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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33화 (33/228)

던전 안의 살림꾼 33화

“지금 하고 계신 일이 마음에 드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희나가 눈을 굴렸다. 이건 신개념 애사심 테스트인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모두 친절하시고, 월급도 따박따박 나오고, 야근도 별로 없고, 수당도 빼먹지 않고 적용해서 나오고요. 청룡 길드는 일하기 정말 좋은 곳이에요. 거기다가 어지간해서는 잘릴 일이 없는 정규직이잖아요. 그게 가장 마음에 들어요. 저는 딱 회사원 체질이거든요.”

희나는 면접관과 마주한 기분으로 청룡 길드의 면면을 칭찬했다. 그러자 강진현의 미간에 옅게 주름이 서는 게 보였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거야?’

강진현의 심보에 혀를 내두르며 청룡 길드에 대한 금칠을 계속하려 할 때였다.

“만약, 지금 받는 임금의 두 배를 제안한다면 청룡 길드를 퇴사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희나는 입을 떡 벌렸다.

‘내가 그…… 공간의 조각 잃어버린 걸 알았나? 그래서 돈 받고 꺼지라는 건가?’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예? 그, 그게 무슨, 무슨 말이세요?”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로 묻자, 강진현이 희나를 진정시켰다.

“아,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서 당황하셨겠군요. 그러니까 제 말은 청룡 길드에서 받던 임금의 두 배를 드릴 테니 제 개인 전담 요리사가 되어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요리사요?”

청소부면 청소부지, 요리사라니?

뜬금없는 제안에 희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진현은 몹시 진지했다.

“S급 헌터로 각성한 이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희나 씨를 제 개인 요리사로 채용하고 싶습니다. 돈 외에 원하시는 것이 있거든 얼마든지 요구하셔도 됩니다.”

엄청나게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월급은 두 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기다가 해 줄 일은 밥 차려 주는 일뿐!

하지만 그래서 더 수상했다. 희나는 돌다리도 두들긴 후, 다른 사람이 건너는 걸 보고 건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과분한 보상이 따르는 일에는 무언가 위험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오빠인 희원의 헌터 일 같은 것 말이다. 어쨌든 던전에 들어가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가가 값비싼 것이었다.

희나의 음모론 뇌가 간만에 일을 했다.

‘이것도 뭔가 리스크가 있는 게 틀림없어!’

“세 끼를 전부 차리기 어려우시다면 두 끼만 준비해 주셔도 됩니다. 아니면 주 5일로 근무하도록 할까요? 아니…… 이런 식으로 미리 도시락을 싸 주신다면 주 4일도 가능합니다. 돈이 마음에 차지 않으신다면 월급은 지금 받으시는 것의 세 배로 할까요?”

희나의 침묵에 애가 탔는지 강진현은 얼토당토않은 조건들을 붙여 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수록 희나의 의심은 짙어지기만 했다.

S급 헌터에게 이런 표현을 붙이기엔 좀 미안했지만…… 순 사기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부모님 없이 팍팍하게 자란 희나가 확실히 아는 세상의 진리 중 하나는 ‘대가 없는 친절은 없다!’였다.

물론 희나의 손맛이 들어간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겨우 밥 때문에 저한테 이렇게 대단한 조건을 제시하신다고요?”

집과 밥, 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희나가 묻기에는 조금 생뚱맞은 질문이긴 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S급 헌터인 강진현이 밥 때문에 고작 D급 살림꾼에 불과한 희나에게 이렇게까지 저자세를 보일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희나 생각에는 말이다.

“고작 밥이 아닙니다. 희나 씨가 만든 음식을 그렇게 낮추어 말하지 마십시오!”

강진현이 강경하게 희나의 도시락을 감쌌다. 아무리 음식을 만든 희나라 해도, 도시락을 깎아내린다면 참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희나는 땀을 찔끔 흘리며 대꾸했다.

“아, 예. 밥이 중요하긴 하죠.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니까요.”

실제로 희나는 ‘밥심’이라는 스킬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밥은 정말 중요합니다. 점심 메뉴가 어떠하냐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결정되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저는 그런 미식의 즐거움을 잊고 산 지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강진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런.’

희나는 신음했다.

미식계를 가슴에 품고 왔더니, 여기는 미남계에다 가슴 찡한 사연으로 사람의 정신을 홀리려 하고 있었다. 이러다 본론도 못 꺼내게 생겼다.

희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시만요!”

“네. 말씀하십시오.”

강진현은 허리를 세워 앉아 희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몹시 깊었다.

“그 얘기는 일단, 천천히 생각해 볼 테니까 다른 이야기부터 하면 안 될까요?”

