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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77화 (77/228)
  • 던전 안의 살림꾼 77화

    덕분에 희나의 사무실 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소문을 들은 헌터 모두가 희나와 희원 남매의 땅콩을 사러 몰려들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난리들인 거야? 그렇게 맛이 좋나?’

    정작 땅콩의 효능을 알아야 할 판매자인 희나만 그 까닭을 몰라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거기다가 헌터가 하나 다녀갈 때마다 꼭 어딘가에 마석이나 하급 포션 따위가 생겼다. 그중에는 꽃이나 초콜릿, 사탕 따위의 영문 모를 선물도 섞여 있었다.

    ‘청룡 길드 헌터들은 손버릇이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걸까?’

    물론 물건을 훔쳐 가는 게 아니라 두고 가는 게 문제지만, 장본인을 당황시킨다면 손버릇이 나쁜 축인 건 맞았다.

    바쁘게 땅콩을 팔면서 사내 게시판에 분실물 리스트라도 작성해 올려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모두 자리를 비워 주십시오.”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얼굴이 나타났다. 인사팀장 강목현이 복작거리는 희나의 사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왜! 마저 좀 사고 나갑시다!”

    “힘으로 밀지 마! 으아악!”

    늘씬하고 인텔리전트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강목현의 힘은 꽤 우악스러운 듯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헌터들이 악악거리며 밀려나기 시작했다.

    “다들 얼굴 기억해 두었습니다. 1분 안에 자리를 비워 주지 않으면 다음 인사 평가에 불이익이 있을 겁니다.”

    거기다 이렇게 엄포까지 놓자, 헌터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쭈뼛거리며 하나둘, 물러났다.

    “에이 씨.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내 차례였는데.”

    “밴댕이 소갈딱지 인사팀장 같으니라고.”

    “욕했다가 후환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는 너도 목소리가 들으라는 듯 크다?”

    다들 물러나면서 투덜투덜 한마디씩 남기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쉽다는 듯 눈에는 미련이 철철 흘렀지만, 그보다는 인사팀장의 권위가 두려운 듯했다.

    희나는 제멋대로에 말썽쟁이인 헌터들을 한 손에 휘어잡는 인사팀장 강목현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무릇 팀장은 저런 카리스마를 보여야 하는 건가? 물론 그렇다면 희나는 팀장 직위를 당장 내려놓아야 할 테지만.

    그렇게 마지막 헌터 한 명까지 희나의 사무실을 떠나고 난 후.

    “강 팀장 덕분에 금방 소란이 가라앉았지?”

    등 뒤에서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희나는 앉은 채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악! 깜짝이야!”

    “아차. 이 팀장, 미안. 나 좀 봐. 기척을 안 풀어놓고 있었네. 놀랐어?”

    “……기, 길드장님?”

    김규희 길드장이었다.

    “나까지 등장하면 일이 너무 커질까 봐 인사팀장한테 대신 정리 좀 맡겼어.”

    그녀는 태연하게 등장해 희나의 책상 위에 쌓인 땅콩을 만지작거렸다.

    강목현 인사팀장은 예상했다는 듯 희나의 사무실 문을 닫아 잠갔다.

    달칵, 하고 잠금쇠 잠그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문은 왜 잠그시는……?”

    의미심장한 행동에 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문 잠그고 나한테 몰래 뭘 하려고 하는 거야?’

    바라본 강목현 인사팀장의 표정이 유난히 무표정했다.

    희나는 고개를 홱 돌려 김규희 길드장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눈빛이 서늘한 것 같기도 했다.

    뱀 앞에 선 쥐의 기분이 이러할까? 몸이 절로 쪼그라들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한참 동안 희나의 눈을 바라보던 김규희 길드장은 어느새 손님용 소파로 걸어가 다리를 꼬아 앉았다.

    “예, 예에.”

    희나는 쪼로록 달려가 그녀가 손짓하는 자리에 앉았다. 길드장의 반대편 소파였다.

    ‘길드장님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거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잘 움직이지 않는 길드장이었다. 그런 길드장이 친히 희나의 사무실에 행차하다니,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이게 무슨 일인가, 고민하던 찰나에 김규희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이 팀장이 길드 안에서 땅콩을 판매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길드장의 입에서 나온 주제는 바로 ‘땅콩’이었다.

    ‘헉. 무슨 문제라도 있나? 팔면 안 되는 건가? 그런데 인사팀장님은 괜찮다고 해 주셨는데?’

    그 질문에 희나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요동쳤다.

    “그, 이런 말씀 드리는 건 되게 변명 같을 수도 있는데……, 인사팀장님께 허락받은 사항이라 팔아도 되는 건 줄 알고 있었는데요.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당장 시정하겠습니다.”

    일단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희나는 납작 엎드렸다. 좀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사장이 안 된다는데…….

    그러면서 혼자서 뒤집어쓸까 봐 인사팀장 이야기를 재차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사내에서의 금전 거래는 상관없다고 강 팀장님께 안내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건 직장인의 기본 생존 스킬 중 하나다. 나 홀로 절대 덤터기 쓰지 않기 스킬.

