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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3화 (2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3화

    “어휴, 멀미 나.”

    희나는 강진현의 품속 침낭에서 벗어나 헐떡이며 맑은 공기를 마셨다.

    ‘어떻게 사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통째로 들고 달릴 생각을 할 수 있지? 아니, 거기다가 누가 잡아가는지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던 나는 또 뭐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희나는 슬그머니 강진현을 훔쳐봤다.

    방금까지 비상식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식적인 얼굴을 하고선 얌전히 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헌터들은 다 이런가? 아니면 고랭크가 되면 다 상식을 잃어버리는 건가?’

    다소 칠칠하지 못한 면이 있지만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강진현까지 이렇다니!

    어쩌면 청룡 길드에는 이상한 헌터들만 모인 걸지도 몰랐다.

    “아쉽군요.”

    아무래도 강진현도 양반은 못 됐다. 희나가 속으로 흉을 보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때맞춰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게이트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는 중도에 희나가 깬 것이 몹시 아쉬운 눈치였다. 하긴, 그랬다. 이제는 희나도 걸어갈 테니 이동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 게 뻔했으니까.

    “그래도 멀미가 나서 더는 신세를 못 지겠더라고요.”

    희나는 거짓과 진실을 반반 섞어서 대답했다. 그리고 정신 차리자는 듯 앞치마를 탈탈 털었다.

    어제 꽉 매어 놓은 앞치마 매듭은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풀리지 않고 야무지게 묶여 있었다.

    “이제 속이 좀 괜찮아졌어요. 이제 가 볼까요?”

    “제가 안고 이동하는 편이 더 편할 텐데요.”

    희나는 강진현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아뇨. 그건 멀미 나서 안 되겠어요. 거기다 제가 짐 덩어리……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짐 덩어리는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강진현은 희나의 설명에 금방 납득하고 걸음을 옮겼다. 희나를 배려한 듯,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래도 신장 차이가 있다 보니 보폭만은 어쩔 수 없어서, 희나는 종종걸음으로 강진현을 따라 걸어야만 했다.

    짙은 색 테크 웨어를 갖추어 입은 남자와 그의 뒤를 따르는 노란 앞치마를 맨 여자.

    회색빛 황야에서 보기엔 굉장히 이질적인 조합이었다.

    희나와 강진현은 한 시간가량을 아무 대화 없이 묵묵히 걸었다.

    희나는 울퉁불퉁한 땅을 계속 걷는 것이 힘에 부쳐서 말이 없었고, 강진현은 그냥 말이 없었다.

    ‘멀미 나고 민망하더라도 그냥 짐짝처럼 안겨서 이동하겠다고 할 걸 그랬나?’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

    강진현이 목소리를 낮추며 팔을 뻗어 희나의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이냐 물어보려고 하는데, 강진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쉿. 저 멀리에 사람이 보입니다.”

    진지해진 상대의 태도에 희나도 덩달아 바짝 긴장해 속닥였다.

    “어디요?”

    “이희나 씨 시야로는 보이지 않을 겁니다. 꽤 멀리 있습니다.”

    S급 헌터의 슈퍼 파워라는 얘기였다. 괜히 맥이 탁 풀렸다.

    “아하. 그럼 가서 도와 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면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도와주거나요.”

    희나의 물음에 강진현은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스 몹을 처리해 안정화한 상태의 던전에 사람이 있는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거기다 일행 구성이 다소 미심쩍습니다.”

    “어떤데요?”

    “두 명은 손이 묶인 채 목줄을 차고 있고, 나머지 두 명은 무장한 채 걷고 있습니다.”

    “아.”

    조금 미심쩍은 수준이 아니라 아주 이상한 구성이었다.

    “저들도 게이트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니, 일단은 조용히 뒤를 따라 봅시다.”

    무려 S급 헌터이자 던전 전문가인 강진현이 이렇게 말하는데, 고작 D급 살림꾼에 불과한 희나가 낼 수 있는 의견은 하나뿐이었다.

    “예. 그렇게 해요.”

    선택지라고는 찬성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희나에게는 상대가 보이지도 않아서 누군가를 미행한다는 긴장감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더 미행(?)했을 때였다. 강진현이 멈춰 섰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무장한 자들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합류했습니다. 목줄을 찬 자들을 인수인계하려는 모양입니다.”

    “설마 이거 혹시…… 인신매매 같은 거예요?”

    “그런 듯 보입니다.”

    긍정의 대답을 듣자 등 뒤에 소름이 삭 돋았다.

    “진짜로 던전에서 사람을 사고판다고요? 이게 무슨 일인지, 아니, 왜 그러는지 아세요?”

    희나의 물음에 강진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던전 내부에 값비싼 자원들이 묻혀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예. 보석도 많이 나오고,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도 거기서 충당하는 거잖아요. 던전 부산물이요.”

