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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64화 (64/228)
  • 던전 안의 살림꾼 64화

    “……이 두 가지 사항을 지켜 주신다면, 그 외에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하셔도 됩니다.”

    이미 합의한 바이긴 했지만 놀라운 조건이었다.

    “제가 작성할 서류라든지, 참석할 회의 같은 건 없고요……?”

    “없습니다. 월말마다 월례 팀장 회의가 있긴 합니다만, 참가 여부는 자유입니다.”

    강목현은 대답하며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했다.

    “저는 이 뒤에 미팅이 있어서 이만 먼저 자리를 뜨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저나 우민아 팀장, 혹은 강진현 헌터를 통해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 예.”

    바쁜 사람을 더는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희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강목현 인사팀장을 배웅했다.

    “안녕히 가세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부디 강진현 헌터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 또한 가볍게 목례하며 담백한 어조로 동생의 안위를 부탁했다.

    강목현을 보내고 난 뒤, 희나는 개인 사무실과 조리 공간을 다시 한번 쭉 돌며 구경했다.

    “와!”

    이 공간을 혼자 사용할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희나, 출세했네.”

    희나는 찰칵찰칵 내부 사진을 찍어 오빠에게 전송했다.

    청룡 길드의 각성자 관리팀은 대외에 밝힐 예정이 없는 부서라서 자랑할 만한 사람이 가족인 오빠밖에 없었다.

    하지만 희원은 열심히 밭일 중인지 희나의 자랑 섞인 사진을 확인하지 않았다.

    “……에이.”

    반응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금방 흥이 식었다. 희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강목현이 남기고 간 파일철을 열어 보았다.

    첫 장에는 강진현의 프로필이 개략적으로 적혀 있었다. 언론에 알려진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 뒤에는 해당 월의 스케줄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되게 여유로워 보였는데, 생각보다 바쁜 사람이었구나.’

    길드 일에 문외한인 희나가 보기에도 뭐가 많아 보였다. 아무래도 S급 헌터이고, 청룡 길드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대외 활동도 잦았다.

    ‘하긴. 나도 청룡 길드 입사하기 전에 진현 씨를 글이나 영상으로 많이 접했으니까.’

    희나는 손가락을 주욱 내려 오늘 자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어디 보자……. 오늘은 오전, 오후 인터뷰가 하나씩 있구나.”

    지금은 오전 11시였다. 오전 인터뷰가 거의 끝나 갈 시간이었다. 오후 스케줄은 3시에 잡혀 있어, 시간이 넉넉했다.

    [강진현 헌터님: 희나 씨, 방금 인터뷰가 끝났습니다.]

    [강진현 헌터님: 길드에 다시 들러 희나 씨와 식사를 하고 갈 생각입니다.]

    때맞추어 강진현에게서 점심은 어떻게 할 것인지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그 생각 하고 있던 건 어떻게 알고……. 양반은 못 되시겠네.”

    희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답장했다.

    [방금 새 사무실 들어왔어요. 좋네요. 여기서 점심 드시고 가시면 될 듯해요.]

    [강진현 헌터님: 최대한 빨리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제법 알콩달콩해 보이는 문자 내역이었다.

    하지만 대화의 장본인인 희나는 그걸 자각하지 못했다. 새 주방을 사용해 볼 기대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 도시락 싸 왔는데 꺼내서 데워 놔야겠다.”

    물론 전자레인지로 데울 수도 있겠지만, 이왕 제대로 된 주방을 가지게 된 김에 차근차근 시동이나 걸어 볼 생각이었다.

    희나는 냄비와 프라이팬, 그릇을 꺼내 박박 닦았다. 그리고 싸 온 도시락 반찬을 따끈하게 데웠다.

    매콤한 고추장찌개는 뚝배기에 담아 보글보글 다시 끓였고, 마늘쫑 햄 볶음도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 온기를 더했다.

    미리 지어 온 밥까지 전자레인지에 뜨끈뜨끈하게 데우고 나니, 누군가가 사무실을 노크했다.

    똑똑.

    “누구세요?”

    “강진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희나는 황급히 손을 씻고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벗었다. 착장 버프가 사라진다는 창이 반짝 떴다 사라졌다.

    흐트러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빗는 사이 강진현이 성큼성큼 희나를 향해 걸어왔다.

    “진현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강진현은 인사와 함께 커다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얼떨떨한 상태로 살피니, 화려한 꽃다발이었다.

    “받아 주십시오.”

    그는 다시 한번 희나에게 꽃다발을 들이밀었다. 희나는 조금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 이건?”

    “꽃다발입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뒤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이건 꽃다발이었다. 그것도 피처럼 붉은 장미 꽃다발.

    희나는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를 물은 게 아니었다.

    “갑자기 꽃은 왜?”

    난데없이 꽃 선물을 받을 까닭을 몰라서였다.

    물론 꽃다발에서 로맨스의 ‘ㄹ’ 정도는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축하 겸 감사 겸 사과의 의미로 가져왔습니다.”

