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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68화 (68/228)

던전 안의 살림꾼 68화

희나는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의심을 꾹 눌렀다. 그러기에 강진현은 너무나 선량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제 세 봉지나 끓여줬는데. 또 먹고 싶은가 보네.’

희나는 라면 앞에서 한없이 솔직한 욕망을 보이는 이 S급 헌터가 제법 귀엽게 느껴졌으므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속만 괜찮으시다면 열 봉지도 끓여 드릴 수 있어요.”

* * *

띠로록.

도어 록을 해제하고 아파트 문을 열자, 새 가구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가구 다 도착했어?”

희나는 신발을 벗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올 만한 가구는 다 도착했어. 택배 온 소품들도 다 뜯어 놨고.”

희원이 퇴근한 희나를 반겼다.

그는 요 며칠, 온종일 들어오는 가구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 나간 동생 대신 가구 배송 기사들을 챙기고, 위치를 감독하는 등 계속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가구 들이느라 수고했어. 오늘은 맛있는 것 해 줄게.”

“제육볶음 해 주라.”

말을 꺼내자마자 희원은 제육볶음을 요구했다. 한국 직장인의 소울 푸드 중 하나였다. 어렵지 않았다.

“그럼 바람도 쐴 겸 마트 나가서 고기 한 근만 사 와. 제육볶음 해 줄게.”

희나는 생활비 전용 카드를 내주며 오빠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희원은 웬일로 군말 없이 카드를 받아 들었다.

“술이랑 과자 사 와도 되지?”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맘대로 해.”

희나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좋은 조건으로 진급한 덕에 생활비가 몹시 넉넉해졌기 때문이다.

집도, 집 안에 채울 가구의 값도 길드에서 모두 내주었기에 앞으로 큰돈 나갈 일도 없었다.

이제 노후를 위해 꾸준히 저축만 하면 됐다. 심지어 집 두 채가 더 있었으므로 그조차도 차고도 넘쳤다.

상황이 이러니 돈을 버는 대로 펑펑 써도 부족하지 않으련만, 근검절약하던 버릇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희나와 희원 모두 돈을 개처럼 모을 줄만 알았지, 정승처럼 쓰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리는 사치라곤 몇백 원 더 비싼 유기농 채소, 수입산 대신 국내산 한돈으로 상을 차리거나 자질구레한 간식거리를 사 먹는 일뿐이었다.

가구 매장에서 청룡 길드의 블랙 카드를 막 긁어 댄 사람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검소함이었다.

남매는 은근히 대담한 것 같으면서도 그릇이 작은 데가 있었다. 특히 자기 돈과 관련한 부분은 더 그랬다.

다행인 건 희나와 희원이 이 생활에 몹시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안전하고 안락한 삶. 남매가 원하던 삶 그 자체였다.

“어디 보자…….”

희나는 퀘스트 창을 열어 퀘스트 진행 상태를 확인했다.

<모델 하우스를 만들자!(난이도 미정): 다주택자가 된 당신. 마음껏 돈을 들여 당신의 미감을 뽐내 보세요!

▶ 필수 퀘스트 (1/2)

- 적절한 가구 들이기 (100/100%)

- 인테리어 소품 배치하기 (0/100%)

※ 시간제한: 없음

※ 퀘스트 불이행 시 불이익: 주택 미거주 여부를 들킬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 퀘스트 보상: 심신의 안정, ‘홈 스위트 홈’ 스킬 레벨 업!

※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완료 시 추가 보상 지급>

어느새 필수 퀘스트 중 하나는 완료되어 있었다. 희원과 함께 머리를 쥐어짜 내어 가구 배치를 고민한 보람이 있었다.

“이제 소품으로 집만 꾸미면 되겠네.”

희나는 흥얼거리며 오빠가 뜯어 놓은 택배 물품들을 뒤적였다.

예쁜 액자와 포스터, 조화와 오브제 등이 잔뜩 널려 있었다. 세련된 가구 분위기와 맞춘 깔끔하고 멋스러운 분위기의 소품들이었다.

이것들은 희나가 자비로 마련한 것들이라 각별히 애정이 갔다. 거저 얻은 가구와는 좀 달랐다.

희나는 개미처럼 잡화를 옮겨 나르고, 올바른 위치에 놓았다. 머릿속에서 수백 번도 넘게 상상했던 풍경이라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이야……. 진짜 멋있다.”

인테리어 화보에서 봤던 대로 커다란 액자를 벽면에 세워 두기까지 하자 집 안이 훨씬 멋져졌다.

<▶ 필수 퀘스트 (1/2)

- 적절한 가구 들이기 (100/100%)

- 인테리어 소품 배치하기 (64/100%)>

어느새 두 번째 필수 퀘스트도 반절 넘게 진행됐다.

“내가 준비한 소품만으로는 아직 부족한가 보네.”

희나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되도록 퀘스트는 한 번에 끝내고 싶었는데, 지금 모델 하우스의 상태는 시스템의 마음에 영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직 휑한 구석이 있어.’

원체 넓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다 보니, 생활감이 부족해 보인다고나 할까?

그래서 소품들을 더 구입하는 동시에 ‘홈 스위트 홈’에서 읽지 않는 책 몇 권과 쓰지 않는 물건 몇 개를 가져다 놓기로 했다.