    김규희 길드장은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희나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니. 이 팀장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아니에요. 우리 회사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적 거래는 터치할 부분이 아니니까.”

    휴. 희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강목현 인사팀장에게 되지도 않는 원한을 품을 뻔했다.

    “그럼…… 혹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자, 김규희 길드장이 꼬았던 다리를 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랑 단독 계약 하나 하죠, 이 팀장.”

    그녀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계약이라뇨?”

    난데없는 계약 타령에 희나는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근로 계약서 말고 더 작성해야 할 게 있나요?”

    앞서 땅콩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은데, 희나의 상식 선상에서는 땅콩과 계약의 연관성을 영 찾을 수가 없었다.

    ‘길드장님도 땅콩을 좋아하시나?’

    고작해야 이런 의문을 품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턱을 괸 채 희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길드장이 피식 웃었다.

    “그래요. 나도 땅콩을 좋아하긴 하지. 하지만 꼭 그래서 계약 이야기를 꺼낸 것만은 아냐.”

    마치 속을 읽어 낸 듯한 대답이었다.

    아니, 실제로 김규희 길드장은 사람의 속마음을 읽어 내는 능력이 있었으니 영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희나는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바짝 긴장했다. 자칫하다가는 희나의 ‘홈 스위트 홈’ 스킬까지 들킬 판이었다.

    “강 헌터에게 내 능력 이야기를 들었군요. 숨기고 싶은 그 스킬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비밀은 잘 지키는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요, 이 팀장.”

    마주친 시선으로 희나의 속을 읽어 낸 김규희 길드장이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마치 발톱을 숨긴 호랑이 같았다.

    “너무 떨지 말래도.”

    그녀는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친근한 모습이었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물론 찔리는 것 하나 없이 당당한 희나였지만, 자기의 속내를 속속들이 읽힐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은근히 컸다.

    빨리 본론을 이야기하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말씀 꺼내시려던 계약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아, 그래. 계약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김규희 길드장이 손가락을 딱, 하고 마주쳤다.

    “이 팀장이 가져온 땅콩을 우리 회사에 전부 팔았으면 해. 앞으로 생산하는 생산품까지 전부.”

    희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예? 지금 땅콩…… 이야기하고 계신 것 맞지요?”

    오빠의 땅콩은 굉장히 맛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물론 입맛 까다로운 헌터들이 줄을 서서 샀던 걸 보면 품질이 보통 이상이었던 건 확실하지만.’

    길드장이 직접 나서서 탐낼 정도의 가치가 있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길드장은 눈을 동그랗게 뜬 희나를 보고 작게 웃었다.

    “이 팀장은 자기가 파는 땅콩의 효과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듯하네. 그래. 하긴, 알았더라면 검은 봉지에 몇 줌씩 넣어 고작 6000원에 팔지는 않았겠지.”

    땅콩의 효과?

    희나는 땅콩의 효능에 대해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고소한 술안주로 맥주를 절로 부른다는 효과 외에는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제가 가져온 땅콩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끙끙대며 고민하다 물으니 김규희 길드장이 킬킬 웃었다.

    “물론 땅콩과 맥주는 최고의 조합이긴 하지. 하지만 이 팀장의 땅콩은 좀 더 특별한 데가 있어. 휴대 식량 대체품으로 사용할 만한 가능성이 있거든.”

    “휴대 식량이요?”

    희나는 견과류의 효능을 하나 기억해 냈다. 포만감을 일으켜서 다이어트에 좋다고 했던가……? 아무튼 그런 비스무리한 효과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땅콩은 이 팀장의 가족이 키웠다고 했지요? 내 생각에 그 가족도 보통 인물은 아닐 듯한데.”

    김규희 길드장이 눈을 빛냈다. 희나는 오빠인 희원을 생각했다.

    ‘우리 오빠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배를 벅벅 긁는 모습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혈육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길드장이 궁금한 건 오빠의 추레한 본질 따위가 아닐 게 분명했다. 아마 희원의 각성 여부와 그 클래스를 묻고 있는 것일 테다.

    ‘하긴. 우리 남매 각성 클래스가 남다르긴 하지. 살림꾼과 농사꾼 남매라니, 누가 보면 깜짝 놀랄 만한 클래스야.’

    어떻게 희원의 클래스가 독특하다는 걸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출 만한 일은 아니었다. 희나는 뺨을 긁적였다.

    “오빠도 D급 각성자인데요, 비전투 계열 농사꾼이에요.”

    “농사꾼이라. 그래서 작물의 효능이 남달랐군.”

    길드장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어휴, 갑갑해.’

    한편 길드장은 희나의 속을 읽고, 희나는 길드장의 속을 읽을 수 없으니 대화가 제대로 안 됐다.

    궁금증을 참다못한 희나는 거의 따져 묻듯 질문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오빠가 기른 땅콩이 다른 땅콩과는 다르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 정확히 어떤 면에서 특별하기에 이렇게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신 건가요? 휴대 식량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이해가 잘 안 돼요.”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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