희나는 강진현을 살살 꼬셨다.

강진현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희나의 제안을 속으로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언제까지 생각해 보실지는 미리 대답해 주셔야 할 겁니다.”

사람이 깐깐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검은 눈이 차분하게 활활 불타고 있었다.

“언제까지 생각해 보실 겁니까, 이희나 씨?”

“하, 한 달이요.”

박력에 희나는 저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었다. 참고로 한 달이라는 숫자는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기한이었다.

“한 달……. 알겠습니다. 한 달 정도는 두고 보아야 상대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적과 동료는 올바르게 파악해야지요.”

말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강진현은 희나의 도시락을 먹고 말문이 트인 것 같았다. 그는 계속 중얼중얼 무어라 말을 이어 갔다.

내용은 희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단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눈앞의 사람을 낚아채 잡아가 버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뿜는 묘한 광기에 희나의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S급 전투계 헌터가 내뿜는 집착 어린 눈길은 초식 동물과인 희나의 본능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한순간, 강진현이 담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제가 잠시 기운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었군요. 미안합니다.”

그가 기운을 갈무리하자 무거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산뜻해졌다.

‘식탐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무서워질 수도 있구나.’

희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튼……. 본론이 있다면 이야기하십시오. 듣고 있겠습니다.”

강진현이 마음 놓고 이야기하라는 듯 팔짱을 꼈다.

희나는 준비했던 말들을 꺼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까 강진현의 전속 요리사 권유 덕분에 긴장한 것도 싹 가라앉은 상태였다.

“지난번에 저랑 강진현 헌터님 둘이서 던전에 떨어졌을 때 만졌던 더러운 동전같은 조각 기억하세요?”

“아. 기억합니다. 제 손에는 닦이지 않았고, 희나 씨 손에서는 깨끗하게 닦였던……. 덕분에 희나 씨에게 귀속되었던 것 같은데요.”

며칠 전 일이라서인지 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문제가 생겼는데요.”

“무슨 일입니까?”

희나는 솔직히 고백했다.

“그 조각을 잃어버렸어요. 집에 달팽이를 키우는데, 달팽이가 그 조각에 올라타서 꾸물거리는 걸 구경하는 사이 그냥 없어져 버렸지 뭐예요.”

사실이 아주 조금 감추어지고 왜곡되긴 했지만, 어쨌든 대답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는 최대한 솔직히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희나 씨가 애완 달팽이를 키우는데, 그 달팽이가 그 동전같은 조각을 가지고 도망가 버렸다고요?”

“……예. 비슷해요.”

남의 입으로 듣고 보니 정말로 이상하게 들리는 게 문제였지만.

“독특한 사연이군요.”

온갖 던전에서 상식 이상의 장면들을 목격한 짬이 있어서일까?

다행히 강진현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할 뿐, 희나의 변명에 무어라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강진현 헌터에게 비상식적인 부분이 있는 게 이렇게 다행으로 여겨질 줄이야.’

희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조각은 던전 공략팀에서 발견한 거고, 청룡 길드에 속한 거니까…….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솔직히 말해서 음식 싸 온 것도 제 실수 좀 잘 봐달라는 뇌물이었어요.”

우민아는 강진현이 먹을 것에 정신이 팔린 사이, 대충 일을 해결해 버리라고 귀띔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로 작전을 변경해야 했다. 도시락 먹기에 너무 열중한 탓에 강진현의 귀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일주일은 굶은 사람처럼 도시락을 해치웠다. 희나의 미약한 ‘저기요……. 제 말 좀 들어 보시겠어요……?’ 따위가 들릴 리 없었다.

때문에 희나는 강진현을 코앞에 두고 이런 어색한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희나는 강진현의 선고를 기다리며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입안이 자꾸 말라 왔다. 희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공사 구분이 명확한 사람이랬으니까 어쩌면 이런 뇌물 따윈 안 통할 수도 있어. 그냥 먼저 말 꺼낼 때까지 모른 척 지나갈 걸 그랬나? 괜히 일만 더 키운 것 아냐?’

온갖 생각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갈 때쯤이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희나는 웃지 않았고, 이 방 안에는 단둘뿐이었으니 웃을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고개를 퍼뜩 들어 강진현을 올려다보니, 그의 입가에 웃음이 빙그레 걸려 있었다.

만약 우민아가 보고 있었다면 ‘왜 쪼개냐?’ 하고 물어볼 만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희나는 우민아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손히 여쭈었다.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웃어서 미안합니다, 희나 씨. 실수를 먹을 것으로 무마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게 재미있기도 하고, 그런 계책에 넘어가 버린 저도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듣기에 반가운 소리였다. 희나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 말은?”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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