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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75화 (7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75화

    “어떻게…….”

    희나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익히 예상할 수 있었다.

    ‘어떻게 내가 만든 음식을 남길 수 있냐고 호들갑 떨겠지?’

    “……아무리 희나 씨라도, 어떻게 희나 씨가 만든 음식을 먹다 남길 수 있습니까? 미각과 건강에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같은 날도 있는 거죠, 뭐.”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지만, 강진현은 몹시 진지했다.

    “청룡 길드 연계 병원이 있습니다. 건강 검진을 받아 보시겠습니까?”

    “지난번에 보험 공단에서 해 주는 건강 검진 받았어요. 괜찮아요.”

    “일반 검진으로는 잡히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힐러를 불러 드릴까요? 아니, 힐러를 부르겠습니다.”

    강진현은 걱정을 참다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희나는 그가 S급의 스피드로 쌩 사라져 버릴까 봐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하루 정도 입맛 없는 건 정상이니까 호들갑 떨지 마세요!”

    어쩐지 조금 엄한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하지만 효과는 좋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또 과했나 봅니다.”

    흥분했던 강진현이 차분히 가라앉은 것이다. 강진현에게 희나의 단호한 말투는 언제나 효과가 직방이었다.

    희나는 누군가에게 들키면 몹시 실례가 될 만한 생각을 했다.

    ‘역시 개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밥 주는 사람 말이 최고인가 봐.’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건 간에 희나는 내색하지 않고 반찬 그릇을 강진현 앞으로 밀어 놓았다.

    “그나저나 진현 씨야말로 식사 많이 하고 가세요. 저야 배고플 때 제가 차려 먹으면 되지만, 진현 씨는 그게 아니잖아요. 오늘 오후에 던전 입장하신다면서요? 한동안은 전투 식량만 드실 거 아니에요?”

    “예……. 그렇습니다.”

    강진현이 이마를 작게 찡그렸다. 전투 식량이란 원래도 그다지 맛있지는 않은 음식이었다.

    누구보다 예민한 미각을 가진 그가 그런 전투 식량을 즐겁게 먹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번에는 며칠 일정이라고 했죠?”

    “일주일에서 열흘가량 걸릴 듯합니다.”

    일주일이나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다니. 희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오늘 저녁 한 끼 정도는 드실 수 있게 도시락 준비해 뒀어요.”

    희나는 싱크대 위에 놓인 도시락 통을 손짓했다. 다른 사람과 나눠 먹을 것을 대비하여 5단 찬합을 가득가득 채워 둔 도시락이었다.

    “고맙습니다, 희나 씨……. 희나 씨를 만난 건 제 일생일대의 축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강진현은 감격에 겨워 촉촉해진 눈으로 희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한 멜로 눈깔의 효력은 여전했고, 덕분에 희나의 귀가 조금 빨개졌다.

    “별말씀을 다. 칭찬이 과하세요.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당연히 이 정도는 챙겨 드려야죠.”

    “아닙니다.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라 해도 당연한 헌신은 없습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어서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위험 속을 쏘다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진현 씨의 헌신이야말로 당연히 여겨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희나의 보살핌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강진현은 굉장히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강인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정작 남들처럼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는 피폐한 삶이었다.

    희나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그 어떤 의무도 제대로 지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진현은 제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가 할 일을 다해 왔다…….

    불평 하나 없이. 내색하지 않고.

    새삼 희나는 이 과묵한 헌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체감했다.

    “던전에서 돌아오시면, 상다리 휘어지도록 맛있는 음식 차려 드릴게요.”

    그 응원에 강진현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희나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드시고 싶은 거 말씀해 주세요. 미리 만들어 놓게.”

    “저는 희나 씨가 해 주시는 건 전부……”

    “그런 것 말고요. 그동안 먹었던 것 중에서 제일 맛있었던 거라도!”

    그들은 그렇게 한동안 가벼운 대화를 이어 갔다.

    덕분에 희나의 입맛 실종 사건은 금세 잊혔다.

    마침 다음 날 아침부터는 평소처럼 다시 배가 고프기 시작해서 한때의 해프닝으로 그칠 듯 보였다.

    하지만…….

    * * *

    “이거 양 진짜 많다. 어떻게 하지?”

    “그러게. 노상에서 가판이라도 세워야 하나?”

    희나와 희원 남매는 심각한 표정으로 땅콩 무더기를 내려다보았다. 원체 희원의 농사가 잘된 덕에 땅콩이 거의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런 건 어디 가서 어떻게 팔아야 하나?”

    희나가 끙, 하고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희원에게 농사일로 밥벌이나 하라고 핀잔주듯 이야기하긴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이제 자기가 가장 역할을 할 테니 안전하게 쉬라는 의미가 더 컸다.

    애당초 커다란 밭도 아니고 ‘홈 스위트 홈’ 주변 몇 미터 부지에서 짓는 농사이니 수확이 나 봤자 희나 혼자 좀 먹고 주변에 좀 나눠 줄 만한 양이 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수확량이 많을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단 말이야!’

    거기다 생각해 보니 땅콩은 주식으로 삼아 잔뜩 먹을 만한 작물도 아니었다.

