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35화
“아! 미친 깜짝 놀랐네!”
놀란 건 희나뿐만이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던 헌터도 욕설을 지껄였다.
하긴, S급의 기척 숨기기였다. 인지하는 게 용한 거였다.
“길드 안에서는 순화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합니다. 알겠습니까?”
강진현이 욕한 헌터를 향해 딱딱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굳어 있던 표정을 부드럽게 폈다. 이건 희나용 표정이었다.
“도와드릴 것이 있을까요?”
“예?”
“희나 씨의 작은 몸집으로 이 넓은 곳을 청소하기엔 조금 벅차 보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거기다 앞치마와 머릿수건으로 착장 어드밴티지를 받으니 길드 청소 따위는 벅차다고 느껴 본 적도 없었다.
체력이 조금 달리는 게 문제긴 했지만, 그건 간식 삼아 밥을 먹으면 금방 해결됐다.
“도와주시겠다는 마음만으로도 감사해요. 하지만 제가 월급 받고 하는 일이 이건걸요. 거기다 청소하고 정돈하는 걸 좋아해서 별로 힘들다고 느끼지도 않아요. 청소 관련 스킬이 있기도 하고요.”
희나는 강진현의 부담스러운 친절을 애써 거절했다.
그렇지만 강진현의 의욕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또한 청룡 길드의 간부 중 하나로, 직원의 복리후생을 위해 힘쓸 의무가 있습니다.”
귀 좋은 헌터들이 이 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강진현 미쳤나 봐.
강진현은 그들의 수군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S급 헌터다운 침착함을 발휘했다.
“침대 정리를 해야 합니까? 이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이불보를 잡아 끌어 올렸다. 부드러운 손길로 보였지만, 이불보는 소리를 질렀다.
찌이익!
이건 도톰한 휴게실용 이불이 반으로 갈라지며 지른 외마디 비명이었다.
“아.”
강진현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듯 멈칫했다. 그리고 은근슬쩍 찢어진 이불을 놓고, 베개를 살살 토닥였다.
하지만 토닥였다는 건 강진현의 생각이었고, 베개의 입장은 좀 달랐다.
퍽! 퍽! 펑!
샌드백 치는 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이내 베개는 폭발음과 함께 장렬히 산화했다.
벌어진 베갯잇 사이로 솜이 볼품없이 흘러나왔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희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가, 강진현 헌터님? 무슨 일 있으세요?”
사실 ‘화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원래 화난 사람한테 화났냐고 물어보면 진짜 화가 나 버리기 때문이다.
거기다 강진현은 화가 나면 손가락 하나로 사람도 찢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헌터였다.
“…….”
강진현은 희나의 물음에 침묵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얼굴에 무언가 그늘이 스쳐 간 것 같기도 했다.
“강진현 헌터님?”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자, 강진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희나 씨……. 이건,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진현은 흐릿한 잔상만 남기며 엉망이 된 현장에서 슉슉 멀어졌다. 쉬운 말로 하자면, 홀라당 도망가 버렸다는 뜻이다.
신데렐라는 자정에 유리 구두를 남기고 사라졌고, 강진현은 찢어진 이불과 터진 베개를 남기고 도망갔다.
희나는 조금 해탈한 듯 허리를 굽혀 반쪽 난 이불을 주섬주섬 주워 들었다.
“……저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일단 이걸 좀 치우면서 머리를 정리해야겠어요.”
상황은 금방 정리됐다. 피곤하다던 헌터를 위해 ‘안락한 침상’을 우선 시전해 주고, 찢어진 이불과 베개는 꾹꾹 눌러 담아 버렸다.
희나가 평소와 같이 일과를 시작하자, 주시하던 시선들도 이내 흩어졌다.
하긴, 헌터 휴게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거기다 ‘천하의 강진현’이라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헌터들은 방금 있었던 일을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 * *
점심시간의 막바지였다.
희나는 옥상 정원 구석에 놓인 벤치에 늘어지게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당장이고 낮잠에 빠져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점심시간 끝나려면 멀었는데, 알람 맞춰 두고 20분만 잘까?’
그러니까 부지런쟁이로 소문난 천하의 이희나가 낮잠을 고민할 정도로 대단히 안락한 분위기였다는 뜻이다.
마침 자리도 외진 곳이라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으랏챠!”
고민하며 크게 기지개를 켤 때였다.
“희나 씨.”
정원 한귀퉁이의 나무 뒤에서 강진현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꺅!”
희나는 나무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민 강진현의 모습에 깜짝 놀라 작게 소리 질렀다.
“접니다.”
강진현은 안심하라는 듯 나무 뒤에서 빠져나와 양손을 들어 보였다. 공격할 생각이 없으니 해치지 않겠다는 뜻처럼 보였다.
