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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76화 (76/228)
  • 던전 안의 살림꾼 76화

    당연히 ‘안 됩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깐깐해 보이는 강목현의 입에서 나온 허락의 말은 정말로 의외였다.

    “길드원 사이에서 아이템 등 이런저런 개인적인 거래를 하는 일은 흔합니다. 그리고 꼭 그게 아이템일 필요도 없고요.”

    그는 엄청나게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희나를 힐끗 바라봤다.

    일반 회사였다면 당연히 금지했을 일인데, 헌터들이 있는 길드가 본신이라 그런지 이런 부분에서는 몹시 자유분방한 면이 있었다.

    “그럼 정말로 땅콩을 내다 팔아도 된다는 거죠?”

    “그게 땅콩이건 뭐건 희나 씨는 우리 청룡 길드의 일원이고, 청룡 길드 내부에서 직원 간 거래는 무엇이든 자유롭습니다.”

    강목현은 헌터들은 보통 헌터 마켓을 사용하지만, 중간 수수료가 붙기 때문에 같은 길드 사람들끼리는 대면해서 직접 거래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이걸 헌터들 간의 거래로만 한정하는 건 불공평한 일이죠. 적어도 길드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아……. 그렇군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팀장님.”

    겸업 가능 조항도 그렇고, 이런 잡상인적인 행위를 허가해 주는 것도 그렇고, 희나는 청룡 길드가 여러모로 독특한 회사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팀장님, 이제 궁금증은 모두 해결되었습니까?”

    “네! 친절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희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뒤돌아 가려다 아차, 하고 작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자기 앞에 불쑥 내민 쇼핑백에 강목현이 눈썹을 까딱였다.

    “이게 뭡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땅콩이요.”

    “땅콩?”

    눈썹을 꿈틀대기에 희나는 서둘러 변명하듯 말했다.

    “인사팀장님께 팔려는 건 아니고……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아서 드리려고 가져온 거예요. 오빠가 직접 키운 거라 몸에도 좋을 거예요. 맛도 꽤 괜찮아요.”

    강목현은 피식 웃으며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형제는 형제인지, 순간적으로 강진현의 얼굴이 보였다.

    “고맙습니다. 맛있으면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농 섞인 대꾸에 희나는 얼굴을 붉혔다.

    인사팀장의 얼굴을 보니 빙그레 웃는 강진현의 얼굴이 떠올라서인지, ‘우리 오빠 땅콩 사 주세요’ 하고 노골적인 홍보를 해서인지는 몰랐다.

    “모쪼록 맛있게 드셔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희나는 짧은 인사와 함께 인사팀장실을 나왔다.

    희나의 발걸음은 힘차디힘찼다.

    사내에서 땅콩을 팔아도 된다는 회사의 공식적인 답변을 들었으니,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개인 사무실에 도착한 후, 희나는 땅콩을 커다란 나무 소쿠리들에 소분해 쏟아 넣었다.

    팔 건 아니었고, 맛보기로 휴게실에 가져다 둘 시식 땅콩이었다.

    테이블 위로 잘 마른 땅콩이 작은 동산들을 이뤘다. 절경이었다.

    “생땅콩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중 소쿠리 한 개는 볶아서 내기로 결정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한 땅콩 맛은 아무래도 풋내가 나는 생땅콩이 아니라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볶은 땅콩일 테니까 말이다.

    희나는 의자에 털썩 앉아 땅콩 껍데기를 까기 시작했다.

    톡, 토독. 톡, 토독. 금세 속도가 붙어서 땅콩알이 그릇에 소담하게 쌓였다.

    ‘완전 월급 도둑질이네.’

    개인 사무실에서 월급 도둑질하며 몰래 하는 일이 땅콩 까기라니, 조금 우습긴 했다. 하지만 마침 강진현도 던전 공략에 나가 할 일도 없겠다, 소일하기에는 딱이었다.

    ‘야무진 손끝’ 스킬 덕인지 희나는 땅콩 한 소쿠리를 금방 처치했다.

    “이제 볶아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땅콩알을 커다란 웍에 쏟아부었다.

    알진 땅콩을 다글다글 볶았다. 물기가 날아가고 타닥, 탁 땅콩 껍질 마르는 소리가 흥겹게 들렸다. 고소한 땅콩 냄새도 솔솔 올라왔다.

    눈앞에 뜨는 시스템 알림에 희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손맛 스킬은 땅콩 볶는 데도 시전되네.”

    특별한 재주가 필요한 요리도 아니고, 고작 뜨끈한 웍에 땅콩알을 다글다글 굴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볶으면 훨씬 맛있어지려나? 그럼 사람들이 오빠 땅콩 많이 사 주겠지?”

    희나는 흥얼거리며 땅콩 볶기에 전념했다. 팔이 아프긴 했지만 고소하게 익어 가는 땅콩알을 보는 건 좋았다. 은근히 중독성 있는 작업이었다.

    “다 됐다.”

    희나는 예쁜 갈색으로 볶은 땅콩을 보며 뿌듯해했다. 따끈따끈한 데다 껍질이 반지르르해서 보기만 해도 맥주가 당겼다.

    ‘하나만 먹어 볼까?’

    침을 꼴깍 삼키며 땅콩 한 알만 먹을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생땅콩도 맛있어서 정신을 놓고 먹었는데, 내 손맛까지 합쳐졌으면…….’

    희원의 맛좋은 땅콩이 희나의 손끝에서 재탄생했으니, 맛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땅콩 좋아하는 희나가 한번 맛보았다가는 앉은자리에서 허겁지겁 땅콩 한 소쿠리를 다 먹을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희나는 볶은 땅콩을 먹어 보고 싶은 걸 꾹 참고 그릇에 나누어 담았다. 생땅콩 두 소쿠리와 볶은 땅콩 두 접시가 나왔다.

