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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34화 (34/228)
  • 던전 안의 살림꾼 34화

    “타인에게 함부로 던전 부산물을 맡긴 제 실수가 크니, 모른 척 넘어가겠습니다. 그 조각이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면야 상관없습니다. 던전 안에서 나온 부산물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이 없지만은 않으니까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대로 잘려서 고소당하는 줄 알고 정말 많이 걱정했어요.”

    희나는 안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강진현이 자기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차라리 희나 씨가 잘리길 기다렸다가 제 개인 요리사가 되어 달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섬뜩한 소리에 희나는 배신감 어린 눈으로 강진현을 바라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앗, 그건!”

    “농담입니다.”

    강진현은 뒤늦게 변명했다.

    하지만 강진현의 진지한 표정을 보았다면 희나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진담으로 받아들였을 게 분명했다.

    “영 못 믿겠으면 마석을 걸고 약속이라도 할 생각이 있습니다.”

    강진현이 인벤토리에서 자그마한 마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석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선언했다.

    어찌나 재빨랐던지 희나가 말릴 틈조차 없었다.

    “나 강진현은 이희나 씨가 잃어버린 ‘□□의 조각’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곧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마석은 반짝, 빛을 내더니 파아앗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되어 사라졌다.

    시스템창이 계약 성립을 알렸다.

    ‘헉, 저 비싼 마석을…….’

    희나는 저 마석 하나가 몇백만 원, 아니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난번 김밥 사건 때 누가 주머니에 쓱 넣어 둔 마석의 시세를 찾아보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마석의 쓰임은 제각각이었지만, 이렇게 작은 크기의 마석은 헌터들 간의 계약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헌터가 마석을 걸고 시스템을 통해 무언가를 약속하면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계약을 어길 경우, 시스템이 해당 헌터에게 불이익을 가했기 때문이다. 가볍게는 상태 이상부터 시작해 심하게는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약속을 강진현이 희나 앞에서 대뜸 해 버린 것이다.

    경악하고 있는 희나에게 강진현이 말했다.

    “저는 한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제 개인 요리사로 들어오실 생각이 좀 드십니까?”

    “그, 글쎄요.”

    희나는 말을 더듬었다. 강진현 딴에는 점수를 따려고 한 일 같았지만, 희나에게는 또다른 감점 요인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성급해서야!’

    극안전주의자인 희나에게 강진현은 너무나 태풍 같은 존재였다.

    애당초 강진현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이런 사람을 고용주로 두고 있으면 삶이 고달파질 것 같았다.

    어쨌든 사실 확인은 해야 했으므로 희나는 다시금 캐물었다.

    “그럼 정말로 그 조각 분실 건은 없었던 것으로 쳐주시는 거지요?”

    강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고서에 공간 이동과 함께 소멸했다고 기록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신다면 이 이상의 일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희나는 자기만 믿으란 듯 호기로운 표정을 짓는 강진현이 조금 두려웠다.

    ‘처음 만났을 때의 원칙주의자 같은 모습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야?’

    우민아도 분명히 강진현의 대쪽 같은 성격을 욕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로 고작 음식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걸까?’

    희나는 시계를 힐끔거리며 주섬주섬 텅 빈 도시락 통을 챙겼다.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묵직했던 찬합이 엄청나게 가벼워졌다.

    “네. 네에……. 제안해 주신 내용은 저도 좀 천천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일단 보류해 둘게요. 그리고 점심시간이 끝나 가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모시는 길 바래다드리겠습니다.”

    강진현이 깍듯한 태도로 일어나 희나를 문가로 이끌었다.

    희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같은 건물인데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법입니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일개 환경 미화팀 소속 팀원을 청룡 길드 최고의 헌터 강진현이 극진하게 모시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인다?

    청룡 길드에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게 분명했다. 희나는 그런 관심은 질색이었다.

    희나는 일터로 자기를 에스코트해 주겠다는 강진현을 겨우겨우 말렸다.

    “이렇게 문 열어 주시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한걸요.”

    “영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강진현은 몹시 아쉬워하며 사무실 문을 친히 열어 주었다.

    희나는 그 호의에 몸 둘 바를 모르고 굽신굽신 밖으로 나섰다.

    “부디,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고민하지 마시고 곧바로 찾아오십시오. 희나 씨를 향한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강진현은 마지막 한마디까지 자기를 어필하는 걸 잊지 않았다. 집요하기가 정말 S급다웠다.

    그게 어찌나 부담스러웠던지, 희나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한숨을 휴우 내쉴 수 있었다.

    ‘얼떨떨하네. 어쨌든, 공간의 조각을 써 버린 건 슬쩍 넘어가게 되었으니 결론적으로 잘된 건가?’

