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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74화 (74/228)
  • 던전 안의 살림꾼 74화

    “바둑이 산책 이벤트는 이걸 가르쳐 주려고 열린 건가 봐.”

    산책 퀘스트의 주체가 왜 희원이 아니라 희나인 건지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문을 열 때마다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내 거라서 그런 건가?’

    꽤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어쨌든 이번 퀘스트로 인해 희나의 살림꾼 클래스와 희원의 농사꾼 클래스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시스템이 어떤 안배로 남매에게 이런 특이한 직업군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직감적으로 이런 식으로 일이 얽힐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어렵지 않게 끝난 첫 산책에 힘입어 희나와 바둑이는 두 번째, 세 번째 산책도 나갔다.

    운 좋게도 그 두 산책지도 그렇게 고전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은신의 로브는 희나를 잘 감추어 주었고, 방어의 팔찌는 든든했다. 심지어 2m 덩치가 된 바둑이는 어지간한 몬스터 못지않게 강력했다.

    챱, 아드득, 쩝, 쩝!

    바둑이는 제게 달려들었던 소형 몬스터 한 마리를 한입에 집어삼켜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맛좋은 사탕을 깨뜨려 먹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모습이 얼마나 게걸스럽고 용맹해 보였는지 모른다.

    ‘은신의 로브가 없었어도 안전했겠는데?’

    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퀘스트 창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느새 산책 퀘스트 진행도가 100%가 되어 있었다.

    “바둑아, 이제 들어가자!”

    신나게 날뛰고 있는 바둑이에게 손을 흔들어 재촉하자, 바둑이가 아쉬움 없이 돌아섰다. 다음번에도 또 산책을 나갈 것이란 사실을 이제 잘 알고 있었다.

    희나와 바둑이는 타박타박 ‘홈 스위트 홈’ 안전지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왔어?”

    현관에 앉아 있던 희원이 희나를 반겨 주며 곧바로 바둑이를 인수인계했다.

    “오늘은 배추밭에 가자, 바둑아!”

    바둑이의 비료 살포 능력(?)이 물이 오르면서 요즘 희원은 부쩍 바빠졌다.

    이전에는 이유 없이 말라 죽거나 더디게 성장하던 식물들이 바둑이의 금가루를 맞으며 부쩍부쩍 자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자라는 건 농작물뿐만이 아니었다. 농작물의 영양을 빼앗아 먹는 잡풀들 또한 쑥쑥 자랐다.

    자연히 밭을 돌보는 농사꾼인 희원이 해야 할 일은 많아졌다. 희원은 온종일 잡초들과 씨름했다.

    농약을 사 와 살포하자고 희나가 제안했지만, 희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유기농 던전 토양을 농약 따위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는 신념 아닌 신념이었다.

    ‘언제부터 땅을 그렇게 사랑했다고…….’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농사꾼 클래스의 일을 하며 나름 느낀 바가 있으니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속내를 꾹 눌러 참았다.

    희나도 살림꾼으로 각성하면서 여러모로 살림의 철학에 대해 깨친 바가 있었으니까.

    “희나야, 땅콩밭은 이제 수확해도 되겠어.”

    바둑이와 신나게 비료를 살포한 후, 밭들을 한 바퀴 둘러본 희원이 귀띔했다. 땅콩은 희나가 유독 좋아하는 작물이라 특별히 심은 것이었다.

    “벌써? 심은 지 얼마 안 된 거 아니야? 모종 사 달라고 한 게 두 달 전이잖아. 땅콩이 그렇게 빨리 자라는 식물이던가?”

    모종이 잘 자라지 않는다며 한숨 쉬던 게 엊그제인데, 벌써 수확이라니? 희나의 의문에 희원이 대답해 주었다.

    “잘 안 자라서 걱정하긴 했는데, 요 몇 주간 바둑이 금가루 맞은 후부턴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더라고. 한 뿌리 파서 확인해 봤는데, 알이 실하게 잘 영글었어.”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희원의 얼굴에 함지박만 한 웃음이 걸렸다.

    “오빠가 먹을 것도 아닌데 그렇게 뿌듯해?”

    희나가 슬쩍 물었다. 사실 희원은 땅콩을 먹으면 피부에 간지럼증이 올라와서 땅콩에는 절대 입을 안 댔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희나만을 위한 농사였다.

    “그럼. 식물은 먹는 거 못 먹는 거로 차별하는 거 아냐.”

    희원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땅콩 캐는 거 구경할래?”

    희원이 장갑을 끼며 턱짓하기에, 희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바닥에 호미를 대자마자 흙바닥에서 땅콩이 쑥쑥 뽑혀 나왔다.

    흙 속에서 알알이 풍성한 땅콩이 숨풍숨풍 뽑혀 드러나는 걸 볼 때마다 10년 묵은 체증이 싸악 내려가는 것 같았다. 속이 다 시원했다.

    ‘원래 땅콩이 이렇게 쑥쑥 뽑히는 작물인가? 아니면 오빠가 농사꾼이라서 일을 잘하는 거야?’

    농사일에는 까막눈인 희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희나도 오빠의 땅콩 농사가 대박을 쳤다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흙뿌리에 달린 땅콩알들은 아주 커다랗고 양도 많았다. 한 뿌리만 캐도 한 되는 족히 나올 듯한 양이었다.

    “나 이거 먹어 볼래.”

    농사일하는 희원의 곁에 쪼그려 앉은 희나는 생땅콩 하나를 까먹었다. 사각사각한 식감과 함께 입안 가득 고소한 풋내가 올라왔다. 군침이 싹 도는 맛이었다.

    ‘헉! 대박.’

    세상에나, 이렇게 맛있는 땅콩이 세상에 존재했다니.

