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58화
밝은 대낮에 안겨 이동할 때도 무서웠는데, 컴컴한 밤에 빠르게 쉭쉭 시야가 바뀌니 더더욱 정신이 없었다.
‘으아. 무서워.’
희나는 저도 모르게 강진현의 목에 꼭 매달려 눈을 감았다.
“……금방 도착합니다. 이번에는 어지럽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 희나를 향해 강진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희나의 머리카락이 시원한 밤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렸다. 귓가에 도시의 소음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강진현은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희나의 정신이 쏙 빠진 사이, 강진현은 어느새 어딘지 모를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외부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희나는 꼭 내리감았던 두 눈을 조심스레 떴다.
“여기는?”
그곳은 어느 집의 베란다였다. 현관이 아닌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것 같았다.
‘설마 불법 주택 침입은 아니겠지?’
등 뒤로 진땀이 흘렀다.
희나는 다음 날 ‘K 모 S급 헌터, 불법 가택 침입 혐의로 수사 중’이라는 헤드라인은 보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그의 공범자는 더더욱 되고 싶지 않았고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강진현은 희나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이곳은 제 집 중 하나입니다. 제가 사는 곳이니,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합니다.”
그는 희나를 바닥에 내려 주고, 어딘가에서 슬리퍼를 가져와 내주었다. 술에 취해 있는데 이상한 데서 상식적이었다.
“어……. 이곳이 진현 씨가 사는 곳이군요.”
희나는 얼떨떨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결에 S급 헌터의 집을 구경하게 되었다.
불이 켜진 집 안은 몹시 고요하고, 깨끗했다. 사람 사는 흔적이 거의 없었다. 최소한의 가구만이 배치되어 있었고, 인테리어는 무채색이었다.
한 사람이 살기에는 큰 집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대한민국 유일의 S급 헌터가 살기에는 작아 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익숙한데.’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 안 곳곳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이곳은 고급 아파트로 보였는데, 이상할 정도로 내부 구조가 익숙했다.
“……이리로.”
강진현은 주변을 구경하고 있는 희나의 팔을 끌어다 어떤 방으로 데리고 갔다. 희나는 그 손을 따라 엉거주춤하게 걸어갔다.
사실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외간 남자의 집에 들어와 으슥한 방 안으로 함께 들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딱히 두렵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강진현 헌터이기 때문일까?’
‘헌터 강진현’에 대한 믿음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알고 보면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잘 훈련된 훈련견 같았고, 희나에게 해를 끼칠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몇 달간 희나가 파악한 강진현은 그랬다.
지금도 희나를 깍듯하게 대하다 못해, 자칫하다가는 깨어질지도 모를 보물처럼 소중히 대하고 있었다.
“……앉으십시오.”
강진현은 희나에게 침대에 앉기를 권했다. 침대는 몹시 푹신하고 편안해 보였다.
“이곳에서 가장 아늑하고 안전한 장소입니다.”
그는 가장 소중한 보물을 굴속에 꼭꼭 숨기는 짐승 같았다. 희나를 침대 위, 이불 속에 들이고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가, 감사합니다.”
로맨틱한 상황이었지만, 희나의 연애 세포는 녹이 잔뜩 슬어 삐걱댈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로맨스를 찾기는커녕, 그저 자기가 강진현이라는 강아지가 땅속에 묻은 소중한 뼈다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인식이었다.
취한 사람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취중 진담처럼 진심일 수 있다는 걸, 평생 취해본 적 없는 희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진현 씨도 이제 주무셔야죠.”
희나는 강진현을 살살 달랬다. 그는 희나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몽롱했는데, 기분은 좋아 보였다.
“저는 이대로 희나 씨를 지키면 됩니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침대 가에 등을 댔다. 그리고 주변을 경계했다.
정말로 특이한 주사였다. 폭력적인 주사는 아니었지만, 은근히 손이 많이 갔다.
‘앞으로 강진현 헌터한테는 술 많이 먹이면 안 되겠다.’
희나는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며 침대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스킬을 시전하기 위해서였다.
흐트러진 침대 위를 정돈하고, 이불을 판판하게 폈다. 매트리스를 팡팡 두드리며 마무리하자, 강진현이 희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으로 무엇을 하느냐 묻고 있었다.
“진현 씨, 이리 오세요.”
“……예?”
“여기 한 번만 누워 봐요. 네? 착하죠?”
희나는 침대 위를 토닥거리며 강진현을 꾀어냈다.
“여기 잠깐 누우면 다음에 맛있는 것 해 줄게요. 뭐 좋아한다고 하셨죠?”
그가 수줍게 중얼거렸다.
“……희나 씨가 해 주신 건 다 맛있습니다.”
“그럼 다 해 드릴게요.”
