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66화
“무슨 라면 좋아해요? 매운 라면? 해물 라면? 비빔 라면?”
“모르겠습니다. 너무 오래간만에 먹어 보는 것이라……. 어릴 적에, 그러니까 각성 전에 라면을 즐겨 먹었습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요.”
“라면 되게 좋아하셨나 봐요.”
“예.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간식으로 끓여 주시곤 했습니다.”
그런 추억이 어려 있는 음식이라면, 좋아할 만도 했다.
희나는 강진현을 위해 라면을 종류별로 구입했다. 매운 라면, 해물 라면, 짜장 라면, 비빔면, 우동 라면 등등……. 순식간에 카트가 수북해졌다.
몸에 좋지 않은 것이라 이렇게 많이 사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라면 묶음을 카트에 넣을 때마다 강진현의 눈빛이 반짝거리니, 그 기대를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기대됩니다. 제가 기억하던 그 맛이었으면 좋겠군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저버리랴?
희나와 강진현은 라면을 마지막으로 장보기를 끝냈다. 필요한 것만 샀는데도, 생각보다 부피가 컸다. 물론 수많은 라면 봉지도 부피에 한몫을 했다.
‘혼자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강진현은 마트 포장대에서 차곡차곡 짐을 정리했다.
S급은 물건 포장도 잘했다. 상자 안에 무겁고 단단한 짐부터 차곡차곡, 빼곡하게 쌓아 올렸다. 엄청나게 많아 보이던 짐이 커다란 박스 하나에 꾸역꾸역 다 들어갔다.
“갈까요?”
강진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커다란 상자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텅 빈 상자를 든 것처럼 가뿐해 보였다.
희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의외로 장 보는 데 1시간이 채 안 걸렸다.
강진현의 다음 스케줄까지는 1시간 하고 40분가량이 남아 있었다. 시간이 은근 넉넉했다.
“다음 스케줄 제때에 도착하려면 몇 시에 출발하셔야 한다고 하셨죠?”
“10분 전에 출발해도 충분합니다.”
그의 대답에 희나가 제안했다.
“그럼 라면 드시고 가실래요? 끓여 드릴게요.”
묵묵했던 강진현의 얼굴에 순식간에 환한 기색이 서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가리고 있는데도 확연히 드러날 만큼의 표정 변화였다.
“희나 씨가 끓여 주신다면 세 봉지도 먹을 수 있습니다.”
* * *
Q. 우선 강진현 헌터에게 우리의 인터뷰에 응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 같은 일반 월간지의 인터뷰에는 잘 응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나온 까닭이 궁금하다.
A. 헌터 협회에서는 일반인과 헌터 사이의 괴리감을 줄여 보고자 열심히 노력 중이다. 이 인터뷰도 그 일환 중 하나이다.
…… (중략) ……
Q. 평소에도 이렇게 스케줄을 혼자 다니는 편인가? 눈 깜짝할 사이 나타나서 우리 스태프가 몹시 놀랐다고 한다.(웃음)
A. 보통은 차를 타고 담당자와 동행하는 편이다. 오늘은 인터뷰 직전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혼자 움직이게 됐다.
Q. 대외비가 아니라면 그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는가? S급 헌터의 일상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일반인들이 많다.
A. 중요한 분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다 왔다. (이때 강 헌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운 좋게 본지의 포토그래퍼가 그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깊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Q. 중요한 분이라면…… (후략) …….
* * *
[강진현 ‘장미 50송이 로맨스’의 주인공, 누구?]
[헌터 강진현, ‘특별한 기류’ 포착?]
[‘일생에 단 하나뿐일 사랑’ 로맨스 소설 부럽지 않은 S급 헌터의 순정]
[냉미남 헌터가 보낸 미소의 주인공은?]
“으아아악!”
희나는 우민아가 보내 준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손이 덜덜 떨려서 휴대전화를 놓칠 뻔하기까지 했다.
“이거 너 맞지?”
우민아가 배를 잡고 깔깔깔 웃었다. 희나의 주방 곳곳에 놓인 빨간 장미꽃을 손가락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미 50송이짜리 로맨스가 여기 있네!”
“언니!”
희나는 테이블 위에 머리를 콩 박았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스캔들이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아니,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강진현의 요상야릇한 말버릇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런 기사가 지금에야 터진 게 이상한 것일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다 아는 S급 헌터답게, 강진현의 열애설은 온갖 포털 사이트를 후끈하게 불태웠다.
기자들이 헤드라인을 얼마나 민망하고 자극적으로 뽑아내는지 몰랐다.
만약 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희나도 재미있게 찾아봤을 만한 ‘카더라’ 소문도 많았다.
상대는 같은 청룡 길드 소속인 게 분명하다는 추측, 상대를 밝히지 않는 걸 봐선 일반인인 것 같다는 추측, 얼마 전에 강진현 같은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걸 봤다는 확실치 않은 증언.
심지어 이미 상대와 비밀 결혼식을 치렀고 둘 사이에 아이도 존재한다는 헛소리까지 있었다.
