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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40화 (40/228)
  • 던전 안의 살림꾼 40화

    “물 주고 있는데, 아직 아무것도 안 돋았어.”

    희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현관 근처 울타리를 손가락질했다. ‘알 수 없는 씨앗’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힐끔 살펴보니 희원 말대로 아무것도 돋아 있지 않았다.

    ‘정체도 모르는데…… 싹이 트기는 할까?’

    희나는 의문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오빠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30분 안엔 들어와. 저녁 거의 다 차려 가니까 같이 먹자.”

    그 말에 희원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주방장님! 요새 네 음식 먹는 맛에 산다, 내가!”

    “치. 유난은.”

    희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남은 반찬거리를 준비하러 들어갔다.

    던전 안의 집이었지만, 여느 집과 다르지 않게 평화롭고 평범한 하루가 지나갔다.

    * * *

    점심시간이 땡 시작하자마자 희나는 도시락 통을 들고 옥상 정원으로 올라갔다.

    옥상 정원은 대체로 한적한 편이었다. 대부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도 했고, 식후에는 휴게실로 가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특히 희나의 ‘안락한 침상’ 스킬을 시전한 침대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더 그랬다.

    덕분에 희나와 강진현은 특별한 의심을 받지 않고 옥상 정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강진현 헌터님!”

    희나는 정원 한구석에 앉아 있는 강진현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강진현은 희나의 인사에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강진현은 여전히 희나에게 깍듯했다.

    ‘벌써 3주짼데도 이러시네.’

    강진현과 점심 메이트가 된 지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갔다.

    ‘내가 S급 헌터와 마주 앉아서 도시락을 까먹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지금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 3주 전의 일을 떠올렸다.

    어느 날, 강진현은 희나가 도시락 2개를 싸 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나머지 도시락 하나는 누구 것이냐 추궁했다.

    물론 그건 당연히 희나의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강진현은 별일이 없다면 싸 온 도시락을 함께 먹자고 제안했다.

    혼자 먹는 것이 적적하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사실은 희나의 요리 솜씨를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눈 안에 두려는 것이었다.

    희나는 후자의 이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강진현의 건너편에 앉았다.

    “오늘은 매콤하게 양념한 두부조림을 넣어 봤어요. 두부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하거든요.”

    오늘의 메뉴는 매콤한 두부조림, 달달한 소불고기, 어제 막 무친 겉절이와 시금치나물이었다.

    희나의 메뉴 설명을 듣는 강진현의 눈동자가 떨렸다. 너무 맛깔나게 들렸기 때문이다. 당장이고 도시락 통을 열고 밥을 크게 한술 뜨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기다려’ 훈련을 받는 착한 강아지처럼 침착하게 굴었다. 희나가 테이블 위에 도시락 통을 올려놓고 수저를 차리는 걸 도왔다.

    “맛있게 드세요.”

    강진현은 희나의 식사 인사가 들리고 나서야 수저를 들었다. 마치 천 년처럼 느껴지는 몇 초였다.

    그는 우선 보온 도시락에 담아서 아직 미미한 온기를 유지하고 있는 밥을 한 숟갈 펐다.

    달달 고소한 흰밥 향기가 코끝에 감겨 왔다. 밥 냄새만으로도 침샘을 잔뜩 자극했다.

    주저하지 않고 밥을 입에 떠 넣었다. 알알이 살아 있는 밥알이 폭신하면서도 탄력 있게 이에 씹혔다.

    맨밥만으로도 밥솥 한 통을 다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따라 밥에서 환상적인 맛이 났다.

    ‘이 감각.’

    강진현은 이 쌀밥의 맛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S급으로 각성한 후, 모든 음식이 그에게는 너무나 짜고 맹맹하고, 무감해졌다. 무얼 먹어도 돌 씹는 것 같이 텁텁했다.

    하지만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먹긴 해야 했다.

    매 식사 시간은 그에게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밸런스를 잃은 짠맛, 단맛, 신맛, 쓴맛 등이 정신없이 뒤섞여 미뢰를 자극했다. 아무리 대단한 요리사를 데려와도 결과는 똑같았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건, 바로 ‘맛에 대한 기억’이었다. 예전에 알던 그 맛을 앞으로 평생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몹시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그 앞에 있는 자그마한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녀의 손길이 닿은 음식은 조화로웠다. 어떤 맛 하나가 크게 튀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감칠맛 있었고, 무엇보다 ‘음식’의 맛이 났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끔찍한 사료 같은 무언가가 아닌, 사람이 먹는 음식 말이다.

    그렇기에 강진현은 더더욱 희나를 놓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영입해야 한다.’

    강진현은 희나에게 간곡히 매달렸고, 덕분에 최근 아주 만족스러운 식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바짝 서 있던 신경이 누그러지는 효과가 있었다.

    “입맛이 없으세요?”