“매번 제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놀라시는 것 같습니다.”
강진현이 희나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시무룩하게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착각인 게 분명했다. 강진현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했으니까.
“그야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시니까요. 강진현 헌터님이 무섭거나 나빠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희나는 자기의 새가슴을 열심히 탓했다.
“그렇군요. 앞으로는 기척을 내고 나타나도록 하겠습니다.”
강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나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 섰다. 희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와. 키가 몇일까? 180은 훌쩍 넘으려나?’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 남자인데, 앉은 채로 보니까 더 커다래 보였다.
“무슨 일이세요?”
희나가 묻자, 강진현이 청했다.
“곁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여긴 모두가 함께 쓰는 옥상 정원이었다. 안 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앉아서 강진현을 올려다보는 일은 아주 뻘쭘한 데다 목이 아팠다.
“고맙습니다.”
강진현은 희나가 앉은 곳에서 두 뼘 떨어진 거리에 앉았다.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대화하기에 썩 나쁘지 않은 거리였다는 의미다.
서두를 먼저 뗀 건 강진현이었다.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휴게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도망가 버렸군요.”
희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별로 치울 것도 없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환경 미화팀 팀원들에게 헌터들이 치는 사고의 규모를 귀담아들은 후였다. 이불 좀 찢어진 거야 사고 축에도 못 꼈다.
“아닙니다. 제가 비겁했습니다.”
“겨우 그런 일로 비겁까지야……. 저는 정말 괜찮은데요.”
천하의 S급 헌터 강진현이 자신을 ‘비겁하다’라고까지 칭하자, 희나는 이 사과가 조금 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힘 조절이 안 되는 게 당혹스러워서, 그만 문제를 회피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강진현은 정말 천하의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용서를 구했다.
“희나 씨에게 제대로 된 사죄를 드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세로 이야기하니,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이를 어쩐다? 헌터님께서 죽을죄를 지으셨다며 뺨이라도 때려 드려야 하나?’
희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눈알을 굴리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을 손가락질했다. 강진현의 시선도 희나의 손끝을 향해 움직였다.
시선의 끝에는 인스턴트커피 자판기가 놓여 있었다. 희나는 자판기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미안하시면, 커피나 한잔 사 주세요. 그걸로 퉁 치죠.”
희나는 벤치에 앉아 강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훤칠한 청년이 허리를 굽힌 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자판기의 무슨 버튼을 눌러야 할지 고심하고 있는 상황이란 걸 몰랐다면, 아마 희나는 강진현 헌터가 세계 평화를 위해 진지한 사색에 빠져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저는 밀크 커피로 해 주세요!”
희나는 강진현의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소리쳤다.
그러자 강진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밀크 커피 두 잔을 뽑았다. 시키는 건 잘하는 사람이었다.
“다 됐습니다. 가겠습니다.”
그는 양손에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는 희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나는 잠시 자기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은 한 잔의 커피도 반 잔의 커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었지!’
강진현이 자판기에서 벤치까지 이르는 짧은 사이, 조그마한 종이컵은 구깃구깃 구겨져 꿀럭꿀럭 커피를 토해 냈다.
“이런……. 미안합니다. 남은 커피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강진현은 난감하다는 듯 사과했다.
하지만 희나에게는 남은 커피의 양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손 뜨거웠을 텐데, 괜찮으세요?”
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치마에서 깨끗한 행주를 꺼내 강진현의 손을 닦아 주었다.
자판기에서 갓 나온 커피는 뜨거웠다. 그런 커피를 손에 줄줄 흘리며 왔으니, 어지간히 고통스러웠을 게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제 신체에 크게 위협이 될 만한 온도가 아닙니다.”
강진현이 희나의 손안에서 자기의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피부는 뜨끈뜨끈했는걸요. 남들보다 덜 아프다뿐이지, 아프긴 하셨을 것 아녜요!”
희나는 혀를 차며 행주를 넘겼다.
잠시 희나를 바라보던 강진현은 끈적끈적해진 손을 닦으며 벤치에 앉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따듯한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건넸다. 희나는 구겨진 종이컵을 조심스레 받았다.
바닥에 커피가 한 모금 정도 고여 있었다. 그 난리를 쳤는데 어쨌든 마실 게 남아 있긴 했다.
“잘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희나는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강진현은 자기 몫의 종이컵을 조심스레 붙잡고만 있었다. 꺼낼 말이 있어 보였다.
“못난 모습만 보여 드린 것 같아서 민망하군요.”
그의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어쩐지 제법 머쓱해 보이기도 했다.
희나는 김화순 팀장의 말을 기억했다.
‘S급 헌터 강진현에 대한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그 말로 미루어 조금 허점이 있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했다.
‘……물론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