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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53화 (5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53화

    희원이 달걀 껍데기를 들자 화분 안에 얌전히 앉아 있던 바둑이가 머리통, 아니, 꽃봉오리를 휙 들어 올렸다. 그리고 펄쩍 제자리에서 점프했다.

    오므라들어 있던 꽃봉오리가 순간, 활짝 벌어졌다 닫혔다.

    텁.

    정신을 차렸을 땐, 희원이 손에 들고 있던 달걀 껍데기는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아그작, 아그작, 오도독.

    과자 씹어 먹는 듯한 소리에 한 사람과 한 달팽이는 멍청하게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식물이 꽃봉오리를 입처럼 사용해 달걀 껍데기를 씹어 먹는다니……. 기상천외한 광경이었다.

    “……방금 얘가 계란 껍데기 잡아먹은 거야?”

    “응. 잘 먹지?”

    「전광석화.」

    바둑이는 입안……, 아니, 꽃봉오리 안에 든 껍데기를 금세 씹어 먹었다. 그리고 다시 희원을 올려다보았다.

    잎사귀가 마치 꼬리처럼 팔랑팔랑 펄럭이고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더 달라는 의미였다.

    희원은 손바닥 위에 달걀 껍데기를 올려놓고 바둑이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바둑이는 허겁지겁 껍데기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아직도 배가 많이 고픈가 봐.”

    바둑이는 계란 네 알어치 껍데기를 금세 먹어 치웠다. 하지만 영 성에 차지 않는지 화분 난간을 잡고 봉오리를 이곳저곳 킁킁거렸다.

    희원이 그 모습을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희나야, 계란 좀 더 줘도 돼? 영 부족해 보여.”

    “뭐……. 안 될 건 없지.”

    희나는 얼떨떨한 낯으로 냉장고 문을 열어 달걀을 꺼냈다. 그리고 달걀 세 개를 꺼내 풀었다.

    이걸로는 폭신한 계란찜을 할 생각이었다. 녹색 파와 주황색 당근을 넣으면 알록달록해져서 눈도 입도 모두 즐거울 게 분명했다.

    한편, 바둑이는 달걀 세 개 치 껍질도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러고도 부족한 것처럼 굴기에 희나는 어쩔 수 없이 달걀을 더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계란국이다.’

    시원하게 육수를 내서 부드러운 계란국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달걀 세 알을 더 깨서 주었는데도 바둑이는 여전히 배고파했다.

    벌써 달걀 껍데기 열 개를 먹었다. 가느다란 줄기 어디에 그 많은 달걀 껍데기가 들어가는지가 의문이었다.

    “얼마나 더 먹여야 하는지는 퀘스트 진행도에 안 떠?”

    한숨과 함께 달걀 다섯 개를 더 깨서 건네자, 희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떠. 그냥 바둑이가 포만감을 느낄 때까지 계속 주라는데?”

    “대체 언제까지 계란을 까야 하는 거야? 그릇 부족하겠어.”

    “일단 계속 줘 보자.”

    바둑이는 정확히 달걀 껍데기 28개를 먹고 나서야 만족했다. 희나는 배(?)를 두드리며 화분에 비딱하게 누운 바둑이를 바라보면서 혀를 쯧쯧 찼다.

    “계란 한 판 안 사 뒀으면 큰일 날 뻔했네.”

    28개의 달걀로는 무얼 할지 생각하는 건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희나의 달걀 요리 베리에이션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계란말이, 계란찜, 계란국, 계란 볶음밥, 계란 프라이, 계란 샐러드 등등…….

    뭐, 어쨌든 간에 한동안 입에서 닭 비린내가 나도록 달걀만 먹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모름지기 식물이라 함은 흙 위에 서 있는 것이 정상일 터인데, 바둑이는 식물 주제에 사람처럼 화분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배가 부르다는 듯 잎사귀로 줄기를 통통 치더니 순식간에 잠들었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바둑이의 수면 여부를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끊임없이 움직이던 잔뿌리와 풀 잎사귀가 한순간 얌전히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꽃봉오리를 작게 펼쳤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피유피유 코골이 비슷한 소리까지 냈다. 정말이지 이상한 식물이었다.

    ‘아니, 이 정도로 움직이면 동물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냐?’

    희나는 식물과 동물의 정의에 대해 생각했다. 혼란스러웠다.

    “귀엽지 않냐? 막 태어나서 신나게 밥 먹고 곧바로 잠든 거잖아.”

    그러나 희원은 아무런 의문도 들지 않는지 두 손으로 화분을 꼭 쥐고 빙그레 웃음 지었다.

    “오빠는 걸어 다니는 식물이 이상하지도 않아? 뭐 이렇게 태연해?”

    목소리를 낮춰 속닥이자 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식물형 던전 가면 이렇게 움직이는 식물형 몬스터 많아. 이상한 건 아니야.”

    “뭐? 몬스터라고? 저게?”

    식겁하는 희나의 모습에 희원은 진정하라는 듯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바둑이는 괜찮아.”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아는데?”

    “나는 스킬로 식물 정보를 볼 수 있거든. 그리고 바둑이는 설명 창에 ‘온순하며 비상시를 제외하고 인간을 해치지 못함’이라고 쓰여 있어. 거기다 얠 키우는 게 내 퀘스트인데, 설마 나한테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야 하겠어?”

    속 편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오빠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D급 농사꾼에 불과하다고 해도, 실제 전투에 거의 참여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희원은 거의 10년 동안 헌터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은근히 담대한 데가 있고 던전 일에 잔뼈가 굵었다.