    이건 일반인 수준의 각성자 상식을 지닌 희나조차도 알고 있을 정도로 기본적인 지식이었다.

    던전은 위험했지만, 몇몇 던전 안에 묻힌 천연자원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던전을 주기적으로 클리어하고, 내부를 탐사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던전 자원을 관리하는 건 정부의 소관입니다만, 간혹 신고하지 않은 던전에서 불법적인 방식으로 자원을 채굴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희나는 금방 강진현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강진현 헌터님 말씀으로는 여기가 미신고 던전이고, 저 사람들이 음지의 일을 하는 나쁜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맞습니다, 이희나 씨.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강진현이 기특한 학생을 보듯 희나를 칭찬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은 자원 채굴에 필요한 인력을 불법적으로 수급한다고 합니다. 취업 사기나 납치를 통한 인신매매로요.”

    그 말대로라면 희나와 강진현은 상당히 위험한 던전에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몬스터가 문제가 아니라, 불법 단체가 점거한 주둔지에 단둘이 똑 떨어졌다는 소리 아닌가?

    “그, 그럼 어떻게 해요?”

    희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건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애당초 이런 식으로 던전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조차 없는데, 그게 범죄자들이 득실득실한 미신고 던전이라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나 행운 스탯 45인 거 맞아?’

    희나가 자기의 행운 스탯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이희나 씨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이곳을 최대한 조용히 빠져나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정부에 미신고 던전이 있다고 보고할 생각입니다.”

    강진현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 상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가는 길에 똥이 있으니 피해서 가면 된다고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래. 이 사람은 우리나라 최고의, 아니, 세계에서 손꼽히는 S급 헌터야.’

    희나는 새삼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이 ‘그’ 강진현이란 사실을 체감했다.

    ‘강진현 헌터는 이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를 맡아본 적이 있을 테니까. 이런 곳에서 나 하나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터질 듯 콩닥거렸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저자들도 이동하고 있군요. 우리도 다시 출발하도록 하죠.”

    강진현이 희나를 재촉했다. 희나는 긴장으로 마른 입안을 축이고 강진현의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그대로 30분 정도를 더 걷자, 멀리만 보였던 산이 부쩍 가까워졌다. 힐끗 허공에 뜬 지도를 살펴보니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 건 맞았다. 이대로 산으로 쭉 걸어가면 던전 게이트가 나온다.

    “우리 계속 저 사람들이랑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하나요?”

    희나는 강진현에게 속닥거렸다. 내심 불한당들과 길이 엇갈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나의 바람이 순순히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예. 산어귀로 향하고 있군요.”

    강진현은 비극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거기다 한층 불길한 소리를 해 댔다.

    “저 산에 놈들의 주둔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더 보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더 늘어난다고요? 아니, 저 산이 범죄자들 소굴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무장 인원이 늘어났고, 그들의 통솔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산에서 무엇인가를 채굴하고 있나 보군요.”

    “안 돼……!”

    희나는 좌절했다. 저 산이 자원 채굴 장소라면 경계가 삼엄할 게 분명했다. 어떻게 들키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을 지나친단 말인가?

    S급 헌터인 강진현이면 몰라도 D급 살림꾼인 희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냥 ‘홈 스위트 홈’ 스킬을 솔직히 고백하고 내 집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할까?’

    희나는 진지하게 강진현에게 스킬을 밝힐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홈 스위트 홈’ 스킬을 들켰다가는 진짜로 던전 공략팀에 끌려가 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들키지 않을까요? 위장이라도 필요한 것 아니에요? 방법이 있으세요?”

    입고 있는 노란 개나리색 앞치마를 손짓하며 묻자, 강진현이 턱을 만졌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희나의 차림이 눈에 띄어 보이긴 했나 보다.

    “이희나 씨에겐 아이템을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아이템이요?”

    “존재감을 흐리게 만들어 주는 로브 아이템이 있습니다. 간혹 매복이 필요할 때 착용하는 아이템인데, 지금의 이희나 씨에게 필요해 보이는군요.”

    이야기하며 강진현이 인벤토리에서 회색 로브 한 벌을 꺼내 건넸다.

    “고맙습니다.”

    희나는 로브를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개나리색 앞치마가 로브 속에 감추어지니 존재감이 확 옅어졌다.

    하지만 이 로브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로브를 걸친 희나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강진현을 불렀다.

    “그런데 강진현 헌터님…….”

    “음.”

    강진현 또한 이 상황에 작게 침음했다.

    “이걸 어쩌죠?”

    ……희나는 바닥에 질질 끌리는 로브 자락을 끌어 올렸다. 옷소매마저 계속 흘러내려서 옷자락을 계속 잡고 있기도 쉽지 않은 형국이었다.

    강진현도 문제점을 지적했다.

    “길이가 맞지 않군요.”

    그랬다. 장신인 강진현 몸에 맞추어 제작한 로브는 희나가 입기에 너무 크고 길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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