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의 살림꾼 24화
“헐렁헐렁해서 소매도 잘 안 접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적들의 소굴에 비밀리에 잠입해야 하는데, 이래서야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옷자락에 걸려 나자빠질 판이었다.
그 꼴을 바라보던 강진현이 손을 내밀었다.
“로브를 다시 벗어 주시겠습니까?”
“예에…….”
희나는 주섬주섬 로브를 벗어 강진현에게 건넸다. 아이템을 다시 회수하는 걸 보니, 다른 방법을 사용하려 하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역시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
한숨을 쉬며 말을 건네려던 찰나였다.
부욱!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 찢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희나는 눈앞에 펼쳐진 예상치 못한 광경에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부욱, 북, 부우욱!
강진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로브의 천 자락을 붙잡고 부욱 찢어 냈다.
손가락에 칼날이라도 숨겨 놨는지, 튼튼하고 질겨 보이는 로브는 강진현의 손끝에서 깔끔하게 찢겨 나갔다.
“가, 강진현 헌터님?”
희나는 가까스로 말문을 되찾아 입을 열었다. 강진현은 희나의 부름에 덤덤하게 대꾸했다.
“예.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강진현은 마저 옷을 북 찢어 내더니 대답했다.
“이희나 씨가 잘못을 했다고요? 전혀요.”
“그럼 저 비싼 아이템을, 아니, 로브를 갑자기 왜 찢으시는 건가요?”
강진현이 찢고 있는 저 로브는 그냥 옷이 아니었다. 던전 부산물로 만든 아이템이었다.
희나는 아이템의 시세 따위는 정확히 몰랐지만, 그게 엄청나게 비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볼품없는 아이템이어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했다.
아마 강진현이 넝마로 만들어 놓은 저 로브도 최소 몇억 원은 할 게 분명했다. 희나의 몸뚱어리를 해체해서 팔고 또 팔아도 마련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강진현 헌터가 돌아 버렸나?’
그런 상황에서 희나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강진현은 희나의 요상 미묘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북북 찢어 낸 옷을 다시 희나에게 건넸다.
“입어 보십시오.”
S급 헌터 특유의 묘한 박력이 있었으므로 희나는 얼떨결에 찢어진 옷을 받아 입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로브를 입은 희나의 모습이 흡족한 듯 강진현이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길이가 맞을 겁니다.”
희나는 팔을 들어 올려 로브의 소맷자락을 살폈다. 희나의 손등을 덮고도 남던 소매가 훅 줄어들어 9부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 질질 끌리던 기장도 부쩍 짧아져서 무릎께에서 살랑였다.
희나는 이번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설마 내 몸에 길이를 맞춘다고 몇 억짜리 옷을 막 찢은 거야? 집 한 채를 그냥 막 찢어 버린 거야? 어?’
“그럼 출발하도록 합시다.”
한편, 강진현은 개운하게 손을 탁탁 털어 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게이트가 있을 산으로 향했다.
희나는 어쩔 줄 몰라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따라오는 희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강진현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문제가 있습니까?”
“비싼 아이템을 저 때문에 이렇게 망가뜨려도 되는 건가요?”
“그닥 값진 건 아닙니다. 어차피 이런 아이템은 몇 번 입으면 금방 닳아서 해지니까요.”
잘나가는 헌터들은 돈이 아주 많아서 일반인과는 소비 수준이 다르다고 듣긴 했다.
그런 맥락에서 S급 헌터인 강진현의 금전 감각은 소시민인 희나의 이해 범주 바깥에 있었다.
‘그냥 멀쩡한 옷을 찢어도 당황할 텐데, 엄청나게 비싼 아이템을 찢어 버리곤 별 상관없다고 하다니.’
희나는 헤 벌어지는 입을 겨우 다물었다.
“제가 찢은 것이니, 물어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따라오십시오.”
강진현이 희나를 안심시키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깟 푼돈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이 빨리 출발이나 하자는 걸로 보였다.
“예, 예! 갈게요! 잠시만요!”
희나는 허둥지둥 바닥에 떨어진 로브 조각들을 주워 앞치마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당장 이걸 가지고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수억 원짜리 옷 조각을 황야에 버리고 가기엔 아까웠기 때문이다.
짧아진 로브를 걸친 희나와 순식간에 몇억 원을 공중분해 해 버린 강진현은 열심히 걸어 마침내 산어귀에 도착했다.
황야 한가운데 있는 돌산이었으므로 싱그러운 녹음보다는 황량함이 감돌았다.
“지도에 이 이상 자세한 정보는 없습니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한다, 하는 정보 같은 건?”
“네. 그렇게 자세한 지도가 아니라서…… 산 그림 위에 게이트가 있다고 점만 찍혀 있어요.”
“그럼 게이트를 찾아 탐색을 시작해야겠군요. 이희나 씨, 여기부터는 경비 인원이 상당하니 발소리를 낮추고, 제 등 뒤에 꼭 붙어 따라오십시오.”