    희나는 잠시 속세의 근심을 모두 잊고 생땅콩을 까서 와구와구 집어먹었다. 알이 크고 실해서 두어 알만 넣어도 입안이 가득 찼다.

    어찌나 땅콩을 열심히 먹었던지 시스템이 상태를 알려 올 정도였다.

    ‘별걸 다 알려 주네.’

    희나는 시스템 알림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한편, 그닥 넓지 않은 텃밭에서 땅콩 수확을 끝낸 희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희나의 발치에 떨어진 땅콩 껍데기 무더기를 보고 소리쳤다.

    “야, 너 뭐 해? 그러다 내 땅콩 다 먹어 버리겠다.”

    “오빠, 이거 농사 대박이다. 나 이렇게 맛있는 땅콩 처음 먹어 봐.”

    양 뺨에 땅콩을 잔뜩 욱여넣고 우물거리자 희원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 정도로 맛있어?”

    “완전. 이대로 팔아도 돼.”

    희나는 양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쌍따봉!」

    어느새 고물고물 기어 온 오색이가 철 지난 유행어로 쿵짝을 맞춰 주었다.

    “맛이 궁금한데? 나도 한 입 먹여 주라.”

    “오빠 땅콩 알레르기 있잖아?”

    “그래도 하나쯤은 먹어 봐도 되지 않을까? 첫 작물이라 궁금한데.”

    희원이 아기 새처럼 입을 쩍 벌리기에 희나는 땅콩을 흙 묻은 껍질째로 입안에 던져 주었다.

    오빠의 알레르기가 걱정되어서 못 먹게 하려는 속셈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손으로 먹여 달라는 흉하고 소름 돋는 요구를 받은 것에 대한 대가였다.

    “퉷, 퉤! 야! 이희나!”

    희원은 입안에 들어온 흙과 땅콩을 퉤퉤 뱉어 냈다.

    “누가 오빠 입안에 흙을 처넣으라고 가르쳤더냐!”

    그는 펄펄 날뛰다 희나 발등에 흙을 한 줌 던졌다. 그 나름의 복수였다.

    “앗! 내 운동화!”

    더러워진 흰 운동화를 탈탈 털며 울상 짓자 희원이 씨익 웃었다.

    “복수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탓탓탓탓탓!

    저 멀리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바둑이가 뛰어왔기 때문이다.

    바둑이는 희나와 희원이 무슨 흙 뿌리기 놀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잎사귀와 뿌리로 부슬부슬한 흙바닥을 빠르게 헤쳐 팠다. 허공에 사방팔방 흙이 날렸다.

    “아악!”

    “바둑아! 그만!”

    「금지! 금지! 멈추시오!」

    남매와 달팽이 한 마리는 바둑이가 비처럼 흩뿌린 흙을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참사의 중심인 바둑이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젖은 머리를 털어 말리며 희나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유, 살겠네!”

    새우 싸움에 바둑이라는 초대형 고래가 난입한 덕에 온몸이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희원은 자기가 키운 땅콩을 입에 대는 걸 포기했다.

    희나는 더러워진 옷가지를 탈탈 털어 세탁기에 집어넣고, 흙투성이 몸은 뽀득뽀득 씻어 냈다.

    따끈따끈해진 얼굴에 손부채질하며 밭에 나가 있는 오빠를 불렀다.

    “오빠! 나 다 씻었어. 오빠도 들어와서 씻어.”

    “어엉. 알았어. 잠깐만.”

    희원은 땅콩밭 뒷정리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녁은 뭐 할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슬쩍 나가서 희원에게 물었다.

    보통 주말 식사는 희나가 그때그때 먹고 싶은 것으로 정해서 하는 편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생각나는 음식도 별로 없었다.

    ‘아까 생땅콩을 많이 주워 먹어서 그런가 봐.’

    하지만 벌써 시간이 7시가 넘었다. 밥때는 지켜야 했다.

    “무슨 일로 나한테 먹고 싶은 걸 물어?”

    “난 별로 배 안 고파서.”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희원이 곰곰이 생각하다 제안했다.

    “치킨 시켜 먹자. 특별한 날이잖아.”

    오빠의 선택이란, 결국 배달 음식이었다.

    메뉴가 떠오르지 않아 식사를 준비하기 내심 귀찮았던 희나에게는 반가운 소리였다.

    “잘됐네. 오빠 먹고 싶은 걸로 시켜 둬.”

    “앗싸! 오래간만에 치킨!”

    희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휴대전화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 * *

    강진현이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희나 씨, 괜찮으십니까?”

    희나는 젓가락으로 밥그릇을 뒤적거리다 고개를 퍼뜩 들었다.

    “예?”

    “식사를 거의 못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혹시 몸이 좋지 않으신 건지 걱정됩니다.”

    강진현이 거의 비지 않은 희나의 밥그릇을 지적했다. 이에 희나는 속으로 아차, 했다.

    ‘밥상머리에서 너무 깨작거렸나……?’

    어제저녁부터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아서 식욕이 안 돋았다.

    아니, 희나의 손으로 만든 음식은 맛이 있긴 했다. 하지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잔뜩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연달아 식사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제는 치킨 한 조각 먹고, 오늘 아침은 배가 안 고파서 식사도 거르고 왔는데 왜 이러지?’

    아침을 거르다니, 바쁜 현대인스럽지 않게 삼시 세끼를 꼭꼭 다 챙겨 먹고 다니는 희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위장병인가?’

    하지만 뭔가 병이 났다기엔 몸은 너무 쌩쌩했다. 그저 배만 안 고플 뿐이었다.

    희나는 결국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당기지도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 봐야 속만 안 좋아질 것 같았다.

    “이상하게 오늘은 영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음식이 잘 안 넘어가네요.”

    희나의 대답에 강진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작게 벌렸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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