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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69화 (69/228)
  • 던전 안의 살림꾼 69화

    커다란 테이블이 무너지겠다 싶을 정도로 음식이 많았다. 집들이를 위해 새로 구매한 식기도 정갈하니 마음에 쏙 들었다.

    희나는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 내보일 만하지.”

    살림꾼 랭크로 각성하고 형편이 넉넉해지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희나는 손이 아주 컸다.

    좁은 원룸에서도 김밥 60줄을 쌌을 정도니, 널따란 주방을 가지게 된 지금은 그 기질을 마음껏 뽐낼 수 있었다.

    딩동, 딩동.

    때맞춰 초인종이 울렸다. 손님들이 찾아온 것이다.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희나는 후다닥 현관까지 달려갔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집이 넓어서 현관문까지 가는 데도 한오백년이었다.

    “맛있는 냄새!”

    문을 열자마자 우민아가 캬, 하고 감탄했다. 코끝에 감기는 음식 냄새가 기가 막혔다.

    “안녕하십니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따라 들어온 강진현은 손님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가져온 집들이 선물을 건네며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아유, 뭘 이런 것까지. 감사합니다.”

    희나는 강진현에게서 선물을 받으며 방긋 웃었다. A3 정도 되는 크기의 캔버스 그림이었다.

    의외로 센스 있는 선물이었다. 마침 집을 꾸밀 물건들이 필요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휑한 집 벽에 걸어 두기 딱 좋은 소품이었다.

    “약소하게나마 준비해 보았습니다.”

    강진현이 겸양을 떨었다.

    참고로 아직 희나는 모르지만,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유명 화가의 진품 그림을 사 들고 온 것치고는 몹시 겸손한 태도였다.

    “아차. 나도 선물.”

    집에 들어선 우민아도 뒤늦게 선물을 꺼내 들었다.

    우민아가 건넨 건 작은 과도였다. 날은 칼집에 가려져 있었고, 무엇보다 나무로 된 손잡이가 귀여웠다.

    “와! 고마워요, 언니. 안 그래도 과도 날이 많이 상해서 필요했는데.”

    “인벤토리에 넣어 놓고 사과 깎아 먹을 때도 쓰고, 나쁜 놈이 접근하면 이걸로 거죽을 확! 벗겨 버려.”

    우민아가 살벌한 소리를 발랄하게 해 댔다.

    그제야 희나는 이 선물이 보통 과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과도를 자세히 살피니 시스템 설명 창이 뜨는 것이 아닌가!

    <과도(B): 비록 과도에 불과하지만, 예기가 심상치 않다. 이 과도를 잡으면 무엇이든 잘라 내고 벗겨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평범한 과도가 아니었다.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B급이나 되는 고등급 아이템!

    “언니! 선물이 너무 과한 것 아니에요?”

    희나는 깜짝 놀라 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우민아는 시큰둥하게 손을 내저었다.

    “넣어 둬, 넣어 둬.”

    “집들이 선물로 B등급이나 되는 아이템을 받는 건 과해요!”

    “천하의 우민아 체면이 있지, 집들이 기념으로 고작 화장지 따위를 선물로 주라고?”

    “저는 생필품 선물 좋은데…….”

    소심하게 중얼거리자 우민아가 희나의 어깨를 턱턱 쳤다.

    “그리고 이건 나한테 필요 없는 거야. 고작 손바닥만 한 칼때기로 뭘 하겠냐? 희나 네가 가지고 다니면서 호신용으로 써.”

    “우민아 헌터의 말이 옳습니다.”

    강진현도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그럼 잘 쓸게요. 정말 고마워요.”

    희나는 B등급 과도를 인벤토리 안에 고이 넣어 두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우리 희나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원도 뒤늦게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우민아와는 통화만 해 봤지 초면이었고, 강진현과는 구면인 사이였다. 그에게 한 번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남매는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손님들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이야. 이게 웬 잔칫상이야? 상다리 휘어지겠는데?”

    테이블에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보고는 우민아가 입을 쩍 벌렸다.

    “뭘요. 얼마 준비 못 했어요.”

    희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괜히 겸양을 떨었다.

    “아닙니다. 희나 씨는 정말 대단합니다. 진심입니다.”

    압도적인 광경에 잠시 말을 잃었던 강진현이 희나의 솜씨를 찬양했다.

    “저녁 시간이라 배고프시죠? 그렇지 않아도 막 상을 차린 참이었어요. 집 구경은 나중에 하시고, 식사부터 할까요?”

    “……그럼.”

    희나의 권유에 나머지 세 사람은 군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당장 식탁 위의 음식들을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희나 씨, 맛있게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희나야.”

    “만드느라 수고했다.”

    강진현과 우민아, 희원은 제각각 식사 인사를 하며 수저를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집 안은 몹시 고요하여, 수저 달그락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음식을 먹다 그 맛에 감탄하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울릴 뿐이었다.

    희나의 손맛이 담뿍 들어간 음식들은 무엇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완벽했다. 심지어 계량 없이 쓱쓱 무친 겉절이마저 달콤 고소했다.

