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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55화 (5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55화

    솔직히 마들렌은 처음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맛있었다.

    밥을 차릴 때는 일상적인 걸 한다고 생각해서일까, 어지간해서는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는데 빵 같은 디저트류를 만들고 보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한식을 만들 때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뿌듯함이었다.

    ‘이 맛에 베이킹 하나 봐.’

    앞으로 새로운 취미가 생길 것 같았다.

    “네가 만들었는데 뭔들 안 맛있겠냐!”

    우민아가 침을 꼴딱 삼키며 마들렌을 꺼내 들었다. 잘 부푼 마들렌은 귀여운 배꼽이 볼록 올라와 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같이 먹자.”

    우민아가 저에게 먼저 마들렌을 권하기에, 희나는 손을 내저었다.

    “저는 집에서 먹고 와서 괜찮아요. 언니 전부 다 드세요.”

    “……정말이지?”

    그러자 우민아의 눈이 기쁨으로 번쩍거렸다. 내심 희나가 만들어 준 음식을 혼자 차지하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매사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우민아가 남에게 뭔가를 양보하기 꺼리는 걸 보니 실망스럽기보다는 기분이 좋았다.

    ‘그 정도로 내 음식을 좋아해 준다는 뜻이잖아.’

    만든 사람 입장에선 내심 뿌듯한 일이었다.

    희나는 따끈 달달한 믹스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우민아가 마들렌을 처치하는 광경을 구경했다.

    우민아는 폭신한 마들렌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휙 들었다.

    “희나야,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내가 쏠게.”

    마침 휴가라 할 일도 없었기에 희나는 우민아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럼 고기 먹으러 갈까요? 제가 구워 드릴게요.”

    습관적으로 고기 이야기를 꺼내자 우민아가 씨익 웃었다.

    “흐흐, 뭐든 다 좋지만 네가 구워 주는 고기면 더 좋지. 그럼 언니가 소고기 쏜다!”

    “헉, 맛있겠다…….”

    희나는 지난번에 우민아와 함께 갔던 고깃집을 떠올리며 침을 꼴딱 삼켰다.

    고급 한우집이라고 했는데, 육질이 기가 막혔다. 거기다 희나의 ‘이 맛이 바로 손맛’ 스킬까지 먹히자 잠시 손에서 힘이 빠질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 펼쳐졌다.

    결국, 희나와 우민아는 가게의 고기를 동 낼 정도로 소고기를 싹싹 긁어 먹고 왔다.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가게에서 자체 할인까지 해 줬을 정도였다.

    “그런데 거기 너무 비쌌는데……. 그것도 언니가 내줬잖아요.”

    희나는 그날 나왔던 엄청난 고기값을 떠올렸다. 고기 구워 준 노동비라고 치기에는 너무 비싼 금액이었다.

    우민아는 소시민다운 걱정에 멈칫하는 희나를 향해 정신 차리라는 듯 손가락을 탁 튕겼다.

    “나 청룡 길드 던전 공략팀 팀장 우민아야. 고기가 뭐야, 너 가게도 사 줄 수 있어.”

    그 목소리가 어찌나 듬직하고 멋지던지, 희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언니, 정말 대단해요.”

    “아냐. 네 손맛이 더 대단해.”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해 주면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우민아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지더니 달칵, 하는 소음이 들렸다.

    “언니? 왜 그러세요?”

    급작스러운 기세 변화에 희나는 어리둥절했다.

    우민아는 그런 희나에게 앉아 있으라 손짓하며 재빨리 사무실 문을 열었다. 벌컥,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민아는 전에 듣지 못한 살벌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누구야? 쥐새끼처럼 엿듣…… 어?”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문 앞에 선 사람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엥?”

    조마조마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희나도 덩달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상대는 희나 또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헌터 강진현이었다.

    “……강진현? 내 사무실 앞에서 뭐 하고 있어? 그 표정은 또 뭐고?”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한 채 우민아의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믿었던 동료의 칼에 찔렸다 해도 이렇게 배신감 어린 표정을 짓지는 못할 것이다.

    “강진현 헌터님?”

    희나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우민아의 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흔들리던 강진현의 두 눈동자가 희나를 향해 고정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희나 씨.”

    강진현이 촉촉한 눈을 하고 희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무, 무슨 일이세요?”

    “가슴이 아픕니다.”

    “예?”

    S급 헌터도 부정맥 같은 게 올 수 있던가? 희나는 몹시 당황했다.