    한편, 희나는 말없이 밥알만 씹는 강진현의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어제 ‘이 맛이 바로 손맛’ 스킬의 랭크가 C로 올라서 음식이 더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강진현은 반찬은커녕 5분째 맨밥만 퍼먹는 중이었다. 거기다 어쩐지 눈빛도 좀 풀린 것 같았다. 뭔가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아…….”

    강진현은 희나의 물음에 잠에서 깬 것처럼 젓가락을 바꿔 쥐었다.

    “아닙니다. 오늘따라 쌀밥이 맛있게 지어졌군요. 맛을 음미하는 데 그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그의 찬사에 희나는 샐샐 비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이네요. 저, 어제 요리 스킬 랭크가 C등급으로 올랐거든요. 헌터님께서 맛있게 드셔 주시는 걸 보니까 효과가 있긴 있나 보네요.”

    은근슬쩍 랭크 업을 했다며 자랑도 했다.

    그 소리에 강진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먹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랭크 업은 어지간한 수련으론 이루기 어려운 것인데, 그걸 해내시다니 대단합니다.”

    “저는 청소하기, 요리하기 같은 스킬뿐이라서 숙련도 쌓기가 훨씬 쉽거든요.”

    희나가 겸양을 떨었다. 하지만 칭찬은 기분이 좋았으므로 헤죽 벌어지는 입을 감추기 어려웠다.

    “앞으로의 발전이 무섭도록 기대되는군요.”

    강진현이 눈을 빛내며 희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D급, C급의 솜씨가 이렇다니. 그 이상 발전한다면 얼마나 대단해질는지.’

    희나의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런 인재는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강진현은 다시 한번 희나를 개인 요리사로 고용하고 말리라, 결심했다.

    “두부조림 정말 맛있게 잘됐어요. 빨리 드셔 보세요.”

    무디기 그지없는 C급 살림꾼 희나만 그 시선 따윈 눈치채지 못한 채, 두부조림을 냠냠 씹어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도시락을 절반쯤 비워 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강진현이 수저질을 멈췄다.

    “사람들이 옵니다.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앗, 어쩌지?”

    희나는 어쩔 줄 몰랐다. 일개 환경 미화 팀원과 S급 헌터 강진현이 몰래 도시락을 나눠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면 희나는 사내 이슈의 한가운데 서게 될 것이다. 그런 건 싫었다.

    “함께 다가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군요. 몸을 좀 피해야겠습니다.”

    강진현은 희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면서 먹던 도시락 통을 챙기는 치밀함 또한 보였다.

    그들이 기척을 막 숨겼을 때였다.

    벌컥!

    옥상 정원의 문이 열렸다.

    “야! 빨리 와! 여기!”

    ‘……언니?’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민아였다.

    우민아는 뒤따라온 헌터들에게 희나와 강진현이 숨어 있는 곳을 손가락질했다.

    “여기 아무도 없어! 여기다 던져!”

    강진현이 지운 기척을 알아보지 못한 듯싶었다.

    “어이! 서둘러!”

    “조심히 다뤄!”

    상황은 무언가 긴박하게 흘러갔다. 우민아의 지시를 따라 헌터들이 무언가를 끙끙 옮겼다.

    불길한 푸른 빛이 나는 커다란 수정 구슬이었다. 수정 구슬은 당장이고 폭발할 듯 웅웅, 위협적인 진동을 발산했다.

    “게이트 열리기 전에 빨리 던져 버려!”

    그리고 커다란 수정 구슬은 우민아의 고함과 함께 던져져 투포환처럼 허공을 갈랐다. 희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앗! 어떻게 해!’

    하필이면 희나와 강진현이 몸을 숨긴 그 자리로 구슬이 날아오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움직이겠습니다.”

    강진현은 당황하지 않고 희나의 몸을 안고 구슬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파아앗!

    구슬 안에서 눈이 멀어 버릴 듯한 차가운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공간이 갈라지고, 허공이 일그러졌다. 갈라진 구멍은 마치 블랙홀처럼 주위의 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희나와 강진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큿……!”

    옥상 정원의 조경수를 붙잡은 강진현의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붙잡은 나무의 뿌리가 조금씩 뽑혀 나가기 시작했다.

    “억! 팀장님! 저기 사람 있는데요?”

    누군가가 희나와 강진현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우민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살폈다.

    “뭐야? 강진현이랑……, 희나? 얘는 또 여기 왜 있어?”

    애석하게도 둘 다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이에 그녀는 지체 없이 갈라진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려 했다.

    강진현을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당연히 희나를 걱정해서였다.

    ‘사흘 후면 고기 파티 날인데!’

    ……어쩌면 희나가 구워 줄 고기를 걱정해서일지도 모르고.

    파아아앗!

    그러나 미니 게이트가 닫히는 속도는 열리는 속도만큼이나 빨랐다. 우민아는 간발의 차이로 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는 바닥에 착지한 후, 게이트가 있던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 미치겠네. 어떻게 하냐?”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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