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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2화 (22/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2화

    희나는 그의 계산속을 최대한 모른 척하며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 희나에게 강진현이 친근하게 말을 붙여 왔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아뇨. 잔업 마치고 먹으려고 해서 아직 못 먹었어요. 강진현 헌터님은요?”

    “저도 아직입니다. 다행히 비상식량을 챙겨 둔 것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먹을 것은 아니지만, 육포를 드리겠습니다. 허기는 때울 수 있을 겁니다.”

    강진현은 품속에서 주먹만 한 육포 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희나에게 육포 몇 조각을 주었고, 자기의 입안에도 몇 개 털어 넣었다.

    “…….”

    “…….”

    애매한 침묵이 흐르고, 불꽃이 타닥거리는 소리만 났다.

    희나는 이리저리 튀어 오르는 불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던전 지도 스킬을 남들한테 들키면 똑같은 제안을 듣겠지. 사실 강진현 헌터가 상식적이니 망정이지, 무력으로 협박했다면 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알려지면 위험해질 수 있는 스킬을 얼떨결에라도 말한 건 분명히 희나의 잘못이었다. 희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깊은 한숨 소리에 강진현이 희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 새카매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히 추측할 엄두조차 안 났다.

    “……그냥.”

    희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강진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희나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그냥?”

    희나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유는 몰랐다. 어쩌면 자기 말을 따라 하는 강진현의 모습에 괜히 설레서일지도 모른다.

    ‘S급 헌터를 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야, 이희나?’

    희나는 파닥거리며 괜한 부끄러움을 털어 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그냥, 이런 능력이 탄로 났으니 제 삶이 복잡해질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한숨 쉬었어요. 능력은 특이한데, 힘은 없고. 누구한테 휘둘리기 딱 좋은 상황이잖아요.”

    “그렇습니까?”

    강진현은 희나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공감했다.

    “……그렇겠군요. 이희나 씨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이 능력이 공개되면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지겠군요. 아니, 위험에 처할 수도 있겠네요.”

    과연, 똑똑했다. 이에 희나는 애타는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고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런데……. 강진현 헌터님.”

    “말씀하십시오.”

    “이거,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문제예요, 이건.”

    희나는 간곡하게 요청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강진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그건 강진현이 싫어할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강진현 헌터님같이 강한 분은 모르시겠지만, 저 같은 소시민에게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스킬일 수도 있어요. 제가 이 능력 때문에 어디 가서 납치당하거나, 노예처럼 부려지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제발 비밀로 좀…….”

    애원하자니 말이 끝없이 나왔다. 절대 위험한 던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위험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음.”

    강진현은 희나의 구구절절한 설득을 진득하게 앉아 들어 주었다.

    그는 마침내 희나가 할 말이 떨어져 헥헥거리며 숨을 들이켤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다섯 글자짜리 아주 담백한 답변이었다.

    담백해도 너무 담백하고, 짧아도 너무 짧았기에 희나는 잠깐 귀를 의심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속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나 보다.

    “이렇게 쉽게?”

    조금 허탈한 목소리에 강진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한 번 튕겨 본 거였습니까? 그렇다기엔 사연이 절절해서 진짜인 줄 알았는데요.”

    희나는 헉하고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아뇨! 절대 튕긴 거 아니에요! 말이 헛나왔어요! 아까까지 막 잡으시다가, 갑자기 알겠다고 하시니까.”

    “가만히 말씀을 들으며 생각해 보니 당혹스러우실 만한 제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전투계 각성자인 이희나 씨에게 던전 공략팀 스카우트 제안을 한 건 확실히 과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이희나 씨를 부담스럽게 했군요.”

    고작 D급 각성자에게 ‘미안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강진현의 낯에 모닥불 그림자가 일렁였다.

    희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강진현은 희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 지도 스킬은 없는 셈 치고 묻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원하시는 분의 삶에 파란을 일으킬 수는 없지요.”

    “……고맙습니다, 강진현 헌터님.”

    희나는 진심을 담아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강진현은 S급인 데다,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강력한 헌터였다.

    힘이 전부가 된 이 각박한 세상에서 S급 헌터가 하는 말은 안 되는 것이라도 되게 해야 했고, 그 어떤 횡포를 부리더라도 참아 내야만 했다.

    강진현도 얼마든지 희나를 강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중하게 희나의 의사를 물었고, 그녀의 사정을 헤아려 주었다.

    보통 자기의 힘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군다는 상급 헌터에게 보기 힘든 정중함이었다.

    “아닙니다. 다만, 생각이 바뀌시거나 의도치 않은 일이 생긴다면 제게 가장 먼저 알려 주십시오. 청룡 길드는 이희나 씨를 지켜 드릴 수 있습니다.”

    강진현은 마지막까지 진한 감동을 남겼다. 요 한 달간 철딱서니라고는 하나도 없는 헌터들만 마주했던 희나였던지라, 감동은 더했다.

    “강진현 헌터님은, 생각 이상으로 좋은 분이시군요!”

    희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강진현을 바라보았다.

    강진현은 그런 눈빛에 익숙한지 간단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나저나 이희나 씨,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어……. 그러게요.”

