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47화
길드장은 자신의 이름을 김규희라고 밝혔다. 아까 강진현의 귀를 쥐어뜯던 야생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교양 넘쳐 보였다.
그러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기에, 희나는 척추가 없는 것처럼 굽신거리며 그 손을 잡았다.
“아, 예. 감사합니다. 이미 아시는 것 같지만, 저는 이희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이희나 씨 이야기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어요. 길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요.”
대체 어떤 소문일지 감도 안 잡혔지만 일단 알아듣는 척 방긋방긋 웃었다.
“과찬이세요.”
“그럼 강진현 헌터 똥줄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으니까 서론은 이 정도만 하고.”
길드장, 김규희는 다리를 꼬아 앉았다.
“우선, 던전 보스를 잡은 게 이희나 씨가 맞는지부터 알고 싶은데. 저랭크의 비전투계라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던전 보스를 클리어할 수 있었던 거지?”
이 질문이 나올 거란 건 예상했다. 당장 우민아만 하더라도 궁금해하던 것 아니던가?
“그게……. 운 좋게 잡았다고밖에는 설명을 못 드리겠어요.”
“자세히 설명해 보도록 할까, 이희나 씨?”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던 희나는 인벤토리 창 안에서 A급 곰팡이 박멸액을 꺼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놓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마침 청소용으로 사용했던 A급 곰팡이 박멸액이 있었거든요. 버섯도 곰팡이랑 비슷한 종류라는 얘기가 떠올라서 뿌렸더니 진짜로 효과가 있었어요.”
희나는 가감 없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흠…….”
김규희는 희나가 내놓은 곰팡이 박멸액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희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이군요. 하긴,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면 B급 던전 보스를 처리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보이긴 하네. 운이 좋았네요.”
‘내가 잡은 게 B급 던전 보스……. 맞아. 그랬지.’
희나는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A급 곰팡이 박멸액이 대왕 버섯에게 들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신문 같은 데 나오는 통계를 보면 대체로 C와 D등급 사이의 던전이 제일 많았다.
한국에 있는 A급 던전이 대충 10여 개 남짓밖에 안 된다는 걸 감안해 보면 그 아래 단계인 B급 던전의 위험도는 엄청났다.
“여태 B급 던전을 클리어한 사람 중에 네가 제일 랭크가 낮을지도 몰라. 기네스북에 올릴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보자.”
우민아가 옆에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는 말을 해 댔다.
“쯧.”
김규희 길드장은 조용히 하라는 듯 눈치를 주었다. 눈빛이 사뭇 살벌했다.
희나는 그런 길드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강진현 씨도 엄청나게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을 하고서 가만히 앉아 있잖아?’
방금 희나에게 격렬한 프러포즈(?)를 날린 강진현조차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보통 카리스마가 아니었다.
“가장 궁금했던 일은 해결했고……. 어찌 되었건 이희나 씨는 일반 사원입니다. 일반 사원이 던전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 일은 엄청난 사고이기도 하지. 이건 우리 길드의 실책입니다.”
김규희 길드장은 심심한 위로와 함께 던전 게이트에 빨려 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노동청에 산업 재해 관련으로 신고하지 말아 달라며 은근한 눈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후 관계가 파악되면 그에 대한 보상을 섭섭지 않게 지급할 수 있도록 하지요.”
“아, 넵.”
희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던전 안에 들어가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자기는 강진현을 따라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갔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강진현의 A급 침낭에 ‘안락한 침상’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강진현은 자신의 성화에 못 이겨 침낭에 누웠고, 그대로 잠들었다……라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대왕 버섯……, 아니, 보스 몬스터가 깨어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시지 않아서 당황했어요. 무서웠고요.”
당시의 막막함을 떠올리자 심장 언저리가 묵직해졌다. 강진현이 그런 희나를 향해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때려서라도 깨워 주십시오.”
“아……. 네.”
희나는 자기가 이미 온 힘을 다해 뺨을 찰싹찰싹 갈겨 봤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건 괜한 사족이었다.
그렇게 결심하며 눈을 굴리는데, 길드장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어찌나 강렬한지, 마치 머릿속 생각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헉.’
희나는 뱀 앞에 선 쥐처럼 쩍 굳었다. 마치 천 년처럼 느껴지는 눈맞춤이었다.
“하하!”
정신을 차린 건 길드장의 나직한 웃음소리 덕분이었다. 그녀의 미소에 희나는 용기를 얻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뭔가 잘못을 했을까요?”