    거기다 희원은 감도 좋은 편이었다. 그런 희원이 단박에 바둑이를 좋아하게 된 걸 보면 적어도 해를 끼칠 만한 존재는 아닐 것 같았다.

    ‘하긴. 오색이도 특이하긴 매한가지지. 보통 달팽이보다 훨씬 큰 데다 지능까지 있어서 의사소통도 가능하잖아.’

    떠올려 보면 희나도 처음 오색이를 만났을 때 오색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에 가까운 감정이 들었다.

    그저 벌레로 착각해서 손을 날린 게 문제였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희원도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존재에게 호감을 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간단히 결론을 내린 희나는 금세 생각을 털어 내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애 밥 다 먹이고 재웠으니까 우리도 밥 먹자. 시간이 늦었어.”

    일단 오늘 저녁은 계란말이, 계란찜, 계란물을 묻힌 동그란 햄 구이, 계란국, 계란 볶음밥에 계란 프라이로 확정이었다.

    “참고로 오늘 저녁 메뉴는 오빠 덕분에 결정된 거니까 반찬 투정은 안 받을 거야.”

    딱 잘라 말하자, 희원이 실실 웃었다.

    “내가 언제 밥투정 부린 적이 있다고.”

    그건 그랬다. 밥해 주면 그저 밥해 준 사람 고생을 생각해 고맙습니다, 납죽 먹는 게 희나네 집 제1 규칙이었다.

    하지만 희나는 못 들은 척 흥, 하고 거품기로 달걀 물을 풀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원래 남매란 그런 사이니까.

    * * *

    다음 날, 희나는 남은 달걀로 뭘 할지 고민하다가 베이킹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중 계란 노른자와 흰자가 통째로 들어가는 마들렌를 만들기로 했다. 초보자도 할 수 있는 쉬운 구운 과자로 설명이 되어 있어 선택했다.

    마침 휴가가 며칠 더 남아 있어서 시간은 널널하기도 했다.

    물론 베이킹에 필요한 오븐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홈 스위트 홈’ 레벨 업 보상으로 받은 오븐이었다.

    이름은 ‘음식을 태우지 않는 오븐’이었고, 등급은 B등급이었다.

    B등급이면 성능이 꽤 좋을 게 분명한데 받아 놓고 부엌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을 뿐, 써 본 적은 없었다.

    희나가 간단한 반찬 위주로만 요리했기 때문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살면서 베이킹의 ‘ㅂ’도 해 본 적 없던 탓이었다.

    희나는 후다닥 사 온 베이킹 재료들을 늘어놓으며 태평하게 생각했다.

    ‘잘 만들 수 있겠지?’

    ‘야무진 손끝’과 ‘이 맛이 바로 손맛’에 대한 믿음이 컸다. 망치더라도 어떻게든 수습해 줄 것 같았다. 거기다 희나는 음식을 만드는 데 실패해 본 적도 없었다.

    베이킹을 시작하기 직전, 희나는 다시 한번 레시피를 꼼꼼하게 정독했다. 재료를 적당히 넣기만 하면 되는 거라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다 만들면 주변에 나눠 줘야지.’

    희나는 마들렌을 나누어 먹을 생각을 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자기가 만든 걸 맛있게 먹어 주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았다.

    마들렌 틀이 생각보다 작아서 달걀은 10개 분량만 사용해 계량했다. 남은 건 특대형 계란말이를 만들든지 할 생각이었다.

    달걀을 살살 풀어 낸 후, 가루 재료들을 체 쳐 내렸다. 그리고 녹인 버터를 살살 넣어 섞어 주자 반죽이 완성되었다.

    순서는 간단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양이 많아 영 쉽지만은 않았다.

    희나는 끙끙대며 첫 베이킹 반죽을 만들었다. 처음이라 긴장한 채로 해서 그런가, 김밥 60줄을 쌀 때보다 더 힘들었다.

    「빵 공장 가동 중?」

    오색이는 낑낑거리는 희나 옆에서 빵 공장이라도 차릴 생각이냐며 놀렸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양이 워낙 많아서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다 만들면 엄청 뿌듯할걸.”

    희나는 오색이를 살짝 흘겨보고는 잔뜩 사 온 마들렌 틀에 반죽을 짜 내려갔다.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거라서 그런지 은근 집중이 잘됐다.

    시스템도 희나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희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들렌을 구웠다. 원체 반죽 양이 많아서 여러 번 오븐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불그스름한 불빛 아래서 통통하게 부풀어 가는 반죽을 구경하다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나는 마침내 식탁 가득 마들렌을 펼쳐 놓고 손뼉을 짝짝 쳤다.

    “다 했다!”

    희나는 도합 70개가 넘는 마들렌을 구웠다. 덕분에 집 안이 향긋한 빵 냄새로 가득했다.

    따끈한 마들렌은 고소하고 담백했다. 처음 해 본 베이킹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희나는 입안 가득 풍기는 부드러운 풍미를 만끽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빵집에서 사 먹는 것만큼 맛있어!’

    거기다 입안에 도는 묘한 감칠맛까지 더하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빵보다 밥을 더 사랑하는 희나의 입맛까지 사로잡을 정도였다.

    희나는 마들렌을 열 개 단위로 포장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집에서 먹을 것과 우민아, 강진현에게 선물할 것, 환경 미화팀 팀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빼니 열댓 개가량이 남았다.

    ‘이건 누굴 준다?’

    희나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옆집이랑 경비실에 주면 되겠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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