    물론 강진현도 만만찮긴 매한가지였다.

    그는 이토록 새빨간 장미꽃 한 다발을 가져다 바치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주 진중하고 진지했다.

    “며칠 전, 술에 취해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희나 씨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지요.”

    그는 희나에게 희한한 주사를 보인 걸 사과했다. 표정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진현 씨는 술에 취하셨어도 아주 얌전했어요.”

    희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애당초 술 못하는 사람에게 진탕 먹여 댄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강진현은 그 일에 대해 할 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덕분에 회사 측으로부터 블랙 카드를 받아 가구를 장만한 희나에게는 다 지난 일이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우선 앉으세요. 점심이 식겠어요.”

    희나는 강진현이 내민 장미꽃다발을 받아 들고 그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마침 상차림을 막 끝낸 상태라 곧장 밥을 먹으면 됐다.

    “오늘 점심은 어떻게 될지 몰라서 도시락을 쌌어요. 앞으로는 여기서 직접 요리해 드릴게요. 그편이 훨씬 더 맛좋을 거예요.”

    따끈한 반찬을 앞으로 밀어 주며 식사를 권하자, 강진현은 감격한 표정으로 수저를 들었다.

    “드셔 보세요. 방금 데운 거예요.”

    “잘 먹겠습니다, 희나 씨.”

    강진현은 사양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따끈한 밥을 한술 뜨고 반찬을 입에 넣은 그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누가 봐도 ‘정말 맛있어요!’ 하고 외치는 듯한 표정이었다.

    ‘밥해 주는 보람이 있는 사람이야.’

    희나는 그런 강진현의 표정을 반찬 삼아 밥을 먹었다.

    자기가 만든 음식을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차는 기분이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무엇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완벽한 맛이었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끝낸 강진현은 희나의 사무실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다.

    양껏 배부른 숫사자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부족한 듯 입맛을 다시는 게 우스웠다.

    희나는 어째서 강진현이 떠나지 않는지 의아했다.

    ‘밥 먹고 과일을 안 내놔서 안 가는 건가?’

    자고로 한국인이란 식사를 하고 숭늉이라도 들이켜야 하는 법인데, 그런 걸 준비하지 않아서일까?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맛있게 먹었으니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강진현이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 싱크대로 향했다.

    “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강진현은 일상생활에서 굉장한 똥손이었다. 커피를 타 오면 절반은 바닥에 흘리고, 캔 음료는 따는 대신 폭파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설거지라니!

    ‘예쁜 그릇들을 개시한 지 하루 만에 깨뜨리고 싶지 않아!’

    그의 손에 잡힌 식기들의 미래가 눈에 훤했다.

    “이건 제 일이니까 제가 할게요!”

    “괜찮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후다닥 달려가 강진현을 막아 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강진현은 S급 헌터다운 재빠름으로 수세미와 접시를 집어 들었다.

    ‘꺅! 안 돼!’

    희나는 차마 접시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기가 두려워 양손으로 눈을 꼭 가렸다. 그런데.

    달그락, 달그락, 쓱쓱.

    하지만 예상했던 쨍그랑 소리 대신 수세미가 부드럽게 접시를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의외의 상황에 희나는 손가락 틈 사이로 강진현의 설거지를 훔쳐보았다.

    “……어?”

    놀랍게도 그는 멀쩡히 힘을 조절하며 접시를 닦고 있었다.

    “설거지는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각성 전, 부모님을 도와서 했던 게 다입니다.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새롭군요.”

    심지어 태연히 대화까지 주도했다. 희나가 아는 ‘말썽꾸러기 헌터 강진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희나는 그의 옆에 서서 설거지하는 모습을 멀뚱히 구경하다 입을 열었다.

    “어……. 오래간만에 하시는데도 되게 잘하시네요.”

    각성 전이면 10여 년 전 일일 텐데, 손길이 어색함 없이 자연스러웠다. 재빠르고 효율적이었다.

    그릇이 그다지 많지 않았으므로 설거지는 금세 끝났다.

    “다 했습니다.”

    강진현은 설거지를 끝내고 싱크대의 물기까지 깨끗이 제거했다. 행주까지 꼭꼭 빨아 놓는 걸 보니 가정 교육을 아주 잘 받은 티가 났다.

    의외의 광경에 희나는 지금 자기가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봐야 했다.

    그런 희나의 얼굴을 어떻게 읽었는지, 강진현이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빙그레 웃었다.

    “제가 사고를 치지 않아서 의외라는 표정이시군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게, 으음……. 예.”

    희나는 끙끙거리며 변명하려다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우선 앉을까요?”

    강진현은 식탁 의자를 빼서 앉기를 권했다. 그 태도가 몹시 정중했다.

    자리에 마주 앉자마자 강진현이 운을 뗐다.

    “제가 여러모로 희나 씨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보아 알고 계실 겁니다.”

    “뭐……, 썩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이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긴장하거나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는 힘 조절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희나 씨 덕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좀 더 정교한 힘 컨트롤이 가능해졌습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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