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32화
“그야 당연……한 건 아니지! 애당초 네가 좋지 않았으면 이렇게 앉아서 고기 먹을 일이 있었겠어? 겸사겸사인 거야.”
희나는 우민아를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맞아요. 언니가 이렇게 잘해 주시는데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치? 아, 맞다. 근데 그 새로 생겼다는 씨앗은 가져다주지 마. 괜히 얘기 복잡해져서 꼬투리 잡힐라.”
“그건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시원한 대답에 우민아가 씨익 웃음 지었다.
“어쨌든 조언 감사해요. 언니 말대로 뭐라도 좀 싸 가서 슬쩍 얘기해 봐야겠어요.”
희나는 우민아의 말대로, 강진현에게 미인계(美人計)가 아닌 미식계(美食計)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그게 훗날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모른 채…….
* * *
똑똑똑.
희나는 점심시간 직전 쉬는 시간을 틈타 강진현 헌터의 개인 사무실을 노크했다.
‘걔는 던전 공략이 끝나면 한동안 자기 사무실에 틀어박혀서 잘 나오지 않아. 그러니까 언제 가도 쉽게 만날 수 있을 거야.’
우민아를 통해 알아낸 장소였다.
“누구십니까?”
문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강진현이었다.
희나는 손에 든 5단 찬합 손잡이를 꽉 쥔 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저 이희나라고 하는데요……. 예전에, 그 노역장에 같이 떨어진 미화팀이요.”
혹시 자기를 기억하지 못할까 봐 어물어물 설명까지 덧붙였다.
“아. 희나 씨군요. 들어오십시오.”
다행스럽게도 강진현은 희나를 잊지 않은 듯했다.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붙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이 스르륵 열렸다. 강진현이 안쪽에서 직접 문을 열어 준 것이다.
“앗, 감사합니다.”
희나는 꾸벅 허리를 굽혀 진정한 을이 보여 줄 법한 이상적인 90도 인사를 했다.
“아니, 이러실 필요까진……. 아, 예.”
그 부담스러운 인사에 강진현은 덩달아 허리를 꾸벅 숙였다.
S급 헌터의 조아림에 희나는 한층 더 깊숙이 허리를 굽혔고, 강진현은 당황해서 더 고개를 숙였다.
희나와 강진현은 한동안 누가 더 깊이 허리를 굽히나 대결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굽실거렸다.
“……그래서 희나 씨,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S급 헌터답게 강진현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용건을 물었다.
희나는 우민아의 말을 떠올렸다.
‘먼저 못 물리게 먹이고 시작해.’
우민아가 말하길, 어떻게 해서라도 입안에 음식을 쑤셔 넣으라고 했다.
희나는 용기를 내어 손에 든 도시락 찬합을 강진현에게 내밀었다.
“저희 오빠 구해 주신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주셔서요.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릴까 하다가, 그나마 제가 할 줄 아는 게 요리여 가지고……. 음식을 좀 해 왔어요.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몇 입 드셔 보시는 건…….”
희나의 권유에 강진현이 부담스러운 낯을 했다.
우민아의 말에 따르면, 이건 희나의 정성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입 짧은 자기 식성이 드러날까 봐 민망해서 그런 거였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런 과분한 감사 인사까지 받을 일은 아닙니다.”
“강진현 헌터님, 혹시 점심 안 드셨으면 여기서 한 입 하고 나가실래요?”
희나는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평소답지 않은 뻔뻔함이었다. 민망함에 귓바퀴가 빨개졌다.
하지만 자기의 어깨에 걸린 생계와 물어내야 할지도 모르는 던전 부산물의 값어치를 생각하니 절로 악다구니가 솟았다.
“제가 정말로 정성을 다해서 싼 거라서, 드시는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래요.”
희나는 강진현의 옆구리 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S급 전투계 헌터마저 말려들어 갈 정도로 가히 전투적인 발걸음이었다.
그대로 희나가 도달한 곳은 낮은 티 테이블 앞이었다.
사무실 한구석에는 폭신해 보이는 소파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방문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장소인 것 같았다.
“자! 강진현 헌터님께서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해 봤어요.”
희나는 테이블 위에 찬합을 쿵 내려놓았다. 그리고 재빨리 보자기를 풀고 5단 찬합을 분리해서 척척 늘어놓았다.
맨 아래 통에는 아래층 헌터들이 보면 환장할 김밥을 준비했고, 그 위에는 샌드위치를 재료별로 알록달록하게 싸 넣었다.
3층에는 한국의 전통 음식이나 다름없는 닭튀김도 채웠다. 무슨 맛을 좋아할지 몰라서 프라이드에, 간장 양념에, 일반적인 빨간 고추장 양념까지 색색으로 채워 넣었다.
네 번째 칸에는 야채 베이컨 말이와 유부초밥을 꽉꽉 쑤셔 넣었다.
마지막, 맨 위층에는 입가심거리로 과일을 정성스레 썰어 넣었다. 사과는 갈변하지 않게 소금물에 살짝 담근 후 토끼 모양으로 깎았다.