    몸 상태를 지적하자 갑자기 피로가 쏟아지듯 몰려왔다. 체근민 합이 30도 안 되는 희나에게 오늘 하루는 조금 체력에 부친 날이었다.

    ‘밥심’으로 체력을 채울 시간조차 없이 바빴으니까.

    “침상……. 침상을 만들어야겠네요.”

    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침상을 만들 재료를 찾았다.

    참고로 희나의 ‘안락한 침상’ 스킬은 그사이 C랭크가 되어서, 거의 모든 재료로 편안한 이부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한편, 강진현은 황야의 누런 풀들을 주섬주섬 뜯어 제끼는 희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희나 씨,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제가 잘 곳을 만들려고요.”

    희나의 대답에 강진현이 꺼내 둔 침낭을 손가락질했다.

    “멀쩡한 침낭을 꺼내 두었는데, 왜 맨바닥에서 잘 생각을 합니까? 이희나 씨 스탯으로 이런 맨바닥에서 자면 골병듭니다.”

    “어. 저건 강진현 헌터님 거잖아요. 강진현 헌터님이 쓰셔야……죠?”

    강진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답했다.

    “이희나 씨, 저를 대체 어떤 파렴치한으로 보고 있는 겁니까?”

    “파렴치한이라뇨?”

    그저 희나는 ‘안락한 침상’ 스킬을 믿어 의심치 않는 거였다.

    한낱 풀때기라도 이 스킬의 효과에 닿으면 그 무엇보다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 던전 공략을 다녀온 강진현은 그 사실을 몰랐다. 희나의 탁월한 손맛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저는 잠들 생각이 없었으니 이희나 씨가 이 침낭을 쓰시면 됩니다.”

    “한 달 동안이나 던전 토벌을 갔다 오신 거잖아요. 안 피곤하세요?”

    “괜찮습니다. 거기다 어차피 보초 설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 환영의 가루 어쩌고를 뿌려 두면 괜찮다면서요?”

    “방심은 금물입니다. 잔챙이지만 환영의 마석 가루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전투가 가능한 제가 보초를 전담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강진현은 벽 같았다.

    결국 희나는 모아 놓은 잔디 무더기를 대충 버리고 강진현의 침낭으로 갔다.

    <상급 침낭(A): 외부 기온과 상관없이 체온이 유지된다. 회복 속도 +5%>

    시스템 설명이 뜨는 걸 보니 침낭은 던전 부산물로 만든 아이템이었다. A급인 걸 보니 엄청 비쌀 게 틀림없었다.

    ‘잘못하다 망가지면 내 통장도 종 치는 거 아냐?’

    강진현이 침낭 앞에서 머뭇거리는 희나를 재촉했다.

    “내일 동이 트자마자 출발할 테니, 체력 비축이 필요합니다. 빨리 주무십시오.”

    “앗. 네, 네.”

    희나는 헐레벌떡 침낭을 펼쳤다. 그러면서 침낭에 ‘안락한 침상’ 스킬을 썼다.

    A급 침낭에 스킬을 걸어서 그런지 부가 효과도 엄청났다. 던전 공략으로 인한 피로가 쌓인 강진현에게 필요할 것 같았다.

    “저, 강진현 헌터님. 30분이라도 눈 붙이실래요? 뭐가 나타나는 것 같으면 제가 빨리 깨울게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감이 예민해서 집이 아닌 곳에서는 거의 잠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희나 씨가 쓰십시오.”

    강진현은 희나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하긴, S급 헌터면 아주 작은 소리도 명료하게 들릴 테니 어지간한 신경 줄이 아니고서야 깊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부가 효과 되게 잘 떴는데. 아쉽다.’

    희나는 아쉬워하며 침낭에 꾸물꾸물 들어갔다. 몸을 감싸는 침낭은 몹시 포근했다.

    오늘 일과가 꽤 피로하긴 했던지, 희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쿨쿨 잠들었다. 꿈조차 없는 꿀 같은 잠이었다.

    강진현은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희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밤새 곁을 지켜 주었다.

    * * *

    ‘으……. 메슥거려.’

    희나는 미약한 멀미를 느끼며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마치 거나하게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바닥이 울렁울렁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오장육부가 꿀렁댔다.

    “읍.”

    손을 올려 입을 틀어막자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깨어났군요.”

    “아, 예. 그런데 여기는……?”

    희나는 비몽사몽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있었고, 주변 풍광이 흐릿했다. 마치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시야도 이상하게 높았다.

    상황을 깨달은 건 뭐지, 하는 생각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엄마야! 이게 뭐예요!”

    희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침낭 안에 꽁꽁 싸인 몸은 그렇게 자유롭지 못했다. 덕분에 희나는 꿈틀대는 굼벵이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

    “몸부림치시면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들썩이는 희나를 고쳐 안은 강진현이 경고했다.

    희나는 지금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없어 입만 벙긋거렸다.

    “아니, 저, 그게, 강, 진현, 헌터, 헌터님!”

    강진현은 방정맞은 희나의 부름에 점잖게 대꾸했다.

    “왜 그러십니까?”

    희나가 애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제가 걸어갈, 테니까, 좀, 내려 주시겠, 어요?”

    그랬다. 지금 강진현은 공주님 안기로 희나를 침낭째 들고 이동하고 있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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