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57화
강진현은 잘생긴 이마를 식탁 위에 얹고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보여 주지 않을 만큼 풀어진 모습이었다.
“진현 씨, 무슨 일 있으세요?”
희나는 걱정이 되어 냉면을 먹다 말고 엎어진 강진현을 불렀다. 그러자 이마를 식탁에 대고 있던 강진현이 부스스 일어났다.
“……아무 일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다시 일어난 그의 모습은 아주 말짱해 보였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졌으며, 시선이 다소 흐리멍덩해졌을 뿐이었다.
“얘 취한 거 아냐?”
물냉면 한 그릇을 마시다시피 한 우민아가 팔꿈치로 강진현을 툭툭 쳤다. 아니, 툭툭 치려 했다.
“……하지 마십시오.”
강진현이 느릿하게 말하며 우민아의 팔꿈치를 피했다. 취했다기에는 몸놀림이 날렵했고, 그렇다고 안 취했다기에는 말하는 게 평소보다 훨씬 느리고 혀가 둔했다.
“취하셨어요? 괜찮으세요?”
희나는 슬쩍 테이블 옆에 쌓인 소주병을 보았다. 한 번에 다 세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얼추 스무 병은 넘어 보이는 양이었다.
‘우리가 언제 저렇게 많이 마셨지?’
처음에는 천천히 한 병씩 시켜 마시다 술이 너무 빨리 동나는 바람에 한 번에 네댓 병씩 시켰던 기억도 났다.
작은 술잔에 이슬을 꽉꽉 눌러 담고, 잔이 비는 동시에 술을 채웠던 것도 기억났다. 소의 온갖 부위를 안주 삼아 술을 꿀떡꿀떡 비웠더랬다.
“너야말로 괜찮아? 술 잘 마시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우민아가 강진현을 살피는 희나를 걱정해 주었다. 희나는 우민아에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
“언니, 저는 괜찮아요. 적당히 알딸딸하고 기분 좋아요, 지금.”
희나는 타고난 말술이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한도 이상으로 취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불편한 점이라고는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살짝 더부룩한 것뿐이었다.
“언니는 괜찮아요?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네요.”
우민아도 희나 못지않은 말술이었는데, 오늘은 좀 많이 마시긴 했는지 얼굴이 불콰하게 물들어 있었다.
“나야 이 정도야 자주 먹지. 하하!”
하지만 그녀 또한 기분이 들떴을 뿐 의식은 멀쩡해 보였다.
그런고로 이 중에서 가장 멀쩡해 보이지 않는 사람을 고르라 하면, 바로 강진현이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 또한 괜찮다고 주장했지만, 평소보다 말이 어눌한 게 영 어설펐다.
표정만 멀쩡하지, 하는 행동은 어딜 봐도 취한 사람이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나고, 말이 느려지고…….
“S급 헌터도 술에 취하나 보네요.”
의외의 광경이었다. 그 어떤 위험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은 강진현이 고작 소주 몇 병에 해롱거리고 있다니…….
“그러게. 고랭크로 올라갈수록 알코올 면역력도 높아져서 잘 안 취하는데.”
우민아가 혀를 쯧쯧 찼다.
“얘는 진짜 술 못 마시는 체질인가 보다. S급이나 되어 놓고는 고작 이 정도 마시고 취하다니.”
그 와중에 강진현은 우민아의 말을 알아듣고 깨알같이 반박했다.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말짱하다고 주장하는 주정뱅이의 말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희나와 우민아는 강진현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언니도 강진현 헌터 취한 건 처음 보나 보네요?”
“어. 얘는 입 짧아서 뭐든 많이 안 먹거든. 밥도 그런데 술이라고 많이 마시겠어?”
거기다 보통 세 사람이서 스무 병이 훌쩍 넘는 이슬을 비울 만한 일도 그리 흔치 않았다. 어지간한 주당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아마 이렇게 만취한 건 처음이지 않을까?”
우민아가 쑥덕거리며 휴대전화를 들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희나는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 언니? 뭐 하시는 거예요?”
“이거 찍어서 나중에 강 헌터한테 보여 주려고. 인사팀장도 좋아할 것 같아.”
만취한 모습을 찍어서 보여 주겠다니, 악마가 울고 갈 만했다. 희나는 그런 우민아를 말려 보려다 포기했다. 우민아도 기분 좋게 취한 것 같았다. 자고로 술 취한 사람은 말려 봤자 남는 게 없는 법이다.
대신 희나는 남은 냉면을 호로록 빨아들였다. 한 그릇에 만 원이 넘는 비싼 냉면답게 매콤 새콤한 비빔냉면이 아주 감칠맛 났다.
엄청난 금액의 술값과 고기값은 우민아가 계산했다.
희나는 언뜻 본 영수증에 놀라 별로 취하지도 않았던 술이 다 깨 버렸다. 금액이 희나네 집 한 달 치 식비를 훌쩍 초과했기 때문이다.
