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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56화 (56/228)
  • 던전 안의 살림꾼 56화

    하지만 강진현은 개의치 않고 끝까지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희나 씨, 제 마음은 거절하시고, 우민아 헌터만 받아들이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그의 발언은 요상야리꾸리했다.

    ……어찌 됐건 대충 이해하기로, 요지는 이랬다.

    자기의 전속 요리사로 와 달라고 요청할 때는 단호하게 거절만 하더니, 왜 우민아와는 스스럼없이 밥을 먹느냐는 뜻인 것 같았다.

    ‘그야…….’

    사적인 친분이 있는 우민아와 그런 게 없는 강진현은 달랐다.

    우민아 같이 가까운 언니와 몇 주에 한 번씩 고기를 먹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진현 헌터는 퇴근 후에 따로 만날 정도의 사이까진 아니지.’

    희나도 희나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물론 점심을 같이 먹기도 하고, 오빠를 구해 주는 등 여러 일을 함께 겪으며 가까워지긴 했지만, 강진현에게 아직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가 까다로운 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 도리어 강진현은 알면 알수록 잘 길든 개처럼 온순한 데가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희나가 강진현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 정도?

    물론 강진현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호탕하고 붙임성이 좋은 우민아와 달리, 강진현은 너무 진중한 면이 있었다. 희나는 그런 강진현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정도로 넉살이 좋지 못했다.

    거기다 이성인 강진현보다야 동성인 우민아를 더 편히 여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어떻게 전한다?’

    최소한의 사회성을 갖추었다면 ‘나는 당신이 조금 부담스러워요’라는 얘기를 면전에 대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우민아가 한마디 톡 쏘아붙였다.

    “야, 이렇게까지 부담스럽게 들이대는데 누가 너랑 밥을 먹어 주겠냐? 너는 밀당도 몰라?”

    몹시 맞는 말이었다. 무슨 연애 조언처럼 들린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더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희나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들으셨다시피, 민아 언니랑은 청룡 길드 들어오기 전부터 친분이 좀 있었어요. 제가 난감할 때 여러모로 도와주시기도 해서 고마운 마음도 있고요.”

    “……예.”

    희나의 말에 강진현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는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희나 씨. 두 분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야기를 들으니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아마 저도 우민아 헌터처럼 희나 씨와 가까워지고 싶었나 봅니다.”

    굉장히 진솔하게 느껴지는 고백이었다.

    물론 정확한 의미는 지고지순한 고백이 아닌, ‘저도 우민아 헌터처럼 희나 씨와 (함께 고기를 구워 먹을 만큼) 가까워지고 싶었나 봅니다.’에 가까울 테지만 말이다.

    적어도 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야……. 너, 정말 희나 손맛에 진심이구나.”

    아니, 우민아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호탕하게 제안했다.

    “그래. 어차피 말 나온 김에 다 같이 나가서 고기 먹자. 희나 너도 이제 강 헌터랑 일해야 하는데 더 가까워져야 할 것 아니야? 오늘 축하 회식이라고 생각하고 한잔하면 되지.”

    ‘이렇게 회식이란 말을 쉽게 꺼낼 줄이야.’

    결국 우민아도 한낱 팀장에 불과했다.

    회식을 업무의 연장 선상이라고 생각하는 평사원들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

    “……제가 껴도 괜찮겠습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애틋한 눈빛을 하고 희나를 초롱초롱 바라보는 강진현을 거절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 * *

    치이익!

    불판에 고기 익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먹음직스러운 소리에 고기를 굽는 희나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강진현도, 우민아도 침을 꿀꺽 삼켰다.

    일행은 우민아를 따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유명 한우집에 와 있었다. 식당에 뭐라고 미리 이야기해 두었는지, 따로 방까지 내주어 오붓하게 고기를 즐길 수 있었다.

    보통 이런 고급 식당에서는 손맛 좋은 종업원이 고기를 일일이 구워 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일행에게는 그보다 더 대단한 손맛을 가진 존재가 있었다. 바로 희나였다.

    덕분에 그들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야, 때깔 봐라. 침샘 터질 것 같아.”

    우민아가 연신 군침을 삼켜 대며 젓가락을 움켜쥐었다.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둔 암사자 같은 눈빛이었다.

    “희나 씨의 손길이 직접 닿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강진현은 몹시 경건한 태도로 희나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아마 그는 희나가 이대로 물을 포도주로 바꾼대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스킬을 발동하자 고기에서 반지르르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미 마블링이 눈꽃같이 펼쳐져 있는 소고기에 윤기까지 도니, 그야말로 한 폭의 예술화처럼 보였다.

    “강진현 씨는 고기 바짝 익혀 드시는 걸 좋아하세요, 아니면 부드럽게 익혀 드시는 걸 좋아하세요?”

    희나는 재빠르게 고기를 뒤집으며 강진현의 취향을 물었다.

    이미 둘이 몇 번 소고기를 먹어 본 적 있었으므로 우민아의 취향은 알았다. 핏물이 조금 남아 있는 정도로 살짝 설익힌 고기를 좋아했다.

