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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48화 (48/228)

던전 안의 살림꾼 48화

“예? 어디로요? 저는 지금 일이 마음에 드는데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희나는 지금 맡은 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여러모로 보람찼기 때문이다.

건물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도, 겸사겸사 각성 능력 경험치가 쌓이는 것도 좋았다. 5층과 8층 사람들과도 꽤 친해져서 떠나기 아쉽기도 했다.

강목현 인사팀장은 울상을 짓는 희나를 살살 달랬다.

“아쉬우실 건 압니다. 하지만 들어 보시면 더 좋은 기회란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뭔가요?”

“각성자 상태 관리팀 팀장을 맡아 주시면 됩니다.”

희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예? 각성자 상태 관리팀이요? 그런 부서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데요? 거기다 팀장이라뇨?”

“한 시간 전에 생긴 팀이니,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 게 당연합니다.”

“예에?”

“이희나 씨가 초대 팀장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팀장급 이상의 대우를 약속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계약서는 비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적어 넣으시면 됩니다.”

파격적이다 못해 정신 나간 것 같은 제의였다. 생긴 지 한 시간도 안 된 따끈따끈한 새 팀으로의 인사이동에, 그것도 팀원도 아닌 팀장 자리라니.

희나는 가만히 뺨을 꼬집어봤다.

‘아프다.’

꿈이 아니었다.

하긴, 꿈이라기엔 희나의 소박한 상상력을 넘어서는 스케일이긴 했다.

강목현은 찬찬히 부서에 대해서, 그리고 희나가 해야 할 일에 관해서 설명했다.

“이희나 씨가 유일한 팀장이자 팀원이 될 것이고,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말 그대로 길드 소속 각성자들의 컨디션을 관리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건 대외적인 설명일 뿐이고, 실제로는 강진현 헌터의 상태만 관리하게 될 겁니다.”

희나는 길드장 곁에서 묵묵히 앉아 있는 강진현을 힐끗 쳐다보았다.

“강진현 헌터만 관리하면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강진현 헌터는 우리 길드의 주축이 되는 전력입니다. 하지만 초인적일 정도로 뛰어난 오감 때문에 완전히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희나 씨의 도움이 있다면 강진현 헌터는 100%, 아니, 어쩌면 200%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덧붙였다.

“보기에 다소 무뚝뚝하고 사나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은 제법 순한 편입니다. 경계심이 많기는 하지만 한번 마음을 놓으면 사람도 잘 따릅니다.”

강진현의 형이라더니, 그는 유기된 강아지를 입양 보내는 사람같이 굴었다.

얘는 겉보기만 그렇지, 생각보다 사람도 잘 따라요. 앉아, 엎드려도 할 수 있고 빵야도 할 수 있어요……. 뭐 이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다간 대소변도 잘 가린다는 얘기까지 나올 것 같았다.

희나는 그런 얘기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기에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강진현 헌터님이 좋은 분이라는 건 대한민국 사람이 다 아는걸요, 뭘.”

“개인적인 식사 시간을 가져 보신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고개를 주억거리자 강목현 인사팀장이 간곡히 청했다.

“식사를 함께하면서 강진현 헌터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셈이죠.”

사실 인간적이다 못해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집어 먹으려 하는 땅그지 같은 면모까지 본 사이였다.

“푸…… 쿨럭! 큼, 흠흠.”

그 장면을 떠올리며 눈알을 굴리자마자 김규희 길드장이 쿨럭, 하고 기침을 하며 입을 가렸다.

하지만 강목현 인사팀장은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S급 헌터로 살아가는 건 두려울 것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의식주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삶을 과연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강진현 헌터의 형으로서, 저는 제 동생이 평생 그렇게 살아가길 원치 않습니다. 부탁합니다, 이희나 씨. 부디 진현이를 고통에서 구해 주십시오.”

그는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부디, 희나 씨.”

강진현까지 간곡히 희나의 이름을 불러 왔다. 평생 을로만 살아왔던 희나로서는 엄청나게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고, 고개 드세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그럼 인사이동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강목현 인사팀장의 물음에 희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정신이 없었다. 희나는 지금 잠에서 깬 지 한 시간도 안 된 상태였다.

사람이 갑자기 엄청난 제안을 맞닥뜨리면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법이다.

‘어떻게 하지……? 너무 갑작스러운데.’

집에 가서 생각을 좀 해 보고 싶었다.

우민아가 옆에서 희나를 툭툭 쳤다.

“갑자기 큰일이 닥쳐서 고민스러울 건 알아. 그런데 희나야, 너 계속 좋은 회사 다니고 싶다고 했지? 절대 망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4대 보험 다 처리해 주고 월급 안 밀리는 회사.”

“네, 언니.”