이에 김규희 길드장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뭐…… 적당한 비밀은 인생에 도움이 되기도 하죠. 생각보다 과격한 편이네, 이희나 씨.”
반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도 함께였다. 희나는 갸우뚱하며 마저 말을 맺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곰팡이 박멸액으로 보스 몬스터를 잡았고요. 그 후에는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요. 보상 챙기고 나선 피곤해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거든요.”
여기까지 얘기한 희나는 살짝 눈치를 봤다. 혹시 보상을 내놓으란 소리를 할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물론 마석을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잡은 건데!’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데, 때맞춰 김규희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보스 몹 클리어 보상 걱정은 하지 말아요. 이희나 씨가 잡은 거니 온전히 이희나 씨의 것이죠.”
그러면서 어차피 희나와는 일반 직원 계약을 했지, 헌터 전용 계약을 한 것이 아니므로 길드 수수료를 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희나는 안도하며 뒤늦게 물어야 할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강진현 헌터님 몸은 괜찮으세요? 잠에서 깨시질 않아서 걱정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잠든 강진현을 뻥뻥 차고, 데굴데굴 굴리고, 질질 끌고 다닌 게 걱정됐다.
물론 S급의 몸이니 어지간히 튼튼하긴 하겠지만, 혹시나 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 정도로 못 일어나는 거면 어디 몸에 문제라도 있는 것 아니에요?”
이어서 개인적인 의문도 덧붙였다.
“제 스킬이 효과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동안 이렇게 깊이 잠드신 분은 없었거든요. 휴게실 담당이라 거의 매일 침대 정리를 해서 알아요. 스킬에 피로 회복과 숙면 효과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아무리 A급 침낭의 중첩 효과를 받았다고 해도, 시전자의 강력한 의지가 깃들었다고 해도, 강진현은 S급 헌터였다.
C급 살림꾼의 C급 스킬에 이렇게 홀라당 넘어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건,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강진현이 슬그머니 나섰다. 김규희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야기해도 된다는 제스처였다.
‘무슨 일이기에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희나 씨의 스킬이 깃든 침낭에 든 이후, 저는 하루 반나절을 더 잠들어 있었습니다.”
대충 이틀이 넘게 깨지도 않고 푹 잤다는 소리였다. 가히 초인적인 수면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희나는 입을 떡 벌렸다.
“대, 대단하시네요.”
“감사합니다.”
강진현은 희나의 칭찬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일전에 말했듯, 저는 깊이 잠들지 못합니다. 주변의 기척에 몹시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에 희나는 생각했다.
‘뺨을 때려도 안 일어나던데…….’
마침 강진현도 그 얘길 했다.
필요할 때가 아니면 쉽게 열리지 않던 입은 청산유수처럼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이번은 예외였습니다. 각성한 이래로 처음이었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느끼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은요……. 거의 10년 만의 단잠이었습니다. 그간 밀려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희나 씨를 위험에 빠져들게 했지요.”
요점은 ‘10년 동안 불면증을 앓고 있었는데, 이번에 너무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잠을 자게 된 덕에 아예 깨어나지를 못했다.’라는 소리였다.
어쨌든 그렇게 깨지 못했던 까닭이 오랫동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이라고 하니 납득은 됐다.
거기다 10년 치 피로를 일시불로 지급했다고 치면, 강진현은 조금 잔 편에 속했다.
“그래서 희나 씨에게 다소 성급하게 입주 가사 도우미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습니다. 식사도 식사지만, 무엇보다 제게 숙면을 안겨 주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강진현이 다시 눈을 촉촉하게 떴다. 상황만 된다면 다시 무릎을 꿇고 카드 키를 바칠 듯한 기세였다.
김규희 길드장도 이를 느꼈는지 강진현에게 ‘기다려’ 사인을 보냈다.
“흥분 좀 가라앉혀, 강진현 헌터. 답지 않게 말이 왜 이렇게 많아졌어? 이래서야 제대로 된 이야기도 못 나눠 보겠어.”
“……예.”
그러자 강진현은 간식을 앞에 두고 있는 대형견처럼 초조하게 눈을 아래로 깔았다.
한편, 인사팀장이자 강진현의 친형인 강목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상황은 이렇게 되었고……. 우리는 이희나 씨에게 새로운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강목현은 희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뭐지?’
종이는 제목란을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다. 맨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근로 계약서.’
“……이희나 씨에게 부서 이동을 제안합니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