그리고 평소에 비싸서 돈 주고 사 먹어 본 적 없는 멜론과 파인애플까지 정성스레 손질해서 마지막 찬합을 그득하게 채웠다.
이 5단짜리 도시락은 희나의 정성과 손맛을 집대성한 예술 그 자체였다.
강진현 또한 이 도시락에 담긴 D급 살림꾼의 카리스마를 알아보았는지, 주춤했다.
“이건…….”
“별거 아니지만 약소하게나마 준비해 봤어요.”
사실 희나의 말과는 다르게 이 도시락은 엄청나게 ‘별거’였다.
어제 밤늦게까지 메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채워 넣은 찬합통 아니던가!
얼마나 고심했냐면 개인적으로 김밥 60줄을 쌀 때보다 이 5단 도시락 하나 싸는 게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희나는 준비해 온 수저를 꺼내어 강진현의 손에 억지로 쥐여 줬다.
S급 헌터인 강진현이었지만, D급 살림꾼인 희나의 손길에 담긴 애달픔을 느껴서인지 손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혼자 먹기에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는 중얼중얼 양이 많으니, 뭐니 하며 미리 변명을 했다.
희나는 밥투정하는 어린애 대하듯 S급 헌터를 살살 달래며 찬합을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알아요. 다 드시기엔 많다는 걸 아니까, 하나씩만이라도 맛봐 주세요.”
“그럼, 성의를 봐서라도……. 고맙습니다.”
강진현이 한숨과 함께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자기 앞에 한가득 차린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강진현은 동글동글한 김밥을 집었고, 대수롭지 않게 입안에 집어넣었다.
언제나 그렇듯 일반식은 그에게 너무 짜거나 싱겁거나 비렸다.
이 김밥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김밥을 입에 넣고 어금니로 와그작, 깨무는 순간 강진현은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여기까지였다.
강진현이 정신을 차린 건, 찬합에 남은 마지막 사과 한 조각을 입안에 집어넣은 직후였다.
“속 괜찮으세요?”
“……예?”
희나는 퍼뜩 꿈에서 깬 것처럼 구는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강진현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는 표정으로 먹던 사과 조각과 텅 빈 찬합을 번갈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나는 이제 저 표정의 의미를 알았다. 긍정적인 표시였다!
‘내 손맛 스킬이 먹혔구나!’
우민아에게 고기를 구워 주었을 때 우민아의 표정이 저랬고, 희나의 김밥을 처음 먹어 본 헌터들의 표정도, 집밥을 먹은 오빠의 표정도 저랬다.
너무 맛있어서 자기가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실감하지 못하는 얼굴 말이다.
희나는 텅 빈 찬합을 망연하게 보고 있는 강진현을 향해 걱정 어린 투로 말을 걸었다.
“양이 혼자 드시기에 좀 많았을 텐데, 소화제 필요하지 않으시겠어요?”
부정 청탁이고 뭐고에 앞서, 강진현은 심하게 많이, 그리고 빨리 먹었다.
최소 5인분은 될 양을 꽉꽉 눌러 담아 싸 갔는데, 그걸 30분도 안 돼서 싹 다 해치웠다.
S급의 젓가락질이란 또 얼마나 빠르던지, 잔상이 남을 정도로 재빨랐다. 거기다 강진현은 입안에 음식을 넣는 족족 들이켰다.
‘먹었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너무 순식간이었다. 강진현은 음식을 거의 액체처럼 꿀떡꿀떡 마셨다.
아무리 S급의 육체가 강철 같다고는 해도 저걸 소화할 내장까지 S급어치만큼 강인할까? 그런 걱정이 들 정도였다.
부스스 정신을 차린 강진현이 황망히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희나 씨, 방금 제게 무엇을 먹인 겁니까?”
희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도시락이요.”
“정말 단순한 도시락이 맞습니까?”
도시락이 도시락이지, 무엇이라 설명할까?
하지만 강진현의 눈길이 너무나 진지했다. 희나는 뭐라도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시락 구성을 설명했다.
“네. 1층엔 김밥, 2층엔 샌드위치, 3층엔 닭튀김, 4층엔 베이컨 야채 말이랑 유부초밥, 5층엔 과일을 넣은 도시락이에요. 제가 직접 만들었고요.”
희나의 대답에 강진현이 작게 읊조렸다.
“희나 씨가, 직접 만드셨다고요?”
“네. 설마 감사의 도시락을 남에게 대신 싸라고 했겠어요? 그럼 진작에 말씀드렸죠. 이건 제가 재료부터 직접 골라 요리한 음식이랍니다.”
희나는 이것이 다 자신의 손을 거쳐 만든 걸작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래야 이다음 꺼낼 말이 잘 먹힐 것 같았다.
“재료부터, 직접, 골라, 요리했다고요.”
왜 듣는 사람 무섭게 한마디씩 말을 끊어 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희나는 이제 본론을 꺼낼 타이밍을 계산했다.
‘점심시간이 전부 끝나기 전에 결판을 내야 해!’
“저, 강진현 헌터님…….”
준비했던 대사를 비장하게 꺼내려 할 때였다.
“희나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던 강진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희나는 속으로 가슴을 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네? 무슨 일이세요?”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