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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49화 (49/228)
  • 던전 안의 살림꾼 49화

    “그나저나 상태가 안정되면 어디까지 커버 가능하겠어? 요즘 던전 활동이 심상치 않아. 던전 활성화 주기가 조금씩 짧아지고 있어. 예년보다 새 게이트도 더 많이 오픈되고 있어서 전투 인력이 부족해. 강 헌터를 투입할 일이 점점 많아질 거야.”

    강진현은 생각에 빠진 듯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간의 침묵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A급까지는 무리 없이 솔로로 플레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길드장이 눈썹을 까딱였다.

    “서포트 없이?”

    “예. 그편이 더 낫습니다.”

    대답은 단호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파괴적인 힘을 지녔기 때문일까? 강진현은 누군가와 협력하기보다 홀로 전투하기를 선호하는 헌터였다.

    “흠.”

    김규희 길드장은 천천히 턱을 쓸었다. 그리고 이내 골치 아픈 기색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짚었다.

    “2, 3년 이내에 태평양에 SSS급 던전이 열릴 거야.”

    “SSS급…… 말입니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실존하는 던전 중 가장 높은 등급은 S급이었다.

    “그래. 나도 얼마 전, 극비리에 입수한 정보야.”

    길드장이 다리를 바꾸어 꼬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SSS급 던전……. 클리어가 가능할지조차도 미지수지만, 인류 존속을 위해서는 도전해야만 하는 목표다.”

    SSS급 던전을 막아 내지 못한다면 10년 전 있었던 일 이상의 엄청난 참극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더 강력한 던전이 열리기 전에, 네 기량을 최대로 뽑아 올려. 이 팀장을 네게 붙였으니, 지금까지 보였던 모습 그 이상의 무위를 보여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알겠습니다.”

    강진현의 깍듯한 대답에 김규희 길드장이 피식 웃었다.

    “강 헌터의 컨디션은 이 팀장에게 걸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어떻게 보면 이 팀장의 손에 인류의 존망이 걸려 있다고도 볼 수 있겠군. 재미있지 않아?”

    물음에 강진현이 반문했다.

    “무엇이 재미있습니까?”

    “사람들은 집안일을 별 볼일 없이 취급하곤 하잖아. 심지어 이 팀장마저도 자신의 능력을 별로 대단찮게 생각하고 있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강진현이 조용히 반박했다.

    “희나 씨의 능력은 절대 별 볼일 없지 않습니다.”

    이에 길드장이 진정하라는 듯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러니 이렇게 큰 투자를 하면서까지 이 팀장을 잡아 놓으려 하지 않았겠어?”

    그리고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목소리가 절로 낮아졌다.

    “나는 이 팀장이 네 능력을 어디까지 개화시켜 줄지 아주 궁금해. 생각할수록 정말 흥미롭기 그지없어.”

    4. 두 집 살림하는 살림꾼

    B급 버섯 던전에서 나온 후 깨어난 그날, 희나는 계약서를 쓰고 마석으로 맹세까지 했다.

    대충 맹세 내용을 요약하자면, 각성자 상태 관리팀장이 되어 헌터들(그중 특히 강진현)을 돌보는 대신 집 세 채와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계약이 끝나자마자 강진현은 몇 번이고 희나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대가를 받고 일하기로 한 건데도 이렇게 고마워하는 게 신기했다.

    아무튼, 오늘은 앞으로 희나와 희원 남매가 행정적으로 지낼 집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날이었다.

    세 채의 집 중 청룡 길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집이었다.

    “우와. 이희나, 엄청난데!”

    희원이 입을 쩍 벌리며 아파트 내부를 둘러보았다. 신축한 지 몇 년이나 지난 아파트인데도 사용한 흔적 없이 아주 깨끗했다.

    “적당히 역세권이면서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아서 조용하고, 생활 시설들은 또 너무 멀지 않게 있는 곳에 집을 구하다니. 성공했네, 내 동생. 부모님이 아시면 너 능력 좋다고 엄청 좋아하셨겠다.”

    희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빠, 난 여기가 아직 내 집 같지가 않아.”

    “나도 그래. 이런 좋은 집에서 살아 볼 줄 누가 알았겠냐? 나머지 집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

    김규희 길드장은 나머지 집 두 채는 길드에서 책임지고 관리해 줄 테니 세를 놓건, 비워 두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대신 파는 건 안 된다고 했다. 계약서상으로 3년간 팔지 못하게 묶어 놓기로 했기 때문이다.

    너무 한순간에 생긴 큰 재산이라, 희나는 나머지 두 채의 집을 잠시 공실로 놓아두기로 했다. 이것저것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던전으로 향하는 ‘문’을 어디 달아야 할지 여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집이 생겨서 다행이야.”

    희원이 손등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열쇠 모양 문양을 쓰다듬었다.

    그 또한 동생만큼이나 신중한 편이라 아직까지 ‘문’을 달지 않았다. 거기다 던전에 생긴 밭을 가꾸다 보니, 밖으로 나올 일이 별로 없어 ‘문’의 위치를 지정하는 걸 매번 미루게 되었더랬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좋은 기회가 되어 돌아올 줄이야.