    희나는 일단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강진현 헌터의 제안은 오빠랑 같이 생각해 봐야겠어. 나한테 너무 과분한 기회라서 어쩐지 불안해.’

    희나의 꿈은 조금 소박하더라도 길고 가늘고 평화롭게 살기였다.

    그에 반하여 강진현은 너무나 큰 인물이었다. 이미 ‘살림꾼’이라는 특별한 클래스로 각성한 희나에게 이 이상의 특별함은 필요하지 않았다.

    거기다 뭔가 촉이 왔다. 희나는 직감을 맹신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신뢰했다.

    강진현에게서는 ‘이 사람과 얽히면 내 삶이 복잡해질 것’이라는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희나의 직감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이날 이후로, 희나의 일상이 뒤틀리기 시작했으니까.

    * * *

    - ……지난 분기와 비교하면 던전 리셋 주기가 1.32배가량 빨라졌습니다. 충분한 데이터가 쌓이지 않아 아직 확신하긴 이릅니다만……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추세입니다.

    - 던전 리셋 주기가 빨라졌다라.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 시청자분들을 위해 한 번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 던전 리셋 주기란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처리한 후, 새로운 보스 몬스터가 나타날 때까지의 주기를 이릅니다. 각 던전마다 상이하나 2~3개월 정도의 텀이 평균적입니다. 이 때문에 주기적으로 던전 공략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몬스터의 개체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던전 브레이크’라 불리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 던전 브레이크. 던전 게이트가 깨지며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나오는 일을 이르는 용어지요?

    - 그렇습니다.

    - 그런데 던전 리셋 주기가 짧아진다면 던전 게이트 방어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닙니까? 지금도 길드 대비 관리 던전 수가 한계치에 이른 상황입니다.

    - 이에 대비해 길드 연합에서 회담을 가질 예정이며…….

    누군가가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 익숙한 던전 관련 시사 프로그램이 흘러나왔다.

    상반기의 던전 활동 분석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은 어디에서 던전 게이트가 새로 오픈되었는지, 국내 B급 던전의 토벌 주기가 가까워져 온 근황은 어떤지 등을 전했다.

    희나가 뉴스 소음을 배경음 삼아 막 헌터 휴게실을 청소하려던 참이었다.

    헌터들의 시선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두가 한곳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헉?’

    헌터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희나의 동공도 덩달아 지진이 온 듯 흔들렸다.

    마침 휴게실 한구석에 길게 드러누워 있던 우민아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여 입을 열었다.

    “뭐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오…… 시끄럽다고 휴게실엔 코빼기도 안 비치던 놈이 웬일이래?”

    모두가 궁금한지 작게 웅성거렸다.

    하지만 희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부분의 헌터가 휴게실에 오는 이유와 겹쳤다.

    희나의 손길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물론 강진현의 목표는 ‘희나를 자기 집 주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그보다 더 심화한 종류였지만 말이다.

    ‘윽. 그 말을 하는 순간 다른 헌터들까지 난리가 날 것 같은데.’

    희나는 바짝 긴장하며 다가올 파국을 대비했다.

    “……이유가 있어야만 휴게실에 올 수 있습니까? 이곳은 모든 헌터들에게 열려 있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다행히 강진현은 헌터 휴게실에 온 용건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깐깐하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흥, 실없긴.”

    그 대답에 우민아는 투덜거렸고, 희나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치는 있나 봐.’

    어쨌든 강진현 덕분에 평소보다 조용한 상태에서 휴게실 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들 그의 눈치를 보는지 애처럼 뻗대던 모습들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이러면 편하긴 하겠다.’

    희나는 왁자지껄한 헌터 휴게실의 분위기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얌전히 청소에 열중할 수 있는 상황도 좋았다.

    - 청룡 길드장은 여름에 있을 대규모 토벌에 대해 브리핑하며…….

    뉴스를 들으며 걸레질을 하는데, 헌터 하나가 다가와 징징거렸다.

    “침대 좀 정리해 줘……. 그동안 희나 씨 손길이 닿은 침상이 너무 그리웠어.”

    던전 공략으로 거의 보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희나는 반가움에 방긋 미소 지으면서도 염려 어린 말을 건넸다.

    “던전 가서 고생 많이 하셨나 봐요. 얼굴이 반쪽이 돼서 왔네요.”

    “이번엔 진짜 최악이었어. 곤충형 몬스터 군집지였는데, 벌레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와서 한숨도 못 잔 것 있지? 조금 잘 만하면 뭐가 튀어나오고 그래서.”

    두런두런 근황을 이야기하며 침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 옆으로 스윽 다가왔다.

    커다란 키를 가지고선 어찌나 은밀하게 움직이던지, 희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깜짝이야!”

    강진현이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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