“너네 애는 언제 낳았냐? 애 이름은 뭐로 하려고? 아니, 결혼식 부케는 나한테 던져 주는 거다?”
우민아는 이 모든 기사와 지라시를 언급하며 희나를 놀려 댔다.
“언니! 그만 좀 놀려요! 저는 정말 심각하다고요! 그나저나 제 신변이 새어 나가는 건 아니겠죠? 그 전에 회사에서 아니라고 해명부터 해 주면 안 돼요?”
이런 전국구적 관심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다 혼미했다. 희나는 예의조차 잃고 우민아의 어깨를 잡아 찰찰 흔들었다.
우민아는 희나의 힘에 흔들려 주면서 계속 웃었다.
“크하하하!”
“언니이이!”
“강진현이랑 얼레리꼴레리 되더니 기세가 좋아졌다?”
“그게 아니란 거 알잖아욧!”
낄낄거리는 우민아를 향해 바락 소리 지르고 있을 때였다.
Rrrrr…….
사무실 데스크 위에 놓여 있던 내선 전화가 울렸다. 희나가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 울리는 전화였다.
“에잇!”
희나는 우민아를 있는 힘껏 째려보며 전화를 받으러 뛰어갔다.
“가…… 각성자 상태 관리팀장 이희나입니다.”
직위가 입에 익지 않아 하마터면 더듬을 뻔한 건 덤이다.
- 이희나 팀장, 오래간만이에요. 김규희 길드장입니다.
‘헉!’
희나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거의 하늘로 뛰어오를 듯이 놀랐다.
“기, 기, 길드장님? 안녕하세요?”
- 업무는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수고가 많아요.
“아, 예……. 감사, 감사합니다.”
- 그럼 본론부터 말할게요.
“네, 네넵!”
- 우리 잠깐 얼굴 좀 볼까 하는데. 업무적으로 지장은 없는지, 필요한 건 더 없는지…….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서.
“알겠습니다.”
- 일정 없으면 지금 당장 올라와요.
정말 용건은 그뿐이었는지 대답하자마자 전화는 뚝 끊겼다.
등 뒤로 진땀이 흘렀다. 무언가 타이밍이 심상찮았다.
‘열애설이 뻥 뜨자마자 걸려 온 전화라니…….’
길드장도 열애설의 상대가 희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혹시 사내 연애라고 생각해서 혼내려고 하는 것 아냐?’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어떻게든 변명해야겠다는 생각이 잔뜩 들었다.
“희나야? 무슨 일이야? 너 얼굴이 새파랗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우민아가 웃음을 뚝 그치고 다가와 희나의 안색을 걱정할 정도였다.
희나는 처량하게 대답했다.
“언니, 저 큰일 난 것 같아요. 길드장님이 지금 당장 보재요…….”
희나는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길드장실 앞에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우민아가 해 준 말을 주문처럼 외면서 말이다.
‘길드장님은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 길드장님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한다. 솔직하게만 군다면 길드장님은 화를 내지 않는다. 길드장님은 겨우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중얼중얼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으익!”
희나는 그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희나 씨, 괜찮으십니까? 들어오시지 않기에 문을 열었는데…….”
열린 문 너머에는 의아한 표정을 한 강진현이 서 있었다. 희나는 간신히 표정을 정리하고 물었다.
“진현 씨? 여긴 무슨 일로?”
“길드장님이 부르셨습니다.”
윽, 희나의 안색이 한결 창백해졌다.
‘역시 열애설 추궁하려고 불렀나 봐.’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동시에 조금 억울했다.
자기가 한 거라고는 강진현을 재워 주고 밥 먹여 준 것밖에 없는데, 전국구로 이런 뜬소문이 퍼져 버릴 줄이야!
다른 사람의 실수 때문에 상사에게 구박받는 기분이었다.
“들어오시죠.”
희나는 어쩐지 조금 꽁한 표정으로 길드장실로 들어갔다.
넓은 방 안에 이르자마자 김규희 길드장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커다란 소파에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앉아 있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눈빛이 반짝이는 게 도리어 이 상황에 흥미를 품은 듯 보였다.
“강진현 헌터, 이희나 팀장. 어서 앉아요.”
김규희 길드장은 낮은 테이블 너머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희나와 강진현은 소파에 나란히 착석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길드장 앞에 앉아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결혼 허락이라도 받으러 온 것 같은…… 으악!’
희나는 마음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방금 스캔들 기사를 보고 와서 그런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희나 씨? 무슨 일 있어요?”
김규희 길드장이 희나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희나는 애써 표정을 피고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닙니다. 길드장 님 뵈려니까 긴장이 좀 돼서요. 하하.”
“흠……. 그래 보이네.”
그녀는 한쪽 입술을 올려 가볍게 웃고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마 둘 다 내가 여기로 왜 불렀는지 짐작이 갈 거예요.”
“예에…….”
희나는 옆에 앉은 강진현을 흘끗거렸다. 사건의 원흉인 그가 먼저 나서 해명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저 폭탄을 터뜨린 건 김규희 길드장 측이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