    희원은 아파트 안을 살피며 어디에 ‘문’을 달지 고민했다.

    “이 방을 내 방으로 하고, 여기 방 안에 문을 지정해야겠어.”

    방 하나를 골라 손짓하니, 희나가 OK 사인을 보냈다.

    “드디어 오빠 원예용품 심부름하는 건 끝이네. 앞으론 필요한 거 알아서 사 와.”

    희나는 빨리 ‘문’을 설치하라며 성화를 부렸다. 그간 희원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맡아서 하던 게 은근히 귀찮았기 때문이다.

    “알았어, 알았어.”

    희원이 손을 휘저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시스템 메시지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벽 한구석에 현관문 하나가 생겨났다. 희나의 ‘홈 스위트 홈’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됐다. 이제는 여기로 오가면 되겠네.”

    희원이 자기가 만들어 낸 현관문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나의 눈치를 봤다.

    “……이거 열어도 되겠지?”

    “글쎄. 감당할 수 있겠어?”

    희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희원이 어째서 이렇게나 ‘홈 스위트 홈’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지 잘 알 것 같았다. 희나 또한 문을 열자마자 닥쳐올 갈등이 두려웠다.

    “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잖아.”

    “그건 그래.”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희원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열린 문 안으로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소름 돋을 정도로 깔끔하게 치워진 아파트와 달리, 생활감이 가득한 장소였다.

    “오색아! 우리 왔어.”

    희나는 작은 달팽이를 찾아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매번 현관을 열 때마다 반겨 주던 오색이가 보이지 않았다.

    “오색아? 어디 있어?”

    희나는 불안한 마음에 집 안을 살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상추 잎 몇 장을 발견했다.

    ‘……이건?’

    상추에 뭔가 구멍이 뽕뽕 뚫려 있었다. 잘 관찰해 보니, 글자였다.

    안타깝게도 다음 대통령이나 왕이 누가 될 것이라는 예언은 쓰여 있지 않았다. 대신 다른 글자가 쓰여 있었다.

    희나는 상추 잎의 글자를 하나하나 천천히 읽었다. 희원도 희나의 옆에서 내용을 살폈다.

    “투……쟁…….”

    내용을 다 읽자마자 희나와 희원은 동시에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오색이의 전언이었다.

    그랬다. 오색이는 생각보다 질투가 많은 달팽이였다. 희나가 새집을 세 채나 얻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오색이는 시끄럽게 항의해 댔다.

    「두 집 살림 반대! 네 집 살림 반대! 본 달팽이, 집주인 외도에 몹시 충격!」

    누가 보면 불륜이라도 저지른 것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그날부터 오색이는 당장 그 집을 팔아 버리라며 성화를 부렸다. 사실, 팔아 버리라는 표현은 곱게 미화한 것이고, 다른 집을 죄다 불 질러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이 집 세 채 자체가 계약에 포함된 매물이다 보니, 한동안은 파는 게 불가능했다.

    희나는 이 사실을 몇 번이고 설명했지만 이미 질투에 눈이 먼 달팽이에게 그런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외도! 강력 처벌!」

    「♬조강지처가 좋더라♪」

    「문어 다리!」

    「배신자! 상간 주택 증오!」

    오색이는 매일같이 희나와 희원을 쪼아 댔다.

    그리고 오늘, 상추 두 장에 ‘투쟁’이라는 글자를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일종의 가출이었다.

    하지만 주택 관리자인 오색이가 홈 스위트 홈을 떠났을 리 없었다. 말만 이렇게 써 놓고 사실은 집 안에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오색아! 어디 있어?”

    희나와 희원은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홈 스위트 홈’은 남매에게 새로 생긴 아파트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았지만, 달팽이 한 마리가 숨기엔 충분한 넓이였다.

    “오색아! 우리 제대로 된 대화를 하자. 상추 뜯어 놓은 거 뭐라고 안 할게!”

    희원도 목소리를 높여 오색이를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도중, 희원이 문득 입을 열었다.

    “희나야?”

    “왜 그래 오빠?”

    “나만 여기 습도가 올라간 것 같은 느낌 받고 있나?”

    “아니. 내가 느끼기에도 그런 것 같은데. 축축해.”

    둘이 집 상태가 이상하단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제나 적절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했던 ‘홈 스위트 홈’이 조금 이상했다.

    “벽지가 축축한데?”

    장판이 끈적거렸고, 벽지가 축축했다. 마치 반지하 방에 결로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헉! 뭐야, 이거 곰팡이 아니야?”

    벽을 찬찬히 살피던 희원이 깜짝 놀라 벽 아랫부분을 손가락질했다. 거무튀튀한 곰팡이가 슬금슬금 기어올라 오고 있었다.

    “또 곰팡이야?”

    희나는 지긋지긋한 곰팡이와의 인연을 저주했다. 이놈의 곰팡이는 희나의 인생에서 꺼질 생각을 안 했다.

    희원이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다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지금 이 기현상은 오색이랑 연관 있는 것 같지?”

    희나도 오빠의 생각에 동의했다.

    “내 생각에도 그래. 오색이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집에 갑자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잖아.”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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