    “저는 희나 씨가 해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맛있게 먹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강진현은 또 뻔한 대답을 해 댔다. 그를 대신하여 우민아가 끼어들어 말했다.

    “얘는 잘 익은 거 좋아해. 덜 익은 건 육고기 비린내가 강하게 느껴져서 그닥 좋아하지 않는대.”

    강진현이 고개를 홱 돌려 우민아를 바라보았다.

    “우민아 헌터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너희 형아가 말해 줘서 아는데. 강목현 팀장. 강목현이 네가 맨날 비쩍 곯아 있다고 걱정하는 것 알아?”

    비쩍 곯아 있다는 표현에 희나는 고기를 굽다 말고 강진현을 힐끗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 늘씬해 보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커다랗고 단단했다. 희나는 저 몸에서 얼마나 대단한 괴력이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강진현을 비쩍 곯았다고 표현하다니. 그럼 희나네 오빠인 희원은 닭 뼈다귀 정도도 안 될 게 분명했다.

    “세상에 이렇게 몸 좋은 해골이 어디 있다고 그러는지…….”

    우민아도 강목현 인사팀장의 안목을 의심하며 혀를 쯧쯧 찼다.

    희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고기를 하나씩 뒤집었다. 소고기였기 때문에 돼지고기보다는 훨씬 빨리 익었다.

    “자, 이제 드셔도 돼요.”

    마침내 희나는 잘 익은 고기를 각자의 밥그릇 위에 한 점씩 올려 주었다. 짙은 갈색빛이 도는 소고기가 육즙을 머금고 밥알 위에서 탱글탱글 춤을 췄다.

    “……이야. 오늘따라 고기 질이 장난 아닌 것 같아.”

    “감탄은 나중에 하고, 고기 타니까 빨리 드셔요.”

    그 말을 하자마자 강진현과 우민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광란의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미친다! 언제 먹어도 최고야!”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입니다.”

    둘은 소고기의 맛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희나도 바쁘게 고기를 구우며 잘 익은 살점을 집게로 입안에 쏙쏙 집어넣었다.

    늘 그렇듯 첫 점은 아무런 양념도 찍지 않은 채였다. 고기 본연의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게 바로 이 첫입이었기 때문이다.

    ‘와. 고소한 과일을 먹는 것 같아.’

    육즙이 터져 나왔다. 미세한 기름기가 입안을 코팅하며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잠들어 있던 식욕이 순식간에 깨어났다.

    희나는 팔이 열 개 있는 사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고기를 구우면서도 두 헌터 못지않은 속도로 소고기를 해치웠다는 의미다.

    맨고기 다음은 소금이었다. 고기를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넣자 소금 간이 짭짤하다 못해 달큼하게 입맛을 돋웠다.

    나머지 한 점은 곧바로 고소한 기름장에 찍어 음미하니, 이곳이 바로 천국이요, 무릉도원이었다.

    눈앞에 천사의 날개를 단 한우들이 성스럽게 하늘을 날아다녔다.

    입안이 살짝 느끼해질 때쯤이면 새콤달콤하게 무친 파채나 양파 절임을 먹었다. 고소한 고기와 상큼한 파채의 조합은 완벽 그 자체였다.

    그동안의 전적을 보아 고기를 미리 산더미처럼 시켜 놓은 게 다행이었다.

    아니면 희나네 방을 담당한 서버는 새로 주문한 고기를 가져다 나르느라 꽁지에 불이 붙었을지도 몰랐다.

    “아. 맛있었다!”

    희나가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쯤, 나머지 두 사람도 정신을 차렸다.

    “야, 이제 천천히 먹자. 매번 너랑 먹으면 처음은 고기만 처먹게 되는 것 같아.”

    우민아는 종업원을 불러 술을 시켰고.

    “그동안 이렇게 맛있는 걸 둘이서만 먹고 있었다니…….”

    강진현은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으로 희나를 바라보았다.

    우민아는 강진현의 소주잔을 채우며 킬킬 웃었다.

    “부럽지? 얘 손맛 본 건 아마 내가 처음일걸.”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부럽습니다. 우민아 헌터를 이토록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입니다.”

    “뭐? 이 자식이!”

    둘은 티격태격, 묘하게 사이가 좋아 보였다. 짓궂은 누나와 무뚝뚝한 동생 같았다. 새삼 강진현의 인간적인 모습이 새로워 보였다.

    “그럼 이왕 모두 같이 모였으니 건배 한번 할까요?”

    희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건배 제의를 했다. 손에 쥔 작은 잔 안에서 이슬이 찰랑거렸다. 입안이 기름져서 시원하고 청량한 것으로 씻어 내면 딱 좋을 타이밍이었다.

    “너 내일까지 휴가지? 그럼 죽어라 마셔 보자!”

    우민아가 크하하 웃으며 잔을 짠! 맞부딪쳤다. 강진현도 말없이 잔을 마주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그는 술보다는 고기에 더 관심이 많은 듯,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남의 살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그렇게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안주가 맛이 있어서일까, 오늘따라 이슬이 유독 달았다.

    콩!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새콤달콤한 후식 냉면을 먹고 있던 희나와 우민아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현 씨?”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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