“헉.”
이제 집이 세 채나 있는 부자인 희나였지만, 마음만은 가녀린 소시민이었다.
“강 헌터한테 계산시키려고 했는데, 오늘 좋은 구경 시켜 줬으니까 내가 쏜다!”
우민아가 낄낄거리며 그들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멀쑥한 남자를 손가락질했다. 강진현이었다.
그는 조금 졸린 눈빛을 하고 희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진현 씨, 집 잘 찾아가실 수 있겠어요?”
희나는 그런 강진현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우민아가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라는 듯 어깨를 퍽퍽 쳤기 때문이다.
“쟤는 길바닥에 누워 자도 몸 하나 안 결릴 녀석이야.”
하긴 그건 그랬다. 지난번에 대왕 버섯 던전에서도 그랬다. 그렇게 굴리고 던지고 때렸는데도 꿈쩍하지 않았으니까.
“……길바닥에서 자지 않습니다. 길바닥은 시끄럽습니다.”
한편, 강진현은 남아 있는 정신으로 꼬박꼬박 말대꾸했다. 자기는 오감이 예민해서 사람과 차가 다니는 밖에서는 더더욱 잠들지 못한다고도 했다.
한없이 중얼거리는 강진현의 모습에 우민아가 혀를 찼다.
“그래, 그래. 알았다. 너 대단한 S급이다. 됐지?”
그제야 강진현은 만족했다.
“……예.”
동시에 작게 미소 지었는데, 나른한 낯에 웃음기가 서리자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우와.’
희나는 잠깐 넋을 잃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시 사람은 얼굴이 최고였다. 행동은 영 푼수 같아도 얼굴이 잘생기니 되레 분위기 있어 보였다.
“쟤도 많이 취했으니까 2차 없이 파하자.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 너도 잘 들어가고. 강 헌터도 알아서 집 들어가서 쉬고.”
우민아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희나의 ‘홈 스위트 홈’ 스킬을 알고 있기에 딱히 데려다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민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저……, 진현 씨?”
강진현과 단둘이 남게 된 희나는 습관적으로 그를 살폈다.
이건 다년간의 회식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얼큰하게 취한 사람을 무사히 살펴 보내려는 본능 같은 거였다.
“……예, 희나 씨.”
강진현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깊이 생각에 빠지는 듯했다.
“……시간이 늦었군요. 날이 어둡습니다.”
그는 당연한 소리를 했다. 지금은 밤 10시였다. 고기와 술을 네 시간 넘게 먹고 마셨다는 의미였다.
“예에. 진현 씨도 들어가셔야죠. 내일 출근하시려면요.”
“……며칠간은 던전 토벌이 없어서 한가합니다. 오후에 나가 인터뷰 몇 개만 진행하면 됩니다. 내일모레는 신문 광고 촬영이 하나 있고, 그다음 날에는 간부 회의가 있습니다.”
강진현은 착실하게 자기 스케줄을 보고했다. 취한 사람답게 설명이 과했다.
“……희나 씨는 내일까지 휴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습니까?”
“네. 맞아요. 내일까지 휴가고, 내일모레부터 출근해요. 진현 씨 밥해 주러요.”
희나는 주정뱅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쉽게 설명해 주었다.
“……희나 씨가 출근하는 날을 몹시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렘은 처음입니다. 희나 씨 덕분에 정말 기쁘고…… 행복합니다.”
강진현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누가 보면 술에 취해서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괜히 민망했다. 함께 일할 동료를 향한 기대라기에는 좀 과한 감이 있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덩달아 희나의 뺨도 붉어졌다. 희나는 괜히 딴청을 피웠다.
“큼, 크흠. 진현 씨. 이제 집에 가셔야죠. 저도 집에서 오빠가 기다려서 가 보려고요.”
강진현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혼자 가면 안 됩니다. 일반인에게 밤거리는 위험합니다.”
“저도 나름 각성자예요. 이제 C급이라서 체근민 합도 30 넘겼어요.”
“……그래도 희나 씨는 쉽게 다칠 수 있는 비전투계 능력자입니다. 연약합니다.”
“큰길로만 다니면 돼요.”
희나는 으슥한 벽을 찾아가서 현관문만 열면 되니, 위험할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강진현으로서는 마냥 희나가 걱정됐나 보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는 경고조차 없이 덥석 희나를 안아 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꺅!”
희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안전하게 모실 수 있습니다.”
“내, 내려 주세요!”
“……바깥은 위험합니다. 갑자기 게이트가 열려 몬스터를 조우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곁에 있어 드려야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기운이 거하게 도는지, 강진현의 망상은 과해지고 고집은 세지기만 했다.
그는 희나를 붙잡고 ‘잃을 수 없다’라며 중얼거렸다. 무슨 엄청난 보물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강진현은 이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탓, 하고 발을 굴렀다.
‘으아아악!’
롤러코스터를 탄 듯 몸이 부유하는 느낌에 희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일이야!’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