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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65화 (6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65화

    희나 덕분에 몇 번 푹 잔 것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신기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보통 피곤하면 힘이 없어지는데, 반대로 넘쳐 나는 힘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니. S급의 힘과 체력은 대단하구나.’

    희나는 이렇게 가볍게 생각했을 뿐이지만, 사실 지금 강진현은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엄청난 무력을 가진 헌터였다. 그런데 이제 대단한 파괴력에 섬세한 제어력까지 갖추게 되었다는 소리 아닌가?

    강진현은 전 세계에 몇 없는 S급 헌터였다. 그런 강진현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섰으니, 이제 그는 정말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강인한 헌터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청룡 길드장이 직접 나서서 희나를 영입하려 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나의 평범하고 평화로운 사고방식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제 강진현이 커피를 덜 흘리고, 물건을 덜 망가뜨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간 일상생활이 불편하셨을 텐데, 개선되었다니 잘됐어요.”

    희나는 진심으로 강진현을 축하해 주었다. 그러면서 엄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내저었다.

    “하지만 설거지 해 주시는 건 오늘만이에요. 이건 엄연히 제 업무인걸요. 거기다 저는 이런 살림으로 숙련도를 쌓는 살림꾼이에요. 제가 할 일을 진현 씨가 대신 해 주시면, 스킬 랭크 업에 지장이 갈 수도 있어요.”

    사실 설거지 몇 번으로는 스킬 숙련도에 영향도 안 갈 게 분명했지만, 희나는 괜히 엄청난 걸 방해했다는 듯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강진현이 매일같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 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온순한 듯 보여도, 은근히 고집이 센 측면이 있었다. 미리 큰소리를 쳐 둬야 했다.

    “그나저나 꽃다발은 하필 왜 장미로 사 오신 거예요?”

    무어라 대꾸할까 봐 희나는 재빨리 대화 주제를 바꿨다.

    “장미를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강진현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뇨. 꽃 받는 거 좋아하죠. 그런데 축하나 사과의 의미로 새빨간 장미를 주는 건 흔치 않으니까요.”

    희나도 상식은 있었다. 저런 풍성한 장미 꽃다발은 드라마에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한테 사랑을 고백할 때나 쓰는 거였다.

    다만 이 장미를 준 상대가 강진현이었기에 아무런 로맨틱한 의심을 품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예전부터 요상야리꾸리한 방식으로 희나의 요리 솜씨를 향해 구애해 온 바가 있었으니까.

    희나의 지적에 강진현이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꽃집 주인에게 어떤 꽃이 좋을지 조언을 얻었는데, 조언이 틀렸나 보군요.”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제 일생에 다시 찾아오지 않을 소중한 사람에게 줄 꽃이라고 했습니다.”

    “아하…….”

    그가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이야기했을지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일생에 다시 찾아오지 않을 소중한 사람…….’

    누가 들어도 정열의 붉은 장미가 필요해 보이는 멘트였다.

    희나는 허허 웃었다.

    “진현 씨는 정말이지…… 대단한 화술을 지니고 계시네요.”

    이 화법에 여러 번 당해 보지 않았더라면, 저도 모르게 홀라당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말주변이 없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 봤습니다만, 화술을 칭찬해 주신 건 희나 씨가 처음입니다. 기쁘군요.”

    강진현은 수줍게 희나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희나는 강진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후 1시였다.

    바쁜 사람의 시간을 너무 오래 잡아먹은 것 같아 슬그머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진현 씨,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은데.”

    “할 일이 있으십니까?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강진현이 희나의 향후 일정에 호기심을 보였다. 희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고요, 간단히 장 좀 봐 두려고요. 주방에 기본 재료는 갖춰져 있는데, 채워 넣어야 할 게 꽤 보여서요.”

    더불어 식사 후 대접할 만한 과일이나 음료도 사고 싶었다. 점심을 잘 먹었더니 입이 심심했던 탓이다.

    “아차, 혹시 드시고 싶은 것 있으세요? 음식 말씀해 주시면 재료 사서 만들어 드릴게요.”

    희나는 종이에 사야 할 것들을 끄적끄적 적어 넣었다. 사실, 어지간한 건 회사를 통해 구매 요청을 올리면 들여올 수 있었다.

    하지만 희나는 직접 장 보는 것을 좋아했다. 쓰지 않을 물건을 구경하는 것도, 가격을 비교하고 좋은 품질의 물건을 사는 것도 모두 희나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희나는 앞으로 직접 장을 봐 식사를 차릴 생각이었다.

    ‘법인 카드도 받았으니까 이걸로 필요한 건 마음껏 긁을 수 있겠다.’

    강목현 인사팀장이 내준 법인 카드도 열심히 긁을 생각이었다.