“이미 강진현 제안 한 번 거절한 적 있었다면서? 개인 사업자 밑에는 들어가기 싫다고.”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 요리사로 들어오라는 걸 거절하고 도시락을 싸다 주기로 했더랬다.

그러자 우민아가 킬킬 웃었다.

“이야……. 그런 이유로 강진현을 차다니. 너도 참 이상한 데서 대단한 애다.”

“치,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래. 하지만 이건 그거랑 달라. 너는 여전히 청룡의 정직원일 거고, 월급만 좀 오르는 것뿐이야. 하는 일도 비슷할걸. 헌터 애들 달래고, 사고 친 거 수습하는 거. 그게 강진현 하나로 바뀌었을 뿐이야.”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희나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습니다. 급작스러운 인사이동이라고는 해도, 보통 회사에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 아닙니까?”

인사팀장 강목현이 말을 얹으며 살살 꼬셨다. 차가운 표정으로 나긋나긋 말하는 걸 보자니 조금 인지 부조화가 왔다.

“으음…….”

희나는 팔짱을 낀 채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 할게요.”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네 쌍의 강렬한 눈빛이 너무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OK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강진현과 일대일로 맞다이를 떴던 때와는 달랐다. 강진현은 은근히 만만한 구석이 있었는데, 길드장과 인사팀장은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사장이 까라는데 까야지…….’

길드장이 저렇게나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말단에 가까운 일반 사원으로서는 거절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잘 생각했어요, 이희나 씨.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김규희 길드장이 손뼉을 짝짝 치며 얼굴에 웃음기를 띠었다.

“예. 예에.”

희나가 자신이 내린 엄청난 결정에 잠시 압도된 사이, 우민아가 신나게 끼어들었다.

“여기서 넘어가면 안 돼. 계약서 조항 눈 똑바로 뜨고 작성해야지. 연봉 올리는 건 당연한 거고, 집도 달라고 해.”

상상도 못 했던 사항에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집이요?”

“그래. 내 집에 얹혀살기 미안하다면서?”

집이 생기면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된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없는 것도, 택배를 집으로 곧장 시키지 못하는 것도, 고지서를 우민아를 통해 전해 받는 것도 해결된다.

심지어 오빠인 희원의 ‘문’ 자리도 확정할 수 있었다.

이미 각성 스킬로 집을 보유하고 있는 희나라고 해도 던전 바깥에 ‘내 집’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싫을 리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홈 스위트 홈에 문제가 생겼을 땐 갈 데가 필요했는데…….’

더불어 던전 안의 집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지낼 만한 장소가 생긴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집만 있으면 되나? 한 채로 돼? 두 채, 아니면 세 채?”

김규희 길드장이 손가락을 쫙 펴 보였다.

“하, 한 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희나의 대답에 김규희 길드장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빈하고 솔직한 청년이로고. 하여, 이희나 씨에게 세 채의 집을 내리겠노라.”

금도끼 은도끼도 아니고, 집 세 채를 홀랑 줘 버린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희나가 어리둥절한 사이 강목현 인사팀장도 밝아진 표정으로 백지 계약서 위에 줄글을 써 내려갔다.

“연봉은 얼마 정도로 합의할까요? 기존의 세 배? 다섯 배? 열 배? 원하는 대로 말씀하십시오.”

그러면서 엄청난 숫자의 연봉을 제시했다. 희나가 평생 일해서 모은 돈보다 훨씬, 훨씬, 훨씬 많았다.

10억이었다. 그것도 성과급 제외 기본급만.

희나는 멍하니 그 액수를 들었다.

‘오빠, 오빤 이제 진짜 일 안 하고 취미로 농사만 지어도 되겠다…….’

그렇게 희나는 얼떨결에 새집과 끝내주는 연봉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대의 성공한 살림꾼이라고 해야 할까.

* * *

“계약 진행하느라 수고했어요, 강 팀장.”

김규희 길드장이 강목현 인사팀장의 수고를 치하했다.

자칫하면 엉켜 버릴 수 있는 복잡한 계약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낸 것이 그였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필요한 일이었고요.”

강목현 인사팀장이 피로한 표정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희나가 잠들어 있었던 며칠 동안 계약을 검토하고 추진했던 것이 바로 그였다.

길드장은 그런 강목현에게 수고했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까닥였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손깍지를 끼었다.

“그래. 강 헌터는 기분이 어떤가? 이제 이희나 씨, 아니, 이 팀장의 손길을 정식으로 누릴 수 있게 되었지 않아?”

“고맙습니다.”

강진현의 대답은 예의 없이 느껴지리만큼 간결했다.

“쯧.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길드장은 그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강진현은 그 어느 때보다 상태가 좋았다. 정신이 명료했으며, 육체는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녀는 가볍게 웃음 짓고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본론은 이제부터였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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