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안의 살림꾼-36화 (36/228)
  • 던전 안의 살림꾼 36화

    희나는 다년간의 사회생활로 기본적인 표정 관리는 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강진현 헌터님도 사람이신데, 실수할 수도 있죠.”

    대신 궁금했던 걸 물었다.

    강진현이 커피를 줄줄 흘리고 오는 모습을 보니까 친근감이 조금 솟아올랐던 덕이다.

    “그나저나 아까 이불이랑 베개는 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제가 모르는 헌터님들 사이의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아니죠?”

    “아닙니다.”

    희나의 질문에 강진현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낮게 한숨 쉬었다.

    ‘윽.’

    희나는 마음속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미남의 한숨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굉장히 보기 좋았다.

    자기 옆에 앉은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강진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과하게 긴장하거나 과하게 긴장이 풀리면 힘 조절이 잘 안 되는 편입니다.”

    “힘 조절이요?”

    “예. 그렇습니다. 정말로 침대 정리를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희나 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 봅니다.”

    희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뭔가 엄청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저……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요?”

    “희나 씨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사고 싶었습니다.”

    희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

    “제 전속 요리사로 모시고 싶은 마음에.”

    “아하.”

    이제야 강진현의 이상 행동이 납득이 갔다.

    ‘그 5단 도시락이 엄청나긴 했나 봐.’

    희나는 자기의 음식이 너무 먹고 싶은 나머지 제 앞에서 긴장하고 말았다며 고백하는 S급 헌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침대 정리는 원래 제가 할 일이니까 도와주지 않으셔도 됐어요. 그리고 강진현 헌터님은 충분히 제게 호감을 얻으셨어요.”

    강진현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일단 강진현 헌터님이시잖아요. 대한민국 사람 중에 S급 강진현 헌터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거기다가 개인적으로는 던전에서 저를 도와주셨고, 우리 오빠도 구해 주셨잖아요. 심지어 제 실수를 모른 척 덮어 주시기까지 했으니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분이시죠.”

    희나는 있는 말발, 없는 말발을 모두 동원해 강진현을 칭송했다.

    “그럼 제 제안을 받아 주시는 겁니까? 전속 요리사로 계약해 주시겠습니까?”

    강진현은 당장이고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희나는 허둥지둥 손을 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요. 제가 강진현 헌터님이 싫어서 제안을 거절한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예요.”

    “그럼 어째서 거절하신 겁니까? 더 좋은 대우를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희나는 땀을 삐질 흘렸다. 이건 좀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너무 큰 행운이라 덥석 줍기가 좀 무섭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있어서요.”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저는 평범하게 회사 다니면서 남들처럼 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갑자기 요정 대모님이 나타나 화려한 호박 마차와 유리 구두를 약속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음…….”

    “예?”

    “그러니까 갑자기 강진현 헌터님이라는 대단한 분이 대단한 대우를 제시하는 게 저한테는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강진현은 실로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잘된 일 아닙니까?”

    “하지만 호박 마차와 드레스는 12시가 지나면 사라져 버리잖아요.”

    “제 제안은 동화 속 호박 마차가 아닙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러다가는 강진현과의 문답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희나는 결국 속내를 말해 버렸다.

    “하지만 저는 일정 규모의 회사에 고용된 정규직이 좋은걸요. 그 외의 일들은 언제든 사라져 버릴 수도 있어요. 멀쩡한 회사도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판국에 개인 사업자 아래로 들어가라니…….”

    희나는 야근 지옥이었던 전 회사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좋은 회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멀쩡히 다니던 회사였는데 하룻밤 만에 완전히 사라져 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일자리를 한순간 잃은 건 극안전주의자인 희나에게 꽤 심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어쨌든 그런 안정적인 정규직도 불안정한 면이 있는 판국이었다.

    ‘그러니 개인 사업자 밑에서, 혹은 프리랜서로 일하는 건 얼마나 불안정하겠어?’

    희나는 되도록 길고 가늘고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큰 미끼가 보인다고 덥석 물기엔 겁이 너무 많았다.

    “그럼 제 제안은 거절하시는 거로군요.”

    강진현은 엄청나게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니고, 좀 더 생각을 많이 해 봐야겠다 정도……?”

    물론 이건 희나가 생각하기에도 엄청난 기회였다. 이 기회를 제 발로 차 버리는 건 말도 안 됐다. 물욕이 불쑥 튀어나와 당장 제안을 받아들이라며 졸랐다.

    하지만 안전주의자의 직감과 45짜리 행운이 희나를 붙잡았다.

    ‘저 사람이랑 얽히면 평범함이랑은 1억 광년 정도는 떨어져 버리게 될 거야!’

    그리고 대체로 이런 극한 상황(?)에서 바짝 서는 희나의 촉은 꽤 믿을 만했다.

    거기다 긴장했다는 이유로 이불과 베개를 아작 내 버리는 고용주는 좀 곤란했다.

    강진현이 희나의 호감을 사겠다고 한 행동은 안타깝게도 마이너스 점수를 받아 버리고 말았다.