‘아. 칫솔이나 수건 같은 것도 넣어 둬야겠다. 여기 사는 척하려면 말이야.’

희나는 완전 범죄를 위해 구매해야 할 물품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채워 넣었다.

그때였다.

시스템 창이 반짝이며 퀘스트 창에 내용이 추가됐다.

“엥?”

<▶ 부가 퀘스트 (0/1)

- 이웃을 불러 새집 자랑하기 (0/100%)

※ 부가 퀘스트 완료 시 추가 보상 아이템 지급 (B등급 이상의 방어 아이템을 보장함)>

필수 퀘스트와 달리 부가 퀘스트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퀘스트였다.

하지만 부가 퀘스트의 보상이 엄청났다.

‘홈 스위트 홈’을 레벨 업 할 때마다, 희나는 랜덤 뽑기로 아이템을 받아 왔다. 하지만 아이템들은 결국 생활용품에 불과했다.

희나가 생활 관련 스킬의 소유자라 나오는 아이템들도 전부 생활 관련한 것들밖에 없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번 퀘스트 보상은 달랐다.

“B등급 이상의 방어 아이템을 보장한다고?”

무려 방어 아이템이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것도 B등급 이상의 고급 방어구가 말이다!

전투에 사용하는 아이템의 가치는 일반 아이템의 몇 배를 호가했다. 목숨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뭐든 나오면 대박인 거잖아?’

대체 시스템이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 주는지는 몰라도, 희나는 땡잡은 거였다.

‘올해 운수가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내가 하고 다녀야겠다.’

희나는 미래에 받을 B급 이상 방어구의 사용처까지 미리 정해 두었다.

벌써 7월이었다. 올해의 절반이 훌쩍 지나간 상태였다.

지난 반년 동안 희나의 삶은 다이내믹하다 못해 멀미가 날 정도로 출렁였다.

난데없이 히든 클래스인 살림꾼으로 각성하질 않나, 살림꾼으로 각성하자마자 E급 던전에 떨어지질 않나, 회사와 집을 한꺼번에 잃지를 않나…… 일일이 나열하기도 입이 아플 정도다.

특히 그중 백미는 ‘던전과 거리가 먼 지극히 일반인다운 생활 도중 벌써 던전에 세 번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일반인이 갑자기 던전에 떨어질 확률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확률 정도 된다는데, 희나는 이 모든 확률의 벽을 이겨 내고 3연속 던전 나들이에 성공했다.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닌 필연 수준이었다. 던전이 희나를 부르고 있는 격 아닌가?

강진현이 희나가 갑자기 위험 상황에 처할 수 있다며 걱정한 것도 썩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희나는 시도 때도 없이 던전에 떨어지는 비전투계 능력자일 테니까.

희나도 내심 자신의 이상한 운발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특히 지난번, 잠들어 있는 강진현을 데굴데굴 굴리며 보스 몹을 처치할 때 얼마나 무력감을 느꼈는지 몰랐다.

‘몸을 지킬 만한 수단이 하나도 없다니!’

혹시나, 훗날을 위해 방어 아이템을 구입할까 했지만 억 소리 나는 가격에 희나는 구매 욕구를 살포시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한 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 퀘스트 보상으로 B급 이상의 방어구를 제시하다니!

시스템은 희나의 마음에 쏙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용했다.

“이사를 했으면 집들이를 하는 건 당연하지!”

희나는 손뼉을 짝짝 치며 당장 집들이 음식 메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 * *

집들이 초대 멤버는 단출했다.

최근 희나와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는 우민아와,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강진현이었다.

아니, 둘 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헌터라는 걸 감안하면 단출하다기보단 엄청난 멤버라고도 할 수 있었다.

희나는 두 사람과 자기들 남매의 먹성을 생각해서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준비했다.

아주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닐 때를 제외하면 누굴 집에 초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인생 최초로 가지게 된 내 집에 손님들을 초대하게 된 희나는 몹시 흥분해서 음식을 뚝딱뚝딱 만들어 냈다.

우선 잔칫집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메뉴인 잡채를 크게 한 바가지 무쳤다.

녹색, 주황색, 검정색…… 알록달록한 재료들 사이로 당면이 반들반들 윤택하게 빛났다. 마지막으로 고소한 참깨를 뿌려 버무려 주니 화룡점정, 완벽 그 자체였다.

갈비찜도 준비했다. 푹 쪄 낸 고기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달콤 짭짤한 양념이 침샘을 끝없이 자극했다. 이건 밥도둑이 아니라 밥 특수강도였다.

그 외에도 샐러드, 월남쌈, 김밥, 온갖 나물과 전 등등을 준비했다. 후식으로 샌드위치와 과일도 종류 별로 꺼낼 준비를 해 뒀다.

“명절 상 차리냐? 적당히 해. 몸 축나.”

폭주한 희나에게 희원이 몇 마디 던졌지만, 음식 만들기에 완전히 몰두한 희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앞을 스쳐 가는 시스템 창만이 보일 뿐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열심히 음식을 준비한 결과, 희나는 저녁 약속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상차림을 마칠 수 있었다.

“다 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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