했다.
이렇게 조그마한 시금치의 효능이 이 정도인데, 시금치가 다 자라면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보여 줄지 기대됐다.
‘거기다 특별한 손길이 닿으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건 아마 내 요리 스킬을 말하는 거겠지?’
희원이 기른 시금치를 희나가 요리하면 어지간한 포션 못지않은 음식이 탄생한다는 뜻이었다.
“희나야, 우리 대박 났다. 정말.”
희원 또한 희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진짜 이건 금이다 금!”
이건 큰돈이나 귀찮은 일 따위엔 관심 없다던 희원까지 놀라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희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진짜로 이건 밖에 직접 내다 팔면 안 되겠다. 우리 깜냥을 훨씬 넘어서는 물건들이야. 청룡 길드랑 비밀 서약 맺고 거래해야겠어.”
* * *
희원이 희나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이야. 역시 청룡은 다르긴 다르다. 엄청 크고 좋네. 알고는 있었지만…… 너, 좋은 회사 다니는구나?”
남매는 지금 청룡 길드 최상층에 와 있었다. 희원의 농작물 건으로 계약을 하기 위해서였다.
“오빠,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허튼 생각 하지 말고.”
길드장실로 걸어가며 희나는 희원에게 신신당부했다.
길드장은 생각을 읽는 스킬을 가진 사람이니, 비밀로 삼고 싶은 일들은 되도록 생각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래, 그래. 알았어. 너는 너무 잔걱정이 많아.”
“그러는 오빠는 너무 태평해서 문제야!”
둘은 티격태격하며 길드장실 앞에 도착했다. 똑똑, 노크를 하니 금방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팀장? 들어와요.”
‘이 팀장’이라는 호칭이 우스운지 희원이 키득키득 웃었다. 하여간 긴장감이라고는 쥐뿔도 없었다.
“어서 와요.”
김규희 길드장은 남매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땅콩 매입가는 100g당 600만 원 정도로 책정하면 어떨까 싶은데. 대략 한 알에 6만 원꼴로 쳐주는 셈이야.”
엄청난 가격에 희나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사이, 희원이 넉살 좋게 받아쳤다.
“에이. 너무 후려치십니다.”
“후려치다니? 흥미로운 의견인데.”
희원은 사자처럼 눈을 빛내는 길드장이 무섭지도 않은지 술술 입을 놀렸다.
“땅콩 한 알에 식사 한 끼 대용으로 쓸 수 있는 데다 인벤토리에 넣어 휴대할 수 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그 이상은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오빠?”
희나는 김규희 길드장의 눈치를 살피며 오빠의 옆구리를 찔렀으나, 희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던전 부산물의 가치를 아시지 않습니까? 100g에 600만 원이라니…… 헐값 중의 헐값입니다. 청룡 길드 이름값이 있는데, 설마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한 우리 남매를 털어먹을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도리어 진정하기는커녕 한술 더 떠서 길드장을 도발하기까지 했다.
이에 길드장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털어먹는다라……. 표현이 재미있군요. 하나, 이희나 팀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콩은 포만감이 한 알에 한두 시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아요.”
“한 알 먹으나, 세 알 먹으나 한 끼 식사보다 부피가 적은 건 매한가지지요. 건조 식량 따위보다 에너지 효율도 훨씬 좋을 건 당연하고요. 거기다 인벤토리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식량이래야 아직은 몬스터 고기로 만든 육포 정도가 전부입니다. 끔찍할 정도로 맛없는 데다 허기마저 별로 채워 주지 못하죠. 그걸 생각하면 이 땅콩은 혁신이나 다름없습니다. 장기 토벌에서 가장 문제 되는 것이 헌터들의 식량 문제라는 거, 다 아시지 않습니까?”
밑바닥 헌터 생활을 했던 희원은 알았다. 다른 물건들은 던전 부산물로 제작해 인벤토리에 저장하면 됐지만, 식량만은 그럴 수 없었다.
식량은 헌터들의 짐이 되었고, 기동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장기 토벌에서는 따로 식량을 나를 짐꾼까지 필요할 정도였다.
‘나만 해도 상급 헌터들의 짐꾼으로 던전을 자주 들락거렸으니까.’
하지만 희원의 땅콩을 던전 공략에 도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짐꾼 인원을 감축하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무엇보다 등급 낮은 짐꾼들의 안전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어지니 공략 효율은 높아질 겁니다.”
희원은 손가락을 꼽아 가며 자기가 키운 땅콩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가졌는지 설득했다.
곁에서 보는 희나마저 잠시 길드장의 존재를 잊고 희원의 말에 빠져들었을 정도였다.
‘오빠가 이렇게 거래에 익숙한 사람이었던가?’
희나는 오빠가 보이는 의외의 일면에 깜짝 놀랐다.
늘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하며 허허 웃고만 다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주 노련한 데다 세상 물정에 빠삭해 보였다.
‘하긴, 오빠는 D급이긴 했어도 10년 동안이나 헌터 일을 했지.’
낮은 등급, 심지어 비전투계 직업으로 악착같이 살아남은 희원이었다. 보통 악바리가 아니면 그만한 생존력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빠…….’
희나는 오빠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을지 생각했다. 마음 한켠이 찡해졌다.
“저희 남매 호구 아닙니다. 희나한테 아쉽지 않게 대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면서요? 괜히 떠보지 마십쇼.”
희나가 감상에 빠진 사이, 희원은 할 말을 끝마치고는 어깨를 쫙 펴고 앉았다. 무려 상대는 청룡 길드장인데도, 무엇 하나 꿀릴 것 없다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다.
‘대단해! 오빠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희나는 마음속으로 그런 희원에게 손뼉을 쳐 주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오빠가 멋있게 느껴졌다.
“이 팀장, 오빠 잘 뒀네.”
다행스럽게도 김규희 길드장 또한 그의 당돌한 태도를 유쾌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