    “와.”

    언제나 그렇듯 대화는 한참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다들 맛은 어떠세요?”

    공깃밥이 거의 빈 걸 확인한 희나는 뻔한 질문을 던졌다.

    “진짜 맛있어. 알고는 있었지만, 고기만 잘 굽는 게 아니었구나?”

    우민아가 먼저 나서서 호들갑을 떨었다. 옆에서 강진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희나 씨가 못 만드는 음식은 없습니다. 지난번에 주신 마들렌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예상했던 칭찬이긴 하지만, 역시 좋은 말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쑥스러움에 희나의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감사해요. 전 제가 한 음식을 남들이 맛있게 먹어 줄 때가 제일 뿌듯하더라고요.”

    “입이 있고 혀가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느껴야지요.”

    진담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진현이 희나의 얼굴에 금칠을 해 줬다.

    평소에 매일같이 하는 말이었지만, 가족인 희원 앞에서 해 주는 칭찬이라 각별했다. 절로 어깨가 으쓱하고 올라갔다.

    “이것 봐, 오빠. 오빠는 평소에 내 밥 먹고 지내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아야 해.”

    “언제 내가 반찬 투정이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이거 은근 억울하네. 저 희나가 해 주는 밥 정말 고맙게 잘 먹고 있거든요.”

    희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희나의 지인들과 함께하는 자리라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을 텐데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잘 어울렸다.

    호탕한 성격인 우민아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쳤다.

    “희원 씨라고 했나요? 내가 그쪽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를걸요. 나도 이런 동생 하나 있으면 바랄 게 없겠어요.”

    “그런데 얘 은근 깐깐해요. 매번 얌전한 척만 해서 그렇지, 집에서 오빠를 얼마나 부려 먹는지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방 안에 티끌 하나 용납하지 않아요.”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공통적으로 아는 지인의 이야기가 화젯거리로 올라오기 마련이다.

    희원과 우민아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희나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했다.

    강진현은 대화에 끼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씹어 삼키면서도 귀를 바짝 세웠다. 그가 모르는 희나의 면면이 새롭게 느껴졌다.

    “아차, 강 헌터님.”

    그러다 갑자기 희원이 대화의 화살을 강진현에게로 날렸다. 강진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 집 옆 호수에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먼젓번에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왔을 때 희나가 말해 주더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희나가 어쩌다 남의 집까지 찾아가게 됐는지……?”

    희나는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악! 오빠! 그 얘길 지금 꺼내면 어떻게 해!’

    희원은 지금 강진현에게 은근슬쩍 눈치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술 마시고 내 동생을 어디까지 데려간 거냐고…….

    이에 희나는 오빠의 종아리를 퍽 걷어찼다.

    “윽.”

    “아이, 참. 진현 씨가 나 걱정해서 집에 안전하게 데려다주신 거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식사 끝났으니까 상이나 좀 치워 봐.”

    희나는 재빨리 명령권을 발휘했다. 희나네 집에서는 밥한 사람이 곧 식사 시간의 지배자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명령을 고분고분하게 들어야 했다.

    “빨리!”

    “……얘가 이렇다니까요. 살림꾼이 아니라 폭군입니다, 폭군.”

    희원이 투덜거리며 상을 치웠다.

    ‘입 닫아 오빠!’

    희나는 오빠가 더는 허튼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찌릿 눈을 흘겼다.

    우민아와 강진현도 상 치우는 걸 돕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희나가 ‘손님은 이런 거 하면 안 되는 거다’라며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야, 너 밥상머리에서는 은근 카리스마 있다?”

    우민아는 희나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짝짝 손뼉을 쳐 주기까지 했다.

    “원래 손님은 가만히 주인이 주는 거 받아먹는 거예요. 우리 집 규칙이에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요.”

    한편, 강진현은 희원의 손이 치워 가는 남은 반찬들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평일 최소 두 끼는 희나가 해 주는 밥을 먹는데, 뭐 그리 안타까운지는 모를 일이었다.

    “진현 씨, 음식 넉넉하게 했어요. 가실 때 음식 챙겨 드릴 테니까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않으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후식 꺼내 올게요. 민아 언니가 준 칼도 개시해 볼 겸 과일도 깎아 보고요.”

    희나는 재빨리 후식 상을 차렸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강진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희나가 미리 만들어 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진현 씨.”

    “예, 희나 씨.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시끄럽진 않으시죠? 옆집인데 시끄러우실까 봐 신경 쓰고 있거든요.”

    희나는 사과를 토끼 모양으로 깎으며 그동안 계속 신경 쓰였던 주제를 끄집어냈다. 참고로 칼은 B급 아이템답게 아주 잘 들었다.

    “제, 제가 스킬이 있거든요. 츠, 층간 소음 방지 스킬이요.”

    거짓말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희나는 두 번이나 말을 더듬었다.

    “아. 어쩐지 희나 씨 집은 유독 조용하긴 합니다.”

    “그런가요?”

    “마치 아무 사람도 살지 않는 것처럼요.”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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