    ‘119에 신고해야 하나? 아니면 힐러를 불러야 하나?’

    우왕좌왕할 때였다.

    “저는 거절하셨으면서 우민아 헌터와는 상습적으로…….”

    “뭐래.”

    심상치 않은 기운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우민아의 기세가 픽 죽었다.

    하지만 강진현은 처음부터 희나만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우민아의 반응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저는 역시 희나 씨 마음에 차지 않는 거군요…….”

    거기다 별 이상한 소리까지 다 꺼내기에 희나는 깜짝 놀라 강진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기, 강진현 헌터님! 잠시만요!”

    “진현 씨라고 불러 주십시오. 우민아 헌터는 언니라고 가깝게 불러 주시지 않습니까?”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강진현의 대사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행스레 복도를 지나다니는 행인은 썩 많지 않았으나 사람들 모두 강진현과 희나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저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얘기는 제발 들어가서 하시면 안 돼요?”

    그러면서 그의 팔을 마저 잡아당기자, 강진현은 우민아의 사무실 안으로 순순히 끌려 들어왔다.

    탁!

    우민아가 믹스 커피 한 잔을 강진현 앞에 내려놓았다. 강진현은 가만히 종이컵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좀 처량해 보였다.

    세상에서 손꼽히게 강한 헌터인 주제에,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연해 보이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야, 흥분은 좀 가라앉았냐?”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우민아가 물었다.

    “…….”

    강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우민아를 힐끗 바라보았을 뿐이다. 날카롭게 벼린 시선에는 옅은 적개심이 서려 있었다.

    “뭐야, 너 눈을 왜 그렇게 떠?”

    우민아가 강진현을 향해 삿대질했다.

    “…….”

    이번에도 강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덕분에 분위기는 어색하다 못해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가 되었다.

    희나는 두 상급 헌터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기류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엄청나게 불편했다.

    차라리 길드장과 일대일 면담을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저……, 먹을 것 좀 싸 왔는데, 드시겠어요?”

    어쨌든 어색한 분위기를 녹이는 데는 약간의 간식이 최고인 법이다. 희나는 강진현 몫으로 들고 온 마들렌을 꺼내 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그게, 제가 베이킹을 좀 해 봤는데요, 하다 보니 개수가 많아져서……. 그래서 주변 분들 것 좀 챙겨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이건 강진현 헌터님, 아니 진현 씨 거고요.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서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셨네요. 하하.”

    하하, 어색한 웃음이 우민아의 사무실 안에 울렸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희나 씨.”

    다행스럽게도 강진현은 희나에게는 대꾸했다.

    한층 누그러진 분위기에 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속상해하시는 거, 저랑 민아 언니가 둘만 같이 고기 먹으러 다닌다고 해서 그러신 거예요?”

    설마 그러리라고 믿고 싶진 않았지만, 짚이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예,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한번 꾹 다물었던 입이 열리니, 강진현은 술술 이야기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그는 희나의 연락을 보고 뒤늦게 답장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기에, 희나의 기척을 찾아 건물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희나의 자취를 찾는 건 S급 헌터인 강진현에게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강진현은 희나의 자취가 마지막으로 이어진 곳이 우민아의 사무실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노크를 하려는데, 대화 소리가 들려왔을 뿐입니다.”

    강진현은 자기가 일부러 대화를 엿들은 건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러면서 둘의 대화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집중이 크게 흐트러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기척이 잡혔구나? 작정하고 숨으면 내가 널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지.”

    우민아가 이제야 납득했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그런데 우리 둘이 고기 구워 먹는 사이인 게 뭐가 그렇게 충격이라고 주의까지 흐트러져?”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강진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건 우민아 헌터가 알 바가 아닙니다.”

    “뭐? 이 삐돌이가!”

    강진현은 누가 봐도 삐친 기색을 하고서 우민아의 말을 무시했다.

    “자, 자. 진정 좀 해 보세요.”

    희나는 청룡 길드 주요 간부 간 갈등을 막아 내기 위해 애를 썼다.

    어쩐지 애들 싸움을 막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착각일 것이다.

    “진현 씨는 우리 둘이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서운하셨던 거예요?”

    포장지를 까서 마들렌 하나를 손에 들려 주고 물어보자 강진현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제 청에는 응하지 않으셔서 누구에게나 똑같으신 줄 알았는데……. 이미 우민아 헌터와 그런 사이였다는 말을 들으니 심장 부근이 지끈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우민아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야, 그 말 되게 이상하게 들리는 것 알지?”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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