    삼시 세끼 땅콩으로 만든 밥에 땅콩 조림, 땅콩 국, 땅콩 김치를 먹으면 모를까.

    거기다 희원은 땅콩 알레르기가 경미하게 있어서 땅콩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안을 생각했다.

    “이건 나눠 주기에 양이 너무 많아. 이 아파트 사람들한테 죄다 돌려도 남을 것 같아.”

    동생의 혼잣말에 희원이 소스라쳤다.

    “이걸 어떻게 그냥 줘? 내 피와 땀과 눈물이 섞인 새끼들인데? 적어도 1000원 한 장은 받고 팔아야지!”

    「P;ㅠ」

    고물고물 기어 온 오색이는 희원의 말에 동의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기호를 쳐 댔다.

    “그건 뭐야?”

    「피땀눈물」

    “아…….”

    오색이의 대답에 어이없어하는 사이, 희원이 고개를 홱 돌려 희나를 붙잡았다.

    “희나야, 너희 회사 크지?”

    희나는 어리둥절해서 대답했다.

    “청룡 길든데…… 꽤 크지.”

    “회사에 아는 사람도 많지?”

    “많지는 않은데…… 적지는 않아.”

    희나는 미화팀일 적에 일반인 휴게실과 헌터 휴게실을 모두 담당하며 직원들과 안면을 어느 정도 트고 지냈었다.

    특히 ‘안락한 침상’ 버프를 확실히 느끼는 헌터들이 희나를 꽤 좋아했다.

    뭐라고 했더라, 신기한 초식 동물 보는 느낌이라고 했던가?

    ‘물론 내가 싼 김밥을 맛본 덕도 있겠지만…….’

    희나는 으쓱하며 자기의 요리 실력을 자랑스러워했다. 무려 S급 헌터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손맛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희나는 희원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 그걸 왜 묻는 거야?”

    짚이는 바가 있긴 했지만, 설마 오빠가 자기에게 그런 낯부끄러운 일을 시키려나 싶었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원래 이런 건 알음알음 지인들 통해서 파는 거야. 네 회사 인맥 좀 써 보자. 응?”

    희원이 정겹게 붙어 앉으며 되도 않는 수작을 부렸다. 눈까지 예쁘게 깜박거리는데, 도무지 봐 줄 꼴이 못 됐다.

    ‘진현 씨가 이러면 몰라. 오빠가…… 우웩.’

    흐르는 물에 눈알을 씻어 내고 싶은 욕망을 뒤로한 채 희원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쳤다.

    “으악! 나 죽는다!”

    노동으로 다진 딴딴한 잔근육 덕분에 별로 아프지도 않았을 거면서, 희원이 죽는소리를 해 댔다.

    “오빠가 지은 농사니까 오빠가 알아서 팔아야지! 내 인맥을 왜 팔아? 오빤 아는 사람 없어?”

    톡 쏘아붙이자, 희원이 난감한 표정을 하고 하하 웃었다.

    “그게……. 내 인맥은 전부 하급 헌터밖에 없어서 거의 일회성 인연이란 말야……. 거기다 가끔 연락하는 사람들 전부 예전 우리 같은 알거지야. 아는 사람 땅콩 사 줄 바엔 한 푼이라도 더 저축하고 싶어 할걸.”

    그러면서 하는 변명이 ‘워낙 먹고살기가 바빠 친분 쌓기도 힘들었다’라나?

    하긴. 희나도 돈 버는 게 바빠서 제대로 된 또래 친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일 외적으로 사람들과 교류를 시작한 건 그나마 최근부터였다. 사람 사귀는 것도 물질적으로, 심적으로 여유가 생긴 다음에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번거롭게 동생한테 이런 일이나 시키고 말이야…….”

    희나는 괜히 소리 내어 투덜거리며 마음 한켠이 찡한 걸 모른 척했다.

    그간의 고단하고 팍팍했던 과거가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 하나 사귈 정도의 여유조차 없었던 그날들…….

    옛 기억에 마음이 슬쩍 약해져 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뭐……. 별수 없지. 이번만 해 줄게. 대신 회사에서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땐 오빠도 다른 방법 찾아보고.”

    희나가 흥, 하고 팔짱을 꼈다.

    “역시 내 동생이야. 내가 너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응?”

    잠깐 무거워졌던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듯, 희원이 시시덕거렸다.

    희나는 오빠의 속 보이는 아부에 피식피식 웃으면서 저 산더미 같은 땅콩을 어떻게 팔아넘길 수 있을지 고민했다.

    * * *

    결국 희나가 택한 건 정공법이었다.

    여기서 희나가 생각하는 정공법이란, 소비자에게 땅콩 시식을 시키고 구입을 유도하는 방법을 뜻했다.

    ‘오빠 땅콩은 정말 맛있으니까, 맛만 보게 해도 은근 금방 팔려 나갈 거야.’

    다만 걱정이라면 청룡 길드가 이런 잡상인이 할 법한 행위를 눈감아 줄까, 하는 사실이었다.

    제일 가까운 우민아는 한 달짜리 던전 공략에, 다음으로 가까운 강진현은 일주일짜리 던전 공략에 가 있으니 물어볼 상대라고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희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인사팀장 강목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진짜예요, 인사팀장님?”

    “예. 상관없습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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