희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강진현의 뒤를 따랐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해 봤는데.’
희나는 스릴러 영화도 안 좋아했다. 보는 내내 심장이 조마조마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가 적들의 본거지에 침투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숨죽인 채로 돌산을 오르다 보니 저 먼 곳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돌을 깨는 소리와 일을 재촉하는 소리 등이었다.
‘끌려온 사람들이 강제 노역하는 곳인가 봐.’
인권이란 게 말소된 현장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구역감이 드는 동시에 소름이 확 끼쳤다.
“노천 광산이군요. 무엇인가를 채굴 중인 것 같습니다.”
시야가 좋은 강진현이 상황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눈길을 빛냈다.
“노천 광산 꼭대기에 게이트가 열려 있습니다. 탈출 위험이 높아서 그런지 경비가 아주 삼엄하군요.”
“무서워요.”
절망적이었다. 강진현의 말대로라면 어떻게든 무력 충돌을 피할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강진현이 잘게 떨리는 희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란이 일면 번거롭게 되어서 이렇게 잠입하는 것뿐이지, 저는 충분히 저들을 상대할 만한 무력이 있습니다.”
강진현의 말은 신뢰가 갔다. 그리고 실제로도 맞았다.
노천 광산에 가까워질수록 감시꾼들이 많아졌는데, 그는 희나를 데리고도 감시를 요리조리 잘 피해 지나갔다.
깡깡깡! 뭔가를 캐고 흙무더기를 파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강진현이 커다란 바위 뒤에서 멈추어 서더니 희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여기부터는 주의해야 합니다. 여차하면 제가 이희나 씨를 들고 게이트를 향해 튀겠습니다.”
“네넵.”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건 손쉬운 게임 같은 겁니다.”
강진현이 말도 안 되는 격려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노역장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만! 그만하면 됐잖아!”
익숙하디익숙한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희나의 귀가 쫑긋 섰다.
‘어? 이 목소리는?’
여기서 절대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건 절대 헷갈리기 어려운 목소리이기도 했다.
25년 평생을 꼬박꼬박 들어 온 목소리 아니던가?
“사람이 쓰러졌다고! 내가 일을 두 배로 할 테니, 이 사람 좀 어떻게 해 봐!”
몇 달째 행방이 오리무중이었던 오빠의 목소리였다.
“가, 가, 강진현 헌터님! 잠시만요. 무슨 일인지 잠깐만 볼게요.”
다급해진 마음에 희나는 바위 뒤에 딱 붙어서 눈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둥그렇게 트인 노천 광산의 광경이 훤히 보였다.
희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빠!’
그곳에는 희나의 오빠가 있었다. 쓰러진 남자를 어깨동무해 받쳐 안으며 고함을 치고 있었다.
“가만히 있지 좀 말고, 누가 좀 나와 보라고!”
희나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야윈 모습으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 장면에 희나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강진현이 희나를 부축해 일으키며 속삭였다.
희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뺨을 타고 흘렀다.
“희나 씨?”
희나의 눈물을 본 강진현은 당혹한 듯했다. 꼬박꼬박 ‘이희나 씨’라고 부르던 것도 잊은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희나는 그런 호칭 변화 따위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간 돈 벌러 간 게 아니라 납치당해 있던 거였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언젠가 돌아오겠지, 하고 속 좋게 기다렸는데…….’
걱정된다, 걱정된다, 말만 했지 무심했던 자기 모습이 떠올라 절로 눈물이 퐁퐁 쏟아졌기 때문이다.
지난 두 달, 희나가 좋은 직장에 취업해 잘 먹고 잘 지내는 동안 고생했을 오빠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저기 소리치고 있는 사람이, 흑, 우리 오빠예요. 오, 오빠가, 그동안 집에 안 들어왔는데, 흐윽, 여기에 잡혀 있었을 줄은……. 흐어엉.”
희나는 차마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엉엉 울었다. 적들에게 위치가 들킬까 봐, 차마 크게 울지도 못했다.
“울지 마세요. 쉬, 괜찮습니다, 희나 씨.”
강진현은 애써 희나를 달랬다.
그는 이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매사 침착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은 뻣뻣했고, 표정은 어색했다.
희나는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울음을 간신히 그쳤다.
“흑, 흐윽. 갑, 갑자기 울어서, 죄, 죄송해요. 당황스러우셨죠?”
“아닙니다. 저런 곳에 자기 혈육이 붙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라도 아주 놀랄 겁니다.”
강진현은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희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하던 일이나 계속할 것이지 이게 무슨 난동이야?”
걸걸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오더니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희나는 크게 놀라 고개를 돌려 보려고 했지만, 강진현이 희나의 두 눈을 가려 버렸기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 장면은 안 보는 게 좋겠습니다.”
강진현이 희나의 어깨를 붙잡아 눌러 앉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희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보호의 단검(S): 소지자를 외부의 위협에서 보호한다. 공격의 세기와 무관하게, 첫 번째 공격은 반드시 막아 준다.>
던전 안의 살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