    희나는 물욕과 직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끙, 하고 신음했다.

    “죄송한데요,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이후로 며칠 지나지도 않았고 해서요.”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까?”

    “……한 달?”

    이건 1000번은 고민해야 할 일인데, 아직 고민을 100번도 못 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하루에 33번씩 꼬박꼬박 고민한다면 대충 1000번은 채울 수 있을 테니 적어도 한 달은 여유가 필요했다.

    “생각은 여전하시군요.”

    강진현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한 모금 남은 커피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어색한 침묵에 엉덩이가 간질간질해질 찰나였다. 강진현은 갑자기 고개를 퍼뜩 들어 희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왜, 왜 그러세요?”

    아주 부담스러운 눈길이었다. 검은 눈이 열의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제 밑에 곧바로 고용되는 게 부담스러우시다면, 부업은 어떻습니까?”

    “부업이요?”

    “도시락을 제게 파십시오.”

    강진현이 차근차근 대안을 설명했다.

    희나가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고 있으니 지금 다니고 있는 청룡 길드를 굳이 관둘 필요는 없었다.

    대신 일주일, 혹은 한 달에 몇 번 정도 도시락을 싸서 자기에게 팔라는 것이었다.

    “부디, 이것마저도 안 된다고 말씀하진 마십시오.”

    희나는 강진현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제대로 못 먹고 다니면 S급 헌터가 돼서 이렇게 나한테 애걸복걸하고 있을까?’

    어쨌든 밥 못 먹는 것처럼 한국인의 마음을 자극하는 건 없었다. 희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끔 제 도시락 싸 올 때 겸사겸사 강진현 헌터님 것도 준비할게요.”

    “정말입니까?”

    “그 정도야 뭐.”

    밥 못 먹고 다니는 강진현의 모습은 희나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래서 희나는 인간적인 호의를 보이기로 했다.

    “돈은 굳이 주고 싶으시다면, 재료값 정도만 주시면 돼요.”

    도시락 싸기는 손이 좀 가는 일이긴 했지만, 영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생각해 보니 희나는 강진현에게 빚진 게 아주 많았다.

    ‘우리 오빠를 구해 주신 분이잖아.’

    희나에게 오빠인 희원의 목숨은 도시락 몇 개보다 더 값어치 있었다. 은혜를 갚는 거라고 생각하면 약간의 노고 정도야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거기다 대부분의 직장은 겸업을 금지했다. 희나는 강진현에게 돈을 받았다가 괜히 일을 꼬고 싶지 않았다.

    그 부분까지 지적하자, 강진현은 갑자기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희나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통화를 끝마쳤다.

    “겸업 됩니다.”

    “예?”

    “물어봤습니다. 내규에 그런 사항은 없다고 합니다.”

    그사이 회사에 전화를 걸어 내규를 물어본 듯했다. 밥 앞에서 그가 보이는 추진력은 마치 불도저 같았다.

    “그리고 희나 씨의 음식을 공짜로 먹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값은 두둑이 쳐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건당 500만 원을 제안했다. 밥 한 끼의 가치라기엔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었다.

    “헉.”

    희나의 경악에 강진현이 역시나,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너무 낮군요. 그럼 천만 원으로 할까요? 물론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강진현의 밥 사랑과 경제관념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다.

    * * *

    “……그래서 어떻게 됐어?”

    희원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동생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주 흥미진진했던 탓이다.

    「빨리! 빨리!」

    관심 없는 척하던 오색이도 은근 궁금한지 희나를 재촉했다.

    “뭐 어떻게 했겠어? 그거야말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 아니야? 점심시간 다 끝나 가기에 생각할 시간 달라고 하고 나왔지 뭐.”

    “뭐? 밥 한 끼에 천만 원을 준다는데, 뭘 더 고민해?”

    희원이 희나를 향해 뻗었던 몸을 바로 하며 혀를 찼다.

    이건 로또 당첨금을 눈앞에 두고 ‘이걸 받아도 될지 좀 더 생각해 볼게요.’ 하고 말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나는 네가 이해 안 된다. 그렇게 생계 걱정하면서 큰돈 들어올 일을 왜 거절해? 몇천만 원 정도는 강 헌터한테 돈도 아닐걸. 나라면 일단 하고 볼 텐데.”

    오빠의 지적에 희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몰라. 오빠도 내 상황 돼 보면 이해할걸. 엄청 당황스러웠단 말이야.”

    “그래, 이희나 소심한 건 내가 잘 알지.”

    희원의 빈정거림에 희나는 빽 하고 반박했다.

    “신중한 거거든! 돈 준다고 쫄래쫄래 아무 데나 따라가는 누구 씨와는 달리!”

    남매는 그렇게 한동안 투닥거렸다.

    「오색 = 평화 및 화합 추구.」

    달팽이는 어느새 관심을 잃고 껍데기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때였다.

    핏!

    집 안을 밝혀 주던 전등이 한순간 빛을 잃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