    ‘한 접시씩 5층이랑 8층 휴게실에 가져다 두면 되겠다.’

    며칠 정도는 그냥 가져다 두고, 맛보게만 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땅콩 맛이 입소문을 타면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스리슬쩍 한 봉지씩 팔아 보면 어떨까…… 하는 게 희나의 야심 찬 계획이었다.

    민망한 일 시킨다며 희원에게 온갖 생색은 다 냈지만, 막상 상황에 닥치자 장삿속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맛이 없으면 몰라. 오빠가 농사지은 거 진짜 질 좋은데, 우리끼리 먹기는 아쉽잖아.’

    이렇게 자기 합리화까지 끝내 놓았다.

    이 일이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지도 모른 채…….

    * * *

    [청룡 길드 인트라넷 – 사내 익명 게시판 – 바른 말, 고운 말을 사용합시다^^ ]

    [검색어: 땅콩]

    […… (결과 검색 중) ……]

    [‘땅콩’에 관련한 게시글/댓글이 모두 검색되었습니다. 일부 표현이 생략된 게시글까지 검색합니다.]

    [제목: 휴게실 땅콩 먹어 본 사람?]

    내용: 이거 뭐임?

    뭐임?

    이거 뭐임?

    뭐임?

    이거 뭐임????

    (댓글)

    - 나도 먹어봄. 이거 뭐임?222222222

    - 이거뭐무새 뭔데

    - 휴게실에 땅콩이 있어?

    └ 누가 가져다놨는지 몰겠는데 헌터휴게실에 땅콩 있음ㅇㅇ

    └ 5층 일반사원 휴게실에도 있어요~ 엄청 맛있어요ㅎㅎㅎ

    └ 이 헌터 띨ㅃㅏㄱ 섁들아 그냥 맛있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니들이 일반인도 아니고.. 그래서 이거 뭐임?3333

    └ 너네 어릴 때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란 거 안 배웠냐 그냥 먹는 거 입에 보이기만 하면 쑤셔넣지ㅋㅋ

    └ 일단 먹어보고 얘기해

    └ 뭘 믿고 먹냐ㅋㅋㅋ

    └ 근데 이 땅콩 정체가 뭡니까? 뭔데 몇 알 먹었다고 포만감이 가득 찹니까?

    └ 야. 이거 혹시나 해서 상태창 뜨나 확인해봤는데 상태창도 뜨는데? 이거 던전 아이템 아님?

    [제목: 땅콩의 효능]

    내용: 땅콩의 효능 - 불포화지방산을 많이 함유하여 콜레스테롤을 감소시켜주고 동맥경화 예방에 도움을 준다.

    우리 길드 휴게실 땅콩의 효능 – 적은 양의 섭취로 포만과 영양 상태를 오래 유지시켜 준다. (팩트임)

    (댓글)

    - 던전용 휴대 식량으로 좋을 듯

    └ 헌터놈들 생각하는 거 다 똑같네

    - 근데 이거 누구한테사야됨?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허미 그님이 가져온거라고?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가족 뭐하는 사람인데???? 근데 얼마에 판대?

    └ 한봉다리에 육천원

    └ 미친ㅋㅋㅋㅋㅋ그가격으로 삼? 양심 안찔림?

    └ 당연히 주머니에 마석꽂아줬지ㅋ 나도 가오란 게 있는 헌터임ㅋ

    └ 나도 빨리 사러가야겠음 안그래도 내일부터 던전ㄱ하는디 개꿀

    [제목: 야 땅콩 이제 안판대]

    내용: 땅콩 이제 못판대

    (댓글)

    - 갑자기? 어제까지만해도 남아있다고 했는데? 누가 상도덕없이 다 쓸어갔냐ㅡㅡ 길드 옥상정원으로나와라

    └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물어봤는데 ♪♩♬(바른 말, 고운 말을 사용합시다^^) 길드에서 금지했대

    └ 길드에서 왜?

    └ ♪♩♬(바른 말, 고운 말을 사용합시다^^)아 그걸 내가 알면 길드장이겠지ㅋ

    └ 저기 나 이거 관련업무때문에 들은거있음. 이거 기밀이긴한데...

    └ 빨리 말해봐

    └ ㅃㄹ2222

    └ 형아 똥줄탄다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올ㅋ 역시 관리자급의 혜안은 남다르십니다~ 번창하라 청룡

    └ 그러게ㅋㅋㅋ 그런거면 나쁘진 않은데?

    * * *

    희나가 휴게실에 비치한 땅콩은 순식간에 사내 화제 토픽 영순위에 올랐다.

    맛도 맛이었거니와, 해당 땅콩의 효과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노련한 헌터들은 휴게실 땅콩의 비범함을 금방 알아보았다.

    우선 생땅콩을 먹자마자 시스템 창에 ‘포만감이 오르고 있습니다’라는 안내가 뜨는 것부터 범상치 않았다.

    이건 각성자의 신체 상태에 시스템적으로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옆에 놓여 있던 볶은 땅콩을 먹은 헌터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땅콩 한 알을 입에 넣자마자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가득 차면서 다음과 같은 상태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작 땅콩 한 알을 먹는 것만으로도 6시간 동안 포만감이 들고 충분한 영양 상태가 지속된다니. 이건 완벽한 전투 식량 대체품이었다.

    그랬다. 희나의 땅콩은 배고픔과 영양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종의 만능 알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비하고 영험한 땅콩에 대한 소문이 온 길드를 휩쓰는 데는 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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