    청룡 길드는 1000원, 2000원에도 예민했던 예전 회사처럼 쩨쩨하지 않았다.

    희나는 자기가 받은 법인 카드의 최고 한도 금액과 각 부서별 지출 내역을 듣고 경악했더랬다.

    지출 결의 수준이 달랐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게 아니라 마트를 사도 될 정도의 규모였다.

    한편, 나갈 채비를 하는 희나의 곁에 강진현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마트에 가신다고요? 저도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무의식적으로 “그럼요.” 하고 대답할 뻔했을 정도였다.

    “그럼……니요!”

    “예?”

    “진현 씨는 오늘 오후 스케줄 있지 않으세요? 미리 준비하셔야죠.”

    희나는 오후 3시에 있는 스케줄을 지적했으나, 강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딱히 준비할 것도 없고, 금방 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저는 희나 씨와 함께 장을 보고 싶군요.”

    “하지만…… 진현 씨는 너무 유명해서 사람들이 모두 알아볼 텐데…….”

    주저하자, 강진현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소매 끝단이 너덜너덜한 천때기였다.

    “로브를 착용하면 됩니다. 존재감을 흐리게 해 주니, 일반인들은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참고로 이 로브는 희나와는 구면인 아이템이었다.

    공간의 조각 때문에 강진현과 함께 던전에 떨어졌을 때, 강진현이 희나에게 입혀 주었던 로브였다.

    희나의 팔다리 길이에 맞춰 기장을 줄였던지라, 강진현이 입으니 깡똥하니 꼴이 우스웠다.

    “이렇게 입고 나가면 진현 씨의 사회적 체면이 많이 구겨질 것 같아 보이는데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대한민국 최고의 S급 헌터라니. 누구한테 사진이라도 찍힐까 봐 두려웠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희나 씨와 함께 나가고 싶습니다. 제가 짐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강진현은 끝까지 분리 불안증 있는 강아지처럼 희나를 졸랐다.

    “그렇게까지 원하신다면야 뭐…….”

    결국, 희나는 강진현의 고집에 넘어가 줄 수밖에 없었다.

    * * *

    희나는 해산물 코너에 멈추어 섰다.

    “갑오징어 좋아하세요? 이거 맛있는데.”

    카트를 돌돌 밀며 따라온 동행인에게 취향을 묻자, 그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 본 적은 없지만 맛있을 것 같습니다.”

    검은 챙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낀 강진현이었다.

    “그럼 이 김에 한번 드셔 보셔요. 초고추장이나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먹으면 보들보들해서 맛있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해 드릴게요.”

    희나와 강진현은 로브를 입는 것에 대해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적당히 타협을 봤다.

    거지 왕초 누더기 같은 로브를 입지 않는 대신, 연예인처럼 얼굴을 푹 가리기로 한 것이다.

    강진현에게 캐주얼한 후드 티와 청바지를 입히니 유명한 모델이나 배우가 나들이를 나온 것처럼 보이지, S급 헌터가 마트에 장을 보러 나온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길쭉한 기럭지를 가진 강진현이 카트를 밀고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모였다.

    모자와 마스크로는 강진현의 정체는 가릴 수 있었지만, 잘생김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S급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사람들이 들러붙지는 않는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강진현은 카트를 끌며 희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시선이 조금 붙는다는 걸 제외하면 강진현은 아주 좋은 장보기 메이트였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는 먼저 나서서 앞을 뚫어 주었고, 좁은 구석도 날렵하게 잘 지나다녔다.

    무거운 건 먼저 나서서 들어 옮겼으며 이걸 사라 말아라, 참견도 별로 안 했다.

    묵묵한 짐꾼이었다. 아주 듬직했다.

    마트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을 때쯤이었다. 강진현의 발걸음이 어딘가에서 우뚝 멈췄다.

    희나는 뒤늦게 등 뒤의 인기척이 사라진 걸 깨닫고 뒷걸음질했다.

    “어? 왜 그러세요?”

    그는 무엇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저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눈빛이 이글거렸다.

    “뭘 그렇게 보시는……. 라면 먹고 싶어요?”

    희나는 강진현의 시선 끝에 있는 코너를 발견했다. 라면을 묶음째로 할인해서 팔고 있는 행사 매대였다.

    “예. 먹고 싶습니다.”

    희나가 뭘 먹고 싶으냐고 물어도 뭐든 좋다고 대답하던 그였다. 그런 강진현이 이렇게 강렬하게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의지를 표출한 건 처음이었다.

    비록 그게 인스턴트 라면이라고 해도, 꽤 반가운 일이었다. 희나는 카트 방향을 틀어 잡아당겼다.

    “우리 라면 사러 갈까요?”

    “예. 좋습니다.”

    강진현의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흥분이 섞여 있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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