그 말에 강진현이 머뭇거렸다.
“……하지만 저는 경계를 서야 하는데.”
대답을 들어 보니, 거의 다 낚은 것 같았다. 희나는 속으로 환호를 지르며 방긋방긋 웃음 지었다.
“괜찮아요. 여기 누워서 지켜 주시면 되죠. S급 헌터시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금방 벌떡 일어나실 수 있잖아요?”
“……맞습니다.”
강진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 취한 그는 평소보다 몇백 배는 단순했다. 사탕 하나와 마석 한 개를 바꾸자 해도 바꾸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희나는 그런 나쁜 짓을 하는 대신, 주정뱅이를 눕히는 데 총력을 다했다. 술 취한 사람 처리하는 데는 잠만큼 깔끔한 게 없었다. 일단 재우면 거의 다 해결됐다.
“……그럼, 잠시만 눕겠습니다.”
주정뱅이가 드디어 희나가 만들어 둔 덫에 걸려들었다. 그는 척척 침대 위로 올라와 베개에 머리를 가져다 댔고, 작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하나, 둘, 셋.
속으로 셋을 세자마자 깊은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희나의 ‘안락한 침상’ 스킬에 걸려든 것이다.
예전에는 A급 침낭의 효과가 중첩되어 강진현을 재웠다면, 이번에는 술기운이 강하게 돌아서 금방 잠든 것 같았다.
“어휴. 그때는 안 깨서 난리였는데, 이번에는 재우느라 고생했네.”
희나는 새근새근 잠든 강진현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이 지워지고, 평화로운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해 잠든 사람 같지 않았다.
‘하긴. 얼굴에 술 취한 게 하나도 안 보였어.’
헛짓거리를 해 댈 정도로 취했으면서, 강진현은 눈빛이 흐려진 것 빼고는 낯빛 하나 안 변했다.
육체 능력도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는 우민아의 옆구리 찌르기를 쉽게 피해 냈고, 희나를 안고 어두운 도시의 상공을 날고 뛰었다.
바뀐 건 어투와 행동뿐이었다. 어조가 조금 느릿해졌고, 행동을 종잡을 수 없게 됐다.
사실 술에 만취했다는 걸 생각하면 강진현은 꽤 신사적인 주정뱅이였다.
다만 종잡을 수 없게 변한 행동이 보통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원래도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뜬금없었어.’
상대의 귀갓길을 걱정하다 못해 자기 집에 데려와 지켜 주겠다고 하다니. 비약도 이런 비약이 없었다.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심조심 침대를 내려왔다.
침대는 장정 셋이 누워도 충분할 정도로 커다랬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예전 희나의 ‘홈 스위트 홈’ 원룸 방만 했다. 물론 크기에 과장을 곁들인 쪽은 원룸 방이었다.
아무튼, 강진현은 그 침대 한가운데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배꼽 위에 올리고 있는 게 딱 잠자는 숲속의 미남 같았다.
희나는 잠든 강진현의 어깨 위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몸을 감싼 이불이 포근하게 느껴졌는지 강진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런 상대에게 조용조용 작별 인사를 건네고 희나는 살금살금 걸어 방 밖으로 나왔다.
왠지 남들에게 말 못 할 비밀을 몰래 만든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강진현을 고이 재운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희나는 던전에서 강진현을 넉다운 시킨 전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는 진현 씨 집이잖아.’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들어와 상대를 재우고 나간다니……. 앞뒤 정황 없이 본다면 야릇해 보이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술기울이 도나, 왜 이렇게 덥지?’
괜스레 뺨이 붉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희나는 혹여나 집주인이 깨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움직여 방문을 닫았다.
‘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방 안의 풍경을 떠올렸다. 창문에는 암막 커튼 같은 게 잔뜩 쳐져 있었다. 어두운 침실이었지만, 방 안에 가구가 침대 외에는 전혀 없다는 사실 정도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삭막하네.’
잠에 깊게 빠지지 못한다더니, 정말 수면에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치워 놓은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방 안은 방음 처리라도 했는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했다.
“오늘은 집에서 푹 주무실 수 있겠다.”
시커먼 남정네의 집에 들어온 거지만, 어쨌든 며칠 후부터는 해야 할 업무 중 하나였다. 희나는 이걸 며칠 일찍 업무를 시작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한편으로 추가급을 받아야 하나, 하고 직장인 뇌가 잠깐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전 받은 집 세 채의 가격을 떠올리니 이 정도 추가 근무는 서비스인 셈 칠 수 있었다.
[이희원: 어디야? 좀 늦는 것 같다? 오색이가 찾는다.]
[이희원: 무단 외박 규탄한대. 오늘 꼭 들어와라.]
[이희원: 늦어서 